제209화
209화
“이 수는 누가 놓은 것이냐.”
“어머니십니다.”
“이리 수를 잘 놓는 사람은 정말 처음 본 것 같구나.”
황제는 자기가 받기만 할 수는 없겠다고 하더니 그 자리에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고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적었다.
황제가 서화에 그렇게 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이들은 곧 그 주위로 빼곡히 모여들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붓이 지나가면 폭포가 생기고 나뭇가지가 생기네요. 새가 날아가고 짐승이 울고요.”
소청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을 했고 북리의천은 그 말을 들으면서 서서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평생 칼밥을 먹던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도 무리를 깨닫게 되는 모양이었는지 북리의천 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도 깨달음의 경지에 들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었던 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기함했다.
이 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고도 이렇게 연결을 짓는 모양이구나 했는데 원래는 그냥 간단하게 한 장만 그리고 끝낼 생각이었지만 분위기를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무공서만큼은 남 못지않게 읽은 황제였기에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 얼마나 귀한 경험인지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자기가 무언가 단서를 주고 산본의가에 있던 무인들이 거기에서 무리(武理)를 깨닫게 된다면 그만한 선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리던 것을 치우고 다른 그림을 다시 그렸다.
처음에는 별다른 뜻 없이 그리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용맹한 기상을 고취하는 것으로 그리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했다.
붓도 바꿔서 생명력이 넘치는 풍경을 그려내자 탄성은 점점 잦아들고 무인들의 눈이 몽롱해졌다.
문득 아진을 보자 아진이 그를 마주 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진도 황제가 만들어 낸 상황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러면서 황제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을 안겼다고 생각했다.
무아지경에 빠졌던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그런 상태에 빠져들고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때는 모두가 스스로 절제를 한 듯했다.
그러면서도 다음에도 이를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황제 역시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두 장의 그림을 더 그렸다.
“낙관도 찍었으니 각각의 그림이 황금 한 관은 족히 나갈 것이다. 대대로 가보로 삼도록 하여라.”
황제는 그림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고민이 돼서 아진에게 모두 넘겼다.
그러면 아진이 알아서 쓰임새를 정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는 글씨와 그림을 볼 줄 아는 눈이 없을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에 깊이 빠져드는 모습을 보고 그 여운이 오래 남았다.
“생각지도 못한 견식을 보여 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제가 검무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폐하.”
린린이 그러고 나오자 황제는 무척이나 기꺼워 손뼉을 쳤다.
“이렇게 감격스러운 일이 다 있겠느냐. 부탁하겠다. 린린.”
그러자 린린이 황제를 대연무장으로 청했다.
의가에 대연무장이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지만 의가에 체류하는 무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그들이 수련할 곳이 필요해지면서 산본의가에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있었다.
린린이 검무를 보여 주겠다고 한 사람은 황제였기에 다른 이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같이 봐도 될지 알지 못했다.
그러자 린린이 먼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자리가 협소해서 많은 분을 모시기는 어렵겠습니다만 무인들께서 보시는 것은 금하지 않겠습니다.”
“쳇.”
도종의 입에서 당장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무인들은 우르르 연무장으로 향해 달려갔다.
그런 기회가 왔는데 사양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내 황제까지 그곳으로 가자 린린이 검을 뽑아 들었다.
황제의 앞에서 날붙이를 드는 것은 엄히 금지되는 일이었지만 황제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린린이 기수식을 취하고 초식을 하나하나 단정하게 펼쳐나갔다.
팔과 허리, 다리.
몸의 모든 부위가 오로지 초식의 구현을 위해서 형태를 이루며 힘을 쏟아붓고 있었고 굳게 선 두 다리는 땅의 기운을 끌어올리는 듯했다.
린린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대기가 무섭게 일렁였다.
바닥에 있던 작은 흙먼지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듯 일어났고 제법 무게가 나는 돌들도 떠올랐다.
린린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그것들도 함께 움직이더니 린린이 검을 뻗자 검강과 함께 날아갔다.
린린은 섬마대를 바라보았고 그들은 사전에 어떤 이야기도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린린의 눈빛을 알아보고 그곳으로 나왔다.
그리고 비무인지 검무인지 아리송한 검격이 펼쳐졌다.
눈을 뗄 수 없이 강맹하고 위협적이며 아름다운 검격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펼쳐지는 것이 마공의 진수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차렸다.
그곳에 있는 이들이라면 마공에 거부감이 없었지만 린린과 섬마대가 황제의 앞에서 함께 마공을 펼치는 것을 보면서 린린의 노림수를 깨달았다.
황제가 그들의 마공을 금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곳에 있는 이들에게 공표하는 의미였다.
섬마대주가 린린을 향해 달려오며 허공으로 도약하고 커다랗게 공중제비를 돌아 린린의 바로 앞에 짓쳐들었다.
그와 동시에 섬마대원들도 린린을 향해 검을 휘둘렀는데 린린은 넉넉히 그들 모두를 상대했다.
하나의 검으로, 결코 느리지 않은 네 개의 검을 상대하며 농락하는 동안 색색의 불꽃이 검에서 튀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네 개의 검.
그런데도 린린의 검은 그것들을 압도하고 남음이 있었다.
