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208화
“하지만…… 서 소협은 정파의 사람이고…… 본교의 일에 나서 주실 리가…….”
역천마의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린린이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는 늘 말해 왔다. 자기 만두는 자기가 지킨다고 말이지.”
웬 헛소리인가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린린이 웃었다.
“내 말은 다들 그렇게 겁먹을 것 없다는 얘기다.”
“본신의 힘은 왜 못 찾고 계신 것인지요. 지존?”
역천마의가 억울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들은 이제 황제의 존재는 잊은 듯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염마에게 내가 말을 해 두어서다. 이번에는 전만큼 강해질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적당히 하찮은 몸이 되면 된다고. 나는 이번 생에서까지 강해지고 싶지 않았다. 충분히 강하고도 후회와 허무함만이 남는 삶을 살아서 이번에는 다르게 살고 싶어서 말이지.”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아진만큼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제가 만든 무공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구결을 외울 때 따라 외워서 상대방의 무공을 무효화 하는 건데 익히기가 쉽지는 않지만 지존이라면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단리서언의 앞에서 해 본 적이 있는데 매번 당황하는 게 느껴졌어요.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요.”
역천마의는 린린의 말을 듣고 위로를 하고 싶었던 듯이 말했다.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내 생각에는 그럴 시간에 내가 하려는 무공의 구결을 외우고 그걸로 공격하는 게 나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린린의 말에 역천마의가 고개를 숙이고 금세 풀이 죽었다.
아진은 역천마의를 격려해 주고 싶었지만 아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상대가 뭘 하려고 하는 건지 알아내고 그것을 무효화시키려고 구결을 외웠는데 정작 상대가 하는 무공이 그게 아니라면 피 같은 시간을 날리게 되는 거였다.
역천마의가 단리서언에게 효과를 본 것은 역천마의가 가지고 있던 특별한 능력이 결부돼 있어서 그런 듯했다.
단리서언에 대해 정신 조종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그의 생각을 예측하는 게 가능했기에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단리서언이 꿈을 꾼다면 그 꿈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 것 같으냐.”
황제가 묻자 섬전대주가 말했다.
“마도 천하일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것은 그가 단리서언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단리서언이라면 분명 그것을 꿈꿀 거라는 의미였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겠구나.”
황제는 처음보다 많이 진중해진 표정이 되어 있었다.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되자 마냥 웃기만 할 수가 없게 된 듯했다.
“유익한 자리였다. 너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나는 신교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 했을 것이다. 쉽게 내 발아래에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말이다.”
그것은 아진도 마찬가지였다.
“단리서언은 지략이 뛰어납니다. 그 점에서는 지존이 단연 밀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리서언은 지존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끌면서 여러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자입니다. 저는 그 점이 가장 신경 쓰입니다.”
역천마의가 말하자 그렇지 않아도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는 듯했다.
“몰랐다면 몰라도 일단 알았으니 거기에 맞춰서 대비를 해 나가면 될 것 같구나. 나는 희망적으로 본다. 그렇지 않으냐. 아진아.”
‘나는 희망적으로 본다. 그렇지 않으냐. 아진아’라는 말에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건가 해서 아진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어떤 부분에 대해 긍정을 바란다는 건가 해서였다.
아진도 그곳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단리서언이 쉽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도련주를 상대할 때 불평을 하지 않는 건데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리서언에 비하면 서도련주는 천사 같았을지도 모르는 건데.’
그러나 어차피 싸움은 시작된 듯했고 그 일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후였다.
* * *
잔칫상이 놓이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산본의가의 의원과 의생, 의녀들뿐만 아니라 혈천방과 비룡채, 산본의가를 지키는 무인들까지 빠짐없이 자리를 채웠다.
황제는 비룡채주와 혈천방주를 가까이 불러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중에 향화문이 생각났는데 향화문주인 짱돌을 불러서 그와도 같이 얘기를 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부른 거였는데 조금만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깊이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천마 신교의 마두들과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는 어느새 심도 있는 내용으로 향했다.
황제가 겉으로 잠행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유랑의 의미를 더 많이 두었는데 그들에게 배우게 되는 것들이 절대 적지 않았다.
혈천방주는 왈패들이 하게 되는 사업에 대해 말을 하면서 흑도가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법을 적나라하게 들려주었다.
도박장이나 기루와 연계해서, 성실하게 살던 사람에게 고리의 돈을 쓰게 만들고 그것을 빌미로 삶을 송두리째 흔들며 가족 전체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기도 한다는 말도 해 주었다.
황제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놀랐다.
그냥 개인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면 그런 일에 휘말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작정하고 덤벼들면 손을 쓸 틈도 없이 인생이 풍비박산 난다는 사실에 경악한 것이다.
“저희는 그런 것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저희가 아는 곳 중에는 앵속을 먹여서 사람들을 중독시키고 앵속을 비싼 값에 팔아서 가산을 탕진하게 만드는 곳도 있었습니다. 좋은 걸 가지고 있다고 소문 난 곳이 있으면 그런 식으로 해서 뺏는 이들이 있었지요. 일단 그렇게 목표가 되면 예쁜 여자건 돈이건 장원이건 뭐든 뺏는 게 가능했습니다.”
