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206화
“선이남도 데리고 가야겠다. 금의위 북진무사도 함께 가도록 하지.”
선이남은 그렇다 해도 금의위 북진무사는 뭔가 했더니 황제가 웃었다.
“부천호 유지란이 영전했다. 교주로 인해 생긴 일을 전부 그자가 도맡아 해 주었지.”
“잘되었습니다. 폐하.”
이름은 알지도 못했지만 악진혁이 산본의가를 공격하려 할 때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라 아진도 기억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영약을 구하러 가다니. 그러면 짐을 뭘 준비해야 하느냐. 며칠이나 걸릴 것 같으냐.”
황제의 행차에 그를 호위하는 병력만 해도 그 규모가 작지 않을 터였지만 어차피 영약이 난다는 섬까지는 배로도 가지 못한다고 하니 그곳부터는 함께 갈 수도 없었다.
황제는 미련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감투를 싫어한다는 것은 안다만 이번에는 네가 경호대장을 맡도록 하라.”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폐하의 안위를 책임질 것입니다.”
“그럴 거라는 것은 알고 있다.”
황제는 더 긴 말은 필요 없다는 듯이 말했고 아진도 산본의가에 가서 준비할 것이 있어 우선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오랫동안 미뤄두고 있던 채집행에 이제야말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벌써 기운이 나는 듯했다.
* * *
함께 출발하기 위해 황제가 미복 잠행을 해서 산본의가로 왔을 때 아진은 꽤 당황했다.
며칠 후에 자기가 황궁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황제가 얘기되었던 것과 다르게 그곳에 벌써 나타나 버린 것이다.
황제는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지만 아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천마의가 남자라고 둘러댄 것도 들킬 위기였고 벽예월을 황제의 앞에 내보이는 것도 걱정이었다.
설상가상 아진은 황제가 도착하는 시간에 그곳에 있지도 않았다.
절강성에서 그 섬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자세한 얘기를 들으려고 혈천방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황상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아진이 기겁하고 부리나케 산본의가로 돌아갔을 때 황상은 벽예월과 역천마의에게서 뭔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화, 황상…… 폐하…….”
아진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부르자 황제가 그를 보며 웃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저 건방진 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많이 화가 나지는 않은 것 같았고 그 주위에 북리의천과 소청, 그리고 가주의 가족도 함께 있으며 황상과 함께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여…… 여기에는 어찌…… 기다리고 계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짐이 직접 왔으니 진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폐하. 그것은…… 그게 사실은…….”
“그래. 어디. 말이나 들어 보자.”
“그건…… 폐하에 대한 소문이 워낙 좋지 않아서…….”
아진이 고개를 푹 숙이고도 할 말은 다 해 버리자 황제가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이게 다 짐의 부덕의 소치이니라.”
“송구합니다. 폐하.”
말을 할수록 점점 더 난감해지기만 했다.
대놓고 속인 건데 그걸 딱 들킨 거라서.
황제도 아진이 왜 그랬는지를 알고 있기에 마냥 괜찮다고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황제가 아진을 불렀다.
황제가 산본의가에 오고 나서 둘이서만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인 듯했다.
“서이린이 음양인이라…….”
황제의 입에서 그 말까지 나오자 아진은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아무리 자기를 총애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속였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까지의 믿음과 총애를 한순간에 거둬 버리고 큰 벌을 내린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린린까지 들켜 버린 건지 모르겠는데 도종이 사실을 말해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아진은 어째야 하나 하다가 결국 한숨을 크게 쉬고 황제에게 사죄했다.
“폐하.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겁이 났습니다.”
“무엇이 말이냐.”
“…….”
그 말까지는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더니 황제가 먼저 물었다.
“내가 후궁으로 삼으려고 할까 봐 그런 것이냐.”
“…….”
“그게 맞는 모양이구나.”
황제에게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아진은 할 말이 없어져 연거푸 죄송하다고 했는데 황제에게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화가 나서 그런 것은 아닌 듯하고 무언가 말을 하려고 결단을 내리는 중인 것 같았다.
아진은 그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황제를 힐끔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믿도록 행동하고 말을 했으니 탓할 수도 없지. 너에게는 한 번 정도 사실대로 말을 해 두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무엇을…… 말씀하심인지…….”
아진이 묻자 황제가 그를 보며 웃었다.
“아진아. 나는 지금껏 이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 일은 네가 나에게 사죄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면 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것이 당연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진은 황제가 하려는 말을 이해해 보려 애썼지만 어려웠다.
“사실 나는 황후를 좋아하지 않았다. 끔찍할 정도로 싫어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할 힘이 전혀 없었다. 내가 황태자였을 때 황태자비로 책봉된 사람이었지. 정말……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황제는 아직도 치가 떨린다는 듯이 말했다.
