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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03화 (203/470)

제203화

203화

태어난 후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압도적인 두려움과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적들을 보며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를 노리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다.

도망치려고 돌아서 봐야 한 발을 제대로 떼기도 전에 붙잡힐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 너무 끔찍해서.

너무 무서워서.

무서워서 죽어 버릴 것만 같아서.

그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섬전처럼 다가온 녀석이 제 몸을 들어 옆으로 돌려놓고 주먹을 휘둘렀다.

목소리는 분명 아진이었는데.

‘이건 뭐냐……?’

자색 안개가 그의 뒤에 펼쳐진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 하다가 그것이 한창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추살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진아! 정말 아진이냐?”

“네. 저같이 생긴 놈이 또 있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걸 보면 정말 아진이 맞는 것 같았다.

남이천은 정신을 차리고 아진에게 빠르게 말을 해댔다.

“아진아. 안에……! 안에 사람들이 더 있어. 수백 명이야. 그 사람들에게 지금 벌레를 이식하고 있는 것 같아. 안에 사도련주가 있어. 같이 있는 놈들이 대제라는 놈들인 것 같아.”

마차에서 내려 달려오는 사람들.

말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사람들이 모두 남이천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오라버니. 대단한데요? 혼자서 싸우고 있던 거였어요?”

린린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싸우기는? 맞고 있었다. 아진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야.”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비로소 긴장이 풀렸고 린린의 말을 듣자 남이천도 겨우 웃음이 나왔다.

“아닐걸요? 우리 산본의가 사람들은 잘 버텨요. 그리고 그렇게 조금만 버텨 주면 우리가 도착해서 살려 주잖아요.”

아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침을 날렸는데 그게 하나도 안 꽂혔어. 그런데 너는 어떻게 이 자들을 다 쓰러뜨린 거야?”

남이천이 묻자 아진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 형님 너무 하시네. 형님. 한 우물 판 사람이랑 의술이랑 무술을 병행한 사람이랑 같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너도 병행했잖아. 나도 열심히 했는데.”

그걸 따지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너무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자기가 구하지 못한 생명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사이에 아진은 뇌수를 쏟은 채 쓰러진 아이에게 다가가서 살리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일어섰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형님 침이 들어가는 정상적인 인간들만 돌아다니게 할게요.”

아진이 그렇게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길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야말로 쉽게 할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을 남이천도 깨달았다.

그리고 아진이라면 그냥 틱 내뱉은 것 같은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린린도 검을 뽑아 들고 아진을 따라 달려갔고 그 뒤에 섬전대의 일행이 덩그러니 남았다.

“대주.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여기에서 뭘 해야 하는 겁니까?”

대원들이 묻자 대주도 난감한 기색을 했다.

비고의 경비 무사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벌써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벌써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안에서는 이미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을 듯했다.

교주가 왜 자기들을 보냈는지는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졌다.

저곳에 있는 사람들이 사도련주와 싸우는 동안 뒤를 치라는 것이다.

명령의 이해도 잘 했는데 왜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섬전대주는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처음부터 계속 대주를 보고 있었다.

명령만 내린다면 그 말을 따를…….

아니. 그건 아니었다.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명령을 어서 그 입으로 내리라고 섭혼술을 시도하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주님.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대주님은 두 분 중 누구를 마음속의 주군으로 인정하십니까? 대주님 마음속에서는 누가 교주님입니까? 누가 대주님의 천마입니까?”

대원 중 하나가 말하자 대주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인마! 나비 쫓아온 사람들을 돕는다! 나는 그렇게 할 거라는 거지 너희도 그러라는 건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은 내키는 대로 해.”

“예. 대주님. 저희도 그쪽이 내킵니다.”

오랜 고민이 끝나자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도망치시오. 아직 공격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쪽으로 빠져나오시오! 저자들은 사도련이오. 사도련은 나라에서 토벌하려는 곳이고 저자들이 충독의 벌레로 당신들을 조종하려고 하는 것이오. 어서 이쪽으로 도망치시오. 여기에 있다가는 전부 죽게 될 거요!”

안이 엉망진창인 것을 보고 섬전대원들은 목을 놓아 소리쳤다.

안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에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은 사람 중 몇 명이 그 말을 알아듣고 문이 있는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그 뒤를 대제들이 따라오며 뒤에서 검을 휘둘렀는데 그것이 다시 아진 일행에게 가로막혔다.

“이쪽이오. 어서 나오시오. 최대한 멀리 도망치시오!”

섬전대원들은 사람들을 잡아 문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공짜 치료를 받아 보겠다고 왔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두려움에 벌벌 떨며 눈물을 쏟아내고 비명을 지르면서였다.

섬전대주와 대원들이 뭘 알고 그 일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충독의 벌레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넣어서 조종할 사람이 없으면 그건 당장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도련을 향해 마구 검을 휘두르던 아진이 갑자기 남이천을 보았을 때 남이천은 깜짝 놀라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을 겪은 후에 이제 그는 아무 일에나 놀랐다.

“형님. 경공은 여전히 빠르죠?”

아진의 말에 남이천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면서도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공은 내가 너보다 더 잘했다.”

