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207화
“폐하께서는 그동안 아저씨들이 산본의가를 위해서 얼마나 헌신해 왔는지 알고 계세요. 그동안 제가 그 얘기를 여러 차례 해 드려서 아저씨들을 보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평소의 모습을 보여 주시면 돼요.”
“우리가 뭘 했다고…….”
그들은 쑥스럽고 난처한 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각자 세신을 한다, 자기들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는다 하며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아진이 먼저 산본의가로 돌아가자 잔치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 가고 있었다.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니 선이남은 없고 린린과 신교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역시나 황제의 관심은 천마신교에서 온 이들에게 집중된 것 같았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교주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묻는 듯했는데 아진의 앞에서는 다 말을 하지 못하던 것도 황제의 앞에서는 전부 털어놓고 있었다.
그 자리가 얼마나 지엄한 자리인지 그들도 알고 있었을 터였다.
“신기한 일이구나. 린린이 천마신교의 교주였다니. 짐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설마하니 그 말까지 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음양인이라고 속인 걸 들키고 나서 린린이 통 크게 털어놔 버린 듯했다.
돌이켜 보면, 그게 그렇게 절대로 말 못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진 자신의 이야기는 조금 더 받아들여지기가 어렵겠지만 무공이나 마공으로 별별 희한한 일들이 다 가능한 세상이니만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황제에게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패월악이라고 했느냐. 그런데 짐은 한편으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짐에게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래서 모습이 완전히 바뀐 채로 짐의 신하들을 찾아간다면 그자들도 짐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황제가 말하며 역천마의를 보았다.
“역천마의는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었느냐.”
“지존이 아니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귀찮음을 그렇게까지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저희 지존처럼 잘 지을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지존이 그 표정을 지으면 정말 귀찮아 돌아가실 것 같은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역천마의가 조곤조곤 설명하자 경비 무사들과 섬전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고 황제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구나. 그런데 린린이 교주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지금의 교주는 다를 텐데 어떻게 린린을 따라온 것이냐.”
그 말에는 역천마의도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대는 황제였다.
황제에 대한 소문은, 아무리 외부와 교류가 적은 십만대산이라고 해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을 감지한 듯했다.
“…….”
그러자 비상하게 그 낌새를 알아차린 황제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너희의 마음을 시험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신교와 신교도들에 대해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짐이 너희의 말을 문제 삼으려고 했다면 너희가 교주를 지존이라고 부르는 것만 가지고도 벌써 문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제야 그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 보자꾸나. 지존은 짐이다. 짐 외에 다른 이를 지존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니 린린을 지존이라고 부르지 말라 하면 너희는 어쩔 것이냐.”
그러자 역천마의가 린린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그러면 안 부를 것입니다. 교주님이라고 불러도 되고 천마님이라고 불러도 되는데 굳이 지존이라는 호칭을 고수하겠다고 목숨을 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더니 웃음이 쉽게 그치지 않는 듯 아예 눈물까지 닦았다.
“린린. 화가 나지 않으냐.”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여깁니다. 폐하. 저는 이들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존이라는 호칭에 얽매여서 목숨을 내놓는다면 저는 그 어리석음에 치를 떨면서 먼저 주종의 관계를 끝낼 것입니다.”
“그렇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황제는 신기하다는 듯이 린린을 보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껴서 그런 듯했다.
“그렇구나. 짐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짐이라면 그것을 배신이라고 여겼을 것 같다.”
“저는 이들의 마음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을 이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가치 있는 생명을 별 것 아닌 일에 거는 것은 제가 바라지 않습니다. 이들도 그것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경비 무사와 섬전대원들은 자기들도 그런 생각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말이지.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짐이 너무 꽉 막혔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역천마의만 해도 그렇습니다. 단리서언이 천마신교를 다스리는 동안 역천마의는 수도 없이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단순히 죽을 뻔했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역천마의는 저를 향한 마음을 지켰는데 저를 지존이라고 부르는 걸 포기했다고 어찌 그 마음이 퇴색했다고 하겠는지요.”
황제는 그 말을 대충 듣지 않고 오래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린린. 짐은 네가 진심으로 부럽구나. 나는 누구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지. 솔직히 확신이 서질 않아.”
“제 오라버니는 믿으셔도 됩니다. 폐하. 그리고 제 아버지와 검신 대협도 믿으셔도 됩니다.”
“너는 왜 빠지느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린린의 말에 황제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려고 했으니 웃은 것이지 그 말을 문제 삼자면 얼마든지 얼마 삼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진은 린린의 말을 들으면서 몇 번이나 심장이 발등에 떨어졌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희한한 일이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짐은 이 자리에서 당장 죄를 물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린린.”