이내 시퍼런 검기가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가자 섬전대가 풀쩍 뛰어오르며 그것을 피했고 동시에 네 사람이 검을 휘둘러 허공을 찢어발겼다.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러다가 누가 실수라도 하면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것은 너무나 예사로운 일이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린린이 섬전대주의 가슴이 빈틈을 타 맹렬히 달려가 검을 꽂았던 것이다.
“허……!”
검무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서 단말마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린린은 저를 공격해 오는 섬전대원들을 향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찬란한 검이 군주처럼 잔상을 이끌고 위엄 있게 빛났다.
그대로 두고 보다가는 섬전대주가 위험해지겠다고 생각하며 아진이 그곳으로 들어갔고 섬전대주는 아진의 손이 닿고 얼마 되지 않아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보았다.
이미 여러 번 보았다고 이제는 새삼스럽게 놀라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들의 검무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린린이나 섬전대의 몸에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처럼 초식의 정밀함을 볼 수 있는 눈은 없었지만 그저 감격스러웠다.
저런 린린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
저런 섬전대라면 기대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훈풍을 불게 했다.
“대단하구나. 이렇게 흡족한 잔치는 처음 보았다. 짐이 상상한 것 이상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놀라움을 안겨 주도록 하여라.”
황제는 그들 모두에게 황금 일 관씩을 상으로 내렸고 아진은 황실에 왜 그렇게 막대한 운영비가 필요한지 알 것 같았다.
어느덧 석양이 물들기 시작했고 다시 술과 음식이 돌았다.
잔치는 밤늦도록 계속되었고 황제는 들어야 할 말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신기해했다.
“짐이 오늘 이 자리에 없었다면,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어찌할 뻔했느냐. 이 자리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어제의 내가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구나.”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말했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훌륭한 군주를 모시고 있는지 깨달았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밤도 마침내 그 끝을 보았고 새로운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 * *
최종적으로 영약 채집행에 나서게 된 사람은 아진과 황제, 그리고 소청이었다.
북진무사는 절강성까지는 함께 갔지만 백여 리가 떨어진 섬까지 허공을 날아가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북리의천은 끝까지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결국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북리의천까지 그렇게 되자 황제는 이 일이 정말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소청은 그곳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이냐.”
진짜 놀랄 대목은 그 부분이었다.
“흑주가 도와주면 가능합니다. 폐하.”
소청의 믿는 구석.
그것은 바로 흑주였다.
황제는 그렇지 않아도 이미 흑주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버린 터였는데 흑주는 황제가 자기를 탐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처럼 소청에게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황제도 눈치가 있었고 자기를 싫어하는 이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유형은 아니었는데도 흑주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우선 여기에서 하루 쉬었다가 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폐하. 내공을 회복하고 가야 해서 말입니다.”
아진이 말하자 황제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백 리 길이다.
백 리 길을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아진과 소청이 해야 하는 것은 도중에 잠시 내려갈 틈도 없이 계속 허공을 차고 날아가는 거였다.
더군다나 아진은 황제까지 등에 업고 가야 해서 정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지 황제는 상당히 의문이 들었다.
당연히 가고 싶기는 하지만 도중에 실패하고 돌아오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아니라고 여겼다.
북진무사는 섬이 있는 곳 근처까지라도 배를 띄워서 따라가면 안 되겠냐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부탁했지만 아진은 끝내 거절했다.
어차피 그가 배를 타고 따라올 수 있는 구간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없었고 그 구간을 넘어서고부터는 북진무사가 위험해질 수 있어서였다.
뱃길이 험하기로 워낙 유명한 곳이라 백이면 백, 배가 뒤집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진무사를 구하기 위해 힘을 빼야 하는데 그것만큼은 사양하겠다는 거였다.
그것은 영약 채집행의 의미도 있었지만 벽에 부딪힌 소청에게 벽을 깨고 도약하도록 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흑주가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가능하면 흑주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주파하는 것이 소청의 목표였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소청이 막혀 있는 것은 경공이 아니었지만 이 부분에서 극의에 이른다면 소청이 갖고 있던 문제에서도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세 사람이 조용히 객잔으로 들어갔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는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다녔던 적이 없었기에 약간의 흥분감을 느끼고 있었다.
잠행을 한다고 해도 지척에 그의 호위들이 수십 명씩 깔려 있었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호위까지 하면 백 명이 가뿐히 넘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직 아진과 소청뿐이었는데 함께 있는 사람들이 그들뿐이라고 해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린린이 아진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천외천.
하늘 외의 하늘.
십천이라 불리는 자들을 거뜬히 뛰어넘는 압도적인 무위.
이제 곧 그와 함께 영초가 파처럼 자란다는 곳에 이르게 될 터였다.
“그곳에서는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진이 주의를 시켰지만 황제는 왠지 집중력이 굉장히 떨어진 듯 보였다.
객잔에 드나드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만 해도 너무 신이 나서 정신이 없는 것 같았는데 소청도 그 모습을 재미있어하며 바라보았다.
“객잔에 가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던데.”
황제가 아진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건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소설을 봤지. 강호 영웅들이 나오는 소설을 보면 늘 객잔에서 싸움이 벌어져. 객잔에 미인들도 많던데.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아서 면사를 쓰고 있고.”
그러면서 휘휘 둘러보더니 몇몇 여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