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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04화 (204/470)

제204화

204화

사도련주는 처음부터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때까지 버텨 올 수 있었던 것은 충독이라는 변이 때문이었는데 아진이 가져온 고독이 충독의 벌레들을 손쉽게 죽이면서 사도련주의 평정심이 흔들렸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사도련주의 충독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며 스스로 무너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그가 그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하나둘, 대제들이 쓰러졌다.

사도련주는 그들이 버티는 동안 자기가 도망칠 수 있을지 생각하려 했지만 북리의천과 아진 두 사람이 다른 곳의 상황은 도외시하고 처음부터 그만을 노리자 점점 지쳐갔다.

대제들이 먼저 싸움을 끝내고 이쪽으로 와서 도와주기를 바랐지만 이번에는 대제들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고독은 추살접과 마찬가지로 조련되었고 추살접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래 굶주리다가 충독의 벌레만 조금씩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고독을 조련하는 역천마의의 방식이었고 그 결과 놈들은 충독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을 보여서 일단 충독이 감지되기만 하면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아진이 해야 할 일은 고독을 풀어 주는 게 전부였다.

고독들은 대제들을 향해 느리지만 끈질기고 집요하게 다가갔고 마침내 대제들의 몸에 달라붙은 후에는 코나 입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대제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격전 중이라 안으로 들어간 것을 뱉어낼 겨를이 없었고 그러는 동안 고독은 몸 안으로 들어가 충독을 공격했다.

충독은 제 공간에 들어온 고독의 공격에 무방비로 당했다.

고고한 독재자가 기습을 당한 데다 단순한 공격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몸이 먹히다 보니 그때부터는 미친 듯이 날뛰어댔다.

대제의 몸 안에 들어 있던 충독이 그렇게 되면 숙주인 대제가 어떨 거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독으로 인해 싸움의 양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누구도 싸움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아진의 일행은 승리를 점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패배와 좌절의 기억 때문에 아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음을 놓지 않았다.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그랬다.

게다가 북리의천은 아진보다 몇 배나 더 그랬기에 아무도 그들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한 사람, 두 사람.

대제를 쓰러뜨린 이들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소청은 자기도 나서서 두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린린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되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린린은 고개를 젓고 소청의 손을 잡았다.

지금 아진과 북리의천을 도우려면 그들이 다른 것을 걱정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힘으로 사도련주를 해치울 수 있게 해 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진은 더 이상 사도련주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리의천은 넉넉히 아진의 빈자리를 채웠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아진이 사도련주를 북리의천에게 양보한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리의천의 손에서 그가 익혔던 모든 무공의 궁극들이 펼쳐졌다.

사도련주 역시 고독의 기습을 받아 고통을 겪고 있었다.

고독에게 몸을 뜯긴 충독이 안에서부터 사도련주의 몸을 물어뜯고 나오려 하면서 사도련주는 상상하지 못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계속 사도련주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 북리의천의 증오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북리의천은 짧게 호흡을 고르고 검기의 폭풍을 날렸다.

수십, 수백 개의 검영이 허공에 아로새겨졌는데 그 모든 것이 실초였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나왔고 몇몇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사도련주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수많은 검영은 살을 베어냈을 뿐 사도련주의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인 채 할 말을 삼켰다.

처음에는 북리의천이 실수를 해서 그런 것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 그의 진짜 의도였다는 것을 깨닫고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사, 살려 줘…… 아니. 죽여 줘. 제발 부탁이니 죽여 줘. 이대로 나를 죽여 줘. 제발……!”

사도련주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다.

북리의천은 사도련주를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무릎으로 목을 누르고 주먹으로 곤죽을 만들었다.

북리의천의 어깨가 계속해서 들썩거렸다.

지쳐서 그런 게 아니라 울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한참이 지나고야 깨달았다.

사도련주는 이제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반응도 보이지 않고 북리의천의 주먹이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무생물처럼 흔들릴 뿐이었다.

슬그머니 흑주가 다가가 북리의천의 눈앞으로 지나갔다.

‘나 여기에 있는데 혹시 지금 내가 필요하면 불러도 돼요.’

그 정도의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는데 뜻밖에도 그게 통한 듯했다.

북리의천은 그제야 심연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멈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흑주가 힘이 들었겠구나. 산본에까지 다녀오느라고. 그래. 이놈은 네가 처리하거라. 흑주야.”

그러자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흑주가 사도련주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평소에는 진기를 흡수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았는데 그때는 그러는 것이 희한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우연히 린린과 눈이 마주친 아진은 흑주가 왜 그런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린린이 위험했을 때, 지금의 흑주가 아닌 이전의 흑주가 남궁진에게서 린린을 구하려 했을 때 그때도 흑주는 이런 식으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흑주가 스승님을 구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진은 그때의 일을 들려주자 북리의천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나는 흑주에게도 이렇게 과분한 마음을 받는 사람인데 함부로 낙심하면 안 되지. 미안하구나. 흑주야. 그리고 고맙다.”

흑주는 잠시 움찔하는 것 같더니 사도련주의 진기를 완전히 빨아들였다.