“명예와 체면을 뺏는 것도 가능했지요. 폐하를 보필하다가 낙향한 이들 중에 그런 상황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자들에게도 앵속으로 접근해서 다른 이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지요. 약에 취해서 하는 헛소리라고 해 버리면 다른 사람들도 그 말에 선동되었습니다.”
황제는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았는가 하면서 고개를 저어댔다.
“그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겠군.”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폐하. 산본처럼 치안이 확실한 곳이나 산본 인근의 곳들은 청렴하게 유지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그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관리와 지역 유지, 거기에 무관 하나 정도만 결탁하면 정말 쉬운 일이니 말입니다.”
먹고 마시자고, 웃고 떠들자고 부른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황제는 시간이 갈수록 표정이 굳어 갔다.
황궁의 심처에서 자신의 귀에 들어오고 손에 전해지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전부인 것처럼 굴었던 것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구나. 짐이 너무 무심하였구나.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다. 계속 이리 손을 놓을 것이 아니야. 아진은 고사(固辭)하였지만 짐에게 인재를 천거하는 것까지 거부하지는 말도록 하여라.”
황제가 아진에게 말하자 아진도 그 명만큼은 공손하게 받았다.
“혈천방주와 비룡채주가 모두 그 일에 적합합니다. 폐하. 두 사람을 금의위 제기에 봉하시고 그 일을 뿌리 뽑게 하시지요. 신분이 낮아 일을 도모하는데 여러 제약이 있을 것이니 지휘사와 진무사도 그 일을 간섭하지 못하게 하시고 일의 진행을 폐하께서 직접 살피신다면 실효를 거둘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북진무사 유지란이 함께 있었고 적극적으로 아진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소신의 죄를 면키가 어렵습니다. 폐하. 이자들은 소신이 접근하기 어려운 정보망과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그리 등용하시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북진무사까지 그렇게 말을 하니 그러면 이 일은 그리 진행하는 것이 좋겠구나. 이 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아진에 의해 보증이 된 사람들이니 등용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만 데리고 간다면 수족을 부리는 일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니 각자 수하들 일부를 데려갈 수 있도록 하라.”
자기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조금씩 알려주면 황제의 치세에 도움이 될까 하며 말을 하던 혈천방주와 비룡채주는 갑작스럽게 일이 커지는 것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폐…… 폐하. 저 같은 무지렁이를 어찌 그런…… 그것은 절대로 아니 될 일입니다…….”
비룡채주가 깜짝 놀라며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말했지만 황제는 허허 웃었다.
“왜 혈천방주는 저리 하지 않느냐.”
“저는…… 아무 생각이 없사옵니다. 폐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아무 생각이 없사옵니다.”
황제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지금 가지고 있는 너희의 울분과 너희가 행해왔던 일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너희가 사는 동안 느꼈던 자부심. 그것들을 잊지 말고 계속해서 마음에 되새기거라.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이다. 아진이 언제 떨치고 나갔는지, 누구를 돕고 어떤 이들을 구했는지 너희도 알 것이다. 너희도 그렇게 하면 된다. 너희의 등에 날개는 내가 달아 줄 것이다.”
“…….”
황제는 그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벌써 납작 엎드리며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쳤을 텐데 그들은 넋이 나가서 황제를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선이남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고 아진은 그런 선이남을 보았다.
선이남 본인이 자각하고 있을지 어떨지 모르지만 이미 선이남으로 증명이 되었기에 황제가 지체 없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이남 형님 때문이신지요. 폐하.”
아진이 그 자리에서 말하자 황제가 웃음을 지었다.
정작 선이남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다. 우선은 아진을 믿어서 그런 것이지만 선 부정 때문에 산본의가의 인물들에 대한 믿음이 더 커졌다는 말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니 두 사람도 이 말을 잘 새기도록 하여라. 두 사람으로 인해 내가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는 말 같은 것도 나오지 않았다.
제정신이 들려면 아직 시간이 더 있어야 할 듯했다.
“정말 잔치를 벌여야겠습니다.”
아진이 더 들떠서 기뻐하자 혈천방과 비룡채 사람들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인간 같지도 않은 저희를 거두어 주시고 사람으로 대우해 주시고 이제는…… 이제는…… 어흐으으윽……!”
누군가 말하자 그 뒤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짝눈 형님. 보고 계시오? 우리가 금의위요. 우리가 금의위가 되게 생겼소. 형님 때문이오. 형님 때문에 아진 공자님의 마음을 알아서 우리가 여태껏 공자님 옆에 붙어 있다가. 흑. 그러다 보니 오늘 같은 날이. 흑.”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아진도 코끝이 찡해져 왔다.
황제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슬프고 감격스러워도 감히 황상의 앞에서는 제 감정을 다 드러낼 수가 없는 법인데 산적과 왈패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황제는 그들의 그 미숙함이 좋았다.
그거야말로 희한한 일이었다.
책망하려면 책망할 것이 수두룩한데 그저 웃음이 나오는 것이.
차려진 음식은 많지 않았지만 그 어느 곳에서 열린 잔치보다 흥겨웠다.
도중에 소청이 슬그머니 다가와 이전에 준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고이 접힌 손수건을 전했다.
목면천에 색색의 고운 실로 수가 놓인 손수건은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