“그럴 것 같습니다. 저라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도 좀 희한하게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미련하게 자꾸 솔직하게 말을 하는 건가 해서 말입니다.”
아진도 같은 생각이었다.
린린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생각을 능숙하게 숨길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고 그래서 사람들의 앞에서는 말을 최대한 줄이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황제의 앞에서는 어떤 여과도 없이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이 많다 보면 실수도 잦아지는 법인데 그것을 걱정하지 않고 모두 토로하는 듯했다.
그런 린린을 보면서 아진은 린린이 황제에게 깨닫게 해 주고 싶은 게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다시 찾은 부하들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다고도 느꼈다.
황제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했고 그들 각자에게 더 많은 질문을 했다.
아진도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나 단리서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듣게 됐는데 단리서언이 전면에 나선다면 어쩌면 그는 사도련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을 듯했다.
“가장 까다로운 것은 교주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반역을 하려는 자가 보인다면 교주는 그 일이 커지기 전에 선제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교주는 일을 꾸민 사람을 치는 대신 직접 작전의 수행을 맡았던 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방법을 취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람들을 훨씬 더 위축시킵니다.”
섬전대주가 말하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책을 내놓는 사람들은 사실 겁이 많지. 정작 자기 자신은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예. 교주는 본보기 삼아 한두 곳을 처참하게 괴멸시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교주 입장에서도 마가 한두 곳을 완전히 멸문시키는 것은 부담이 될 것입니다. 신교의 마가는, 더군다나 그중 사대 마가는 신교의 전력을 나눠서 담당한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거대한 적을 상대할 때는 그들의 힘이 필요하기에 완전히 찍어 내 버리지는 않는다는 말인 모양이구나.”
“예. 폐하. 그 말씀이 맞습니다. 대신 찍어 내기로 작정한 사람이나 세력에 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무자비하게 숙청을 자행합니다. 지금 사대 마가는 교주의 앞에서 모두 머리를 조아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섬전대주가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조했다.
“그러면 지금의 천마신교는 단리서언의 아래에서 하나로 단합이 되고 있다고 봐야 하느냐.”
그 말에는 대답이 빨리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자신 없다는 표정을 한 채 바라보았다.
“공포감을 조성해서 마음을 가져가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저희 지존을 만나고 금방 마음을 돌렸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존이 돌아왔다는 것을 안다면 아마 신교의 대부분은 지존을 향해 마음을 돌릴 것입니다.”
그 말은 뇌혈검에게서 나왔다.
그때까지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비고의 경비 무사라는 위치를 생각할 때 그 말에는 큰 의미가 있는 듯했다.
뇌혈검이 말하자 다른 경비 무사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은 섬전대도 마찬가지였다.
“본교는 다른 어느 집단보다도 힘의 원리를 강하게 따릅니다. 강자존의 법칙이 철저하게 적용되고 그 법칙이 본교를 지배합니다. 그러니 지존이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모두 당연히 지존에게 돌아설 것입니다.”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이 린린을 바라보았다.
“그 말은 린린이, 그러니까 패월악이 단리서언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냐.”
“물론입니다. 폐하. 저희 지존은 그런 분이십니다.”
역천마의가 말하자 린린이 피식 웃었다.
자랑스럽다는 게 아니라 난감하다는 얼굴이었다.
“린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이 사실이냐.”
황제는 그거야말로 중요한 문제라는 듯 물었다.
“패월악이 단리서언보다 강하냐고 물으신다면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단리서언보다 강하냐고 하신다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린린의 말에 마두들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몇 사람은 아니라며 항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린린은 사실을 직시하라는 듯이 그들을 보았다.
“정파 무림에는 십천이 있다. 강호에서 가장 강한 열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 검신 대협을 십천 중 가장 강하다고들 말한다. 우선 그 말도 맞는 말은 아니다. 내 오라버니가 전면에 나섰다면 사람들은 내 오라버니가 십천, 아니 천외천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모두가 숨소리도 내지 않고 린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본좌가 본신의 힘을 되찾는다면 검신 대협을 넘어설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라버니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본좌가 강한지 단리서언이 강한지 따지려고 할 것도 없다. 본신의 힘을 되찾지 못한 지금의 상태로 나는 단리서언보다 약하지만 그는 절대 내 오라버니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러면 된 것이 아니냐.”
린린은 자신의 부하들을 다독이듯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