아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에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너도 이제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황실 안에서 부부라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관계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 정적이라고 할 수 있지. 손대기 어려운 까다로운 정적.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을 찾기로 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탐하는 것은 황제에게 부끄러운 일도 아니니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아진은 겉으로 보인 것과 실제로 일어난 일은 차이가 크다는 것을 생각하며 말했다.
“후궁들은 희생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니 말이다. 그들의 가문은 좋아했지만 그들은 외로웠겠지. 그래도 몇 번은 찾아갔다.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고 말이다.”
“그러면…… 여자들을 탐한다는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는 말씀인지요. 폐하.”
“그래. 그것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고 일부러 만들어 낸 헛소문이다.”
“전혀 몰랐습니다.”
“어떻게 알겠느냐.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가지고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말이다. 너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전에는 다른 이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너에게는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폐하.”
그것은 아진의 진심이었다.
그는 주군이고 아진은 그의 신하일 뿐이었는데 자신에 대해 편견을 갖는 것이 싫어서 사실을 토로하고 있어서였다.
“나는 네가 무슨 마음으로 거짓을 고했는지 이해한다. 그들을 걱정한 마음도 알겠고 말이다. 그저 내가 허랑방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네가 알아줬으면 하는구나.”
“예. 폐하.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전에도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문제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진은 말을 해 놓고 지금 실수한 게 아닌가 해서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할 말은 다 하면서 눈치를 살핀다는 게 참 가소롭다는 생각은 안 하느냐. 아진아.”
“왜 아니겠습니까. 저도 염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을 해서 속이 후련한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진이 한 말이 기가 막혀서 그런 것 같았다.
“역천마의가 남자라고? 실험을 하다가 사고가 나?”
아진은 점점 고개를 깊이 숙였다.
끝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로 아진은 두고두고 그 일로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자기가 지은 죄가 워낙 커서 할 말이 없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더 그 일로 고생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폐하. 그곳에 대한 정보를 모두 모아 왔습니다.”
아진은 뭐든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혈천방에게서 알아온 것을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재미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들이 혈천방이었지?”
“예. 폐하.”
“그자들도 한번 보고 싶구나.”
“……예?”
황제가 산본의가에 온 것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정말 혈천방에도 가 줄 수 있는 건가 해서 아진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폐하. 정말입니까? 폐하께서 만나 주신다고 하면 정말 감격스러워 할 것입니다.”
“다행이구나. 그러면 미룰 것이 없을 듯하다. 나는 여기에서 작은 잔치를 열고 그동안 네가 신세를 졌던 사람들을 전부 불러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네 형의 혼례에 나도 참석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지를 않았느냐.”
“폐하. 그게 정말이라면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약을 구하러 가기로 했지만 잔치만큼은 미루고 싶지 않았다.
황제를 알현할 수 있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광일지 알고 있어서였다.
혈천방과 비룡채 사람들이 황제를 알현하고 지을 표정을 생각하자 아진은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면 지금 당장 그 이야기를 전하고 오겠습니다. 폐하.”
“그래. 그리 하여라. 나는 여기에 있을 테니 린린과 선이남을 보내도록 하고.”
“예. 폐하.”
아진은 신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다른 것도 다른 것이지만 지금부터 린린이 황제의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 못 하고 찌그러져 있을 생각을 하자 너무 신이 났던 것이다.
밖으로 나가면서 아진은 린린을 찾았고 린린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폐하께서…… 아셨다고? 내가 거짓말을 한걸?”
“아마 도종 형님이 말한 게 아닐까 하는데 어쨌건 이남 형님을 찾아서 빨리 들어가 봐. 폐하께서는 화가 풀리셨어. 그래도 사죄는 확실하게 해야 할 거다.”
“큰일 났네. 알았어.”
아진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가 잔치를 열어달라고 말했고 두 사람은 부담스러워하기보다 그 일을 큰 영광으로 여기는 듯했다.
“성주나 다른 사람들도 더 초대하는 것이 좋겠느냐. 아진아?”
가모가 물었지만 가주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황상께서 아진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시려고 잔치를 열라고 하신 것 같소.”
그러자 가모도 흔쾌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잔치 준비도 그리 어렵지 않겠군요. 세상에. 폐하께서 본가에 오시고 내가 폐하를 위해서 잔치를 열다니. 상공. 상공은 이 일이 믿기세요?”
가모의 말에 가주도 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도 미미한 열기가 퍼져가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북리의천과 제선문주도 다가왔다.
아무래도 황상이 와 있다는 생각에 자꾸 신경이 쓰여서 평소처럼 가만히 자기들이 할 일을 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들도 황제가 잔치를 열라고 말했다는 것을 듣고 덩달아 바빠졌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나서서 일을 준비하는 것을 보며 아진은 당장 비룡채와 혈천방을 돌며 소식을 전했다.
송효원은 그 자리에서 실제로 쓰러졌다.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그대로 실신을 해 버린 것이다.
황제의 존재는 그런 것이구나 하면서 아진은 사람들을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