“실력이 녹슨 건 아니죠?”

“잘하는 걸 왜 녹슬게 하겠어?”

“지금 당장 산본의가에 가세요. 고독을 가져오셔야 해요. 벽 소저 아시죠? 벽예월 소저. 벽예월 소저에게 달라고 하세요. 사도련이 나타났다고 하시면 될 거예요.”

“그래. 나만 믿어라. 아진아.”

“흑주. 형님을 따라가. 형님이 경공은 빠른데 내공은 많이 부족할 거야. 고독이 시간 안에 도착하지 않으면 여기도 위험해지니까 네가 책임지고 형님을 산본까지 다녀오게 해야 해.”

아진이 흑주에게 소리치자 흑주가 맹렬히 달려와 남이천의 옆에 떠 있었다.

남이천은 뭘 해야 하는 건가 하다가 흑주를 품에 넣고 무서운 속도로 경공을 전개해 나갔다.

흑주에 대한 얘기는 남이천도 알고 있었지만 직접 흑주를 만져 본 것은 처음이었다.

흑주가 원래 남의 손을 잘 타지 않고 처음에 있었던 흑주는 다른 사람이 손을 대려고 하면 뇌기까지 일으켰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 녀석은 얌전했다.

사람들은 잠시 남이천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 남이천의 모습을 봤던 이들은 그를 그냥 산본의가 의학당 출신의 평범한 의원이라고만 생각했기에 그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경공을 펼쳐 사라지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경공은 아진보다 잘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은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공 하나만 잘해도 무림의 역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날릴 수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남이천이라면 그런 식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도중에 멈춰서 전서구를 먼저 날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자기가 가는 게 더 빠를 거라고 마음을 굳힌 남이천은 계속 경공을 펼쳤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산본의가에 이르렀다.

“벽 소저를. 벽 소저를 불러 주시오. 사도련 놈들이 나타났는데 아진이가 고독을 가져오라 했습니다.”

남이천은 산본의가에서 처음 만난 무인을 붙잡고 말했다.

그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벽예월과 역천마의가 고독을 가져다주었다.

“이 몸으로 그곳까지 다시 가는 건 무리인 것 같은데 거기가 어디인지 말해 주면 우리가 가겠소.”

그러나 무인의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남이천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이대로는 내공이 부족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남이천은 죽더라도 고독을 아진에게 넘기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내공이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런 기분이 들 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는데 어느덧 격전이 벌어지는 곳에 도착했다.

‘……?!’

그리고 아진을 만나 고독을 전해 주고 나자 그때부터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나. 설마! 나도 모르는 내공 고수였던 거 아니야? 지금까지 쉬지도 않고 왔는데 어떻게 내공이 넘쳐날 수가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천마신교 출신의 무인들이 그를 자꾸만 힐끔거렸다.

남이천의 등에 붙어 있는 게 뭔지 궁금해서였다.

“수고했어. 흑주. 이제 밥 먹어.”

린린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던 남이천은 등에서 뭔가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설마. 지금까지 저 녀석이 내공을 불어넣어 준 거라고?’

고맙기는 했지만 왠지 좋다 말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기 스스로 한 건 줄 알고 좋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진은 고독을 받으면서 고맙다거나 수고했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싸움은 백중세였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벌레가 주입된 사람이 많아서 그렇게 된 듯했는데 그래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상대해 나가는 중이었다.

사도련주는 백리의천과 아진이 같이 맡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이번에야말로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열의가 가득해 보였다.

“죽으려고 용을 쓰는 게로구나. 맹주. 혼자서 죽는 것은 영 재미가 없던가? 그러게 네 마누라가 죽을 때 따라서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사도련주는 북리의천을 자극하려 했지만 북리의천의 표정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린린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이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더 빠르게 움직이며 대제들을 베어나 갔다.

대제들은 충독으로 절대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아직 그들보다 무위의 경지가 낮은 사람들이 끝까지 버텨 내며 그들을 막아 냈다.

죽음을 각오한 절정과 초절정의 검객들은 절대의 경지에 이른 대제들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을 상대로 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진은 그들을 한 번 보고 다시 사도련주를 마주했다.

아진의 검에서 붉은 검광이 허공을 향해 쏘아졌다.

남이천은 이제 자기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내공이 거의 다 소진됐다는 것이 그때는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진이 자기에게 그 일을 맡긴 걸까 했는데 그게 맞다고 해도 서운하기보다 고마울 것 같았다.

아진은 사도련주를 향해 끝도 없이 검강을 퍼부었다.

지난번에 소청과 함께했던 수법은 포기하고 이번에는 정면승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도련주는 그냥 사도련주일 뿐이었다.

그동안 그가 저질러 온 일들을 생각하면서 너무 큰 두려움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도련주를 높이 세워놓은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이번에도 너를 죽일 수 없으면 다음에 너를 찾아내서 죽일 거고 다음에도 놓치면 그다음에 찾아내 죽일 거다. 네가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그때 너를 찾아갈 거다. 네가 편안해할 때 네 목에 검을 꽂아 넣을 거다.”

아진은 음산하게 말했다.

북리의천 역시 아진의 곁에서 가공할 만한 압박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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