사람들은 사도련주의 몸에서 생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먼지를 쌓아 올린 것 같은 목내이(木乃伊) 하나만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것을 보며 색다른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복부는 푹 꺼져 있었는데 안에서 충독을 먹어오던 고독은 갑자기 주위가 황량해진 것이 이상한 듯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충독에게 파고들었다.

고독과 흑주의 기이한 식사였다.

* * *

북리의천과 아진 일행이 사도련주를 죽이고 사도련을 괴멸했다는 소식은 널리 퍼져나갔다.

북리의천은 그 일의 일등공신이 역천마의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했지만 역천마의는 그것을 끝끝내 거부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 그녀가 누리고 있는 산본의가에서의 평화로운 삶은 포기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교주가 그녀를 찾으러 오지 않는 것은 역천마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서일 텐데 북리의천이 역천마의에게 공을 돌린다고 소문을 내면 교주가 사람들을 보낼 것 같았다.

추살접 때문에 이미 그들과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알아차렸을지 모르지만 일부러 공언까지 해 가며 소문을 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북리의천은 역천마의의 뜻을 받아들였고 당분간 그 일은 모두에게 비밀로 하는 것으로 했다.

사도련 토벌에 공로가 컸던 고독도 금의환향했고 낭왕은 직접 산본의가로 찾아와 북리의천과 아진을 치하했다.

낭왕은 그 자리에서 마도들에 대한 것을 논의하려 했지만 북리의천은 역천마의의 생각을 바탕으로 아직 그 문제를 공론화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고 낭왕도 그 뜻을 받아들였다.

“검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겠군. 제자도 이런데 사손까지 이러니.”

구체적인 표현 대신 ‘이렇다’라고 말하는 낭왕을 보면서 북리의천이 웃었다.

그 말이 더 와닿았던 것이다.

“아진아. 네 스승에게 배울 건 이제 거의 다 배운 것 같은데 이제 새로운 스승에게 새로운 걸 배워 볼 생각은 없느냐.”

낭왕의 말을 들으면서 아진은 독고소영이 떠올랐다.

북리의천도 그 말이 독고소영이 하던 말이라는 것을 생각한 것 같았는데 그의 얼굴에 지어지는 웃음에 여유가 보였다.

“그러고 보면 내가 자네에게 못 할 짓을 한 것 같아. 그동안 왜 그렇게 모질게 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나라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 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모진 일인 것 같아. 그동안 내가 버티고 있어서 자네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네.”

북리의천이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자 낭왕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진아. 다른 놈이 저런 소리를 하면 대꾸를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비웃어 주면 되는데 네 스승이 저러면 할 말이 없구나.”

“저도 제 스승님이 잘못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사숙님.”

“누가 사숙이냐. 이놈아. 사백이라고 부르래도.”

“누가 사백이야? 사숙이지.”

북리의천이 말하는 동안 그에게 말하던 독고소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이제는 아진도 아픔 없이 웃을 수 있었다.

‘사고님. 보고 계십니까? 저희는 견뎌 내고 있습니다. 좋은 곳에서 편히 계세요. 다시 뵈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전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신. 정의맹에는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는 건가.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 내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이 종종 드는군. 자네는 그런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모를 것 같기는 하네만.”

“정의맹에 일이 생기면 자네를 돕겠네. 그렇지만 지금은 이곳에 있는 것이 좋군.”

“알았네.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자격이 충분히 있지.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네.”

하룻밤이라도 머물다 가라는 북리의천의 말에도 낭왕은 가 봐야 한다면서 고집을 부리고 일어섰다.

그를 배웅하기 위해 산본의가의 사람들이 나오자 낭왕은 다시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는 듯했다.

“자네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다 가진 건지 알 수가 없군. 다음에는 꼭 내가 자네로 태어날 거네.”

“그러게. 나는 아진이로 태어날 거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진이만큼 편한 녀석이 없단 말이지. 나 같은 스승을 둔 걸 보게.”

“이렇게 웃는 걸 보니 좋군. 수고했네. 검신. 자네와 아진이 아니었으면 누구도 사도련을 괴멸시키지 못했을 거야.”

“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일이지. 그들을 기억해 주게.”

마침내 낭왕이 길을 나섰고 북리의천은 그 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 * *

아진은 황궁에 가서 황제에게 사도련의 토벌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동안은 사도련의 토벌이라는 중차대한 과제가 있어서 아진을 곁에 두려는 마음을 황제가 스스로 포기한 것 같았지만 일단 사도련의 일이 끝나고 난 후에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진이 그런 이유로 황궁에 가는 일을 미루고 있을 때 황실에서 사람이 왔다.

당장 입궁해서 황상을 알현하라는 거였다.

아진은 언제나 황제가 자기 머리 위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별수 없이 그를 찾아갔다.

입궁까지는 무사히 했는데 그 이후의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분명히 입궁해서 황제를 알현하라는 명을 받고 온 건데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황제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혹시 황상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 걱정하고 있는데 그때 아주 낯익은 사람이 지나가다가 아진을 발견하고 불렀다.

“아진아. 네가 여기에는 웬일이냐?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

선이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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