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202화
선이남이 희한한 암기술을 한다는 걸 알고는 그때부터 틈만 나면 선이남을 찾아가 그걸 가르쳐 달라고 졸랐고, 제선문이 옆으로 와서 무료 진료를 한다고 해서 환자가 뚝 끊겼을 때는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하며 선이남이 있는 황도로 올라가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전수를 받았다.
선이남은 바쁜 시간을 쪼개 남이천에게 자기가 아는 것들을 가르쳐 주었고 어려서부터 영약까지 먹어 가며 내공을 탄탄하게 다진 남이천은 선이남을 단숨에 뛰어넘어 버렸다.
자기에게 배운 제자가 자기를 뛰어넘는 걸 보고도 마냥 좋다며 허허 웃는 선이남을 보면서 누가 산본의가 사람 아니랄까 봐 그러냐고 했었는데, 남이천은 어쩌면 오늘 그때 배운 암기술을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재미있겠다는 듯이 말을 했지만 제선문에서 좋지 않은 일이 시작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 * *
사람들은 서로 밀치며 제선문 의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춘석이 말한 대로 정말 황궁에서 나온 것 같은 의원들이 있었다.
그들에 대해 아무 말도 듣지 않고 그런 말을 들었으면 다르게 생각을 했을 텐데 춘석에게 들은 게 있어서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치료가 끝난 분들은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치료가 끝났다고 해도 그동안 약해진 몸에 기운을 북돋워야 하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좋은 약재를 끓여 달인 약을 줄 것입니다.”
“아이고. 황상 폐하께서 우리같이 미천한 것들을 위해서 황궁 의원들을 내려보내 주시고. 어찌 이런 일이 다 있을까?”
사람들은 감격에 겨운 얼굴을 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몸이 불편해서 제대로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던 사람들에게서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허리가 구부러졌던 이들이 꼿꼿하게 세우고 걸어가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사람마다 의방을 나가 다른 이들을 데려오며 의방이 환자들로 넘쳐났다.
“이리로 오시면 됩니다. 오늘 오신 분들은 마지막 한 분까지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열다섯 살이나 되었을 법한 여자가 사람들을 방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귀여운 얼굴로 활짝 웃자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경계가 풀렸다.
그때까지 경계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일단은 그랬다.
열린 문으로 마흔 명 정도의 환자들이 줄을 지어 들어갔다.
“이리 와서 누우세요. 옆에 다른 분들이 더 누우셔야 하니 틈이 없이 바짝 붙어서 눕도록 하세요.”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소녀가 시키는 대로 바닥에 누웠다.
탕약을 준다는 줄 알고 들어왔는데 왜 누우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서 누워서 기다리라는 건가 보다 하고 자기들끼리 말을 하며 몇 사람은 눕고 몇 사람은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고 해서 잘못될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상냥하던 소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누우라고 했잖아요. 누우라고. 귓구멍에 뭘 박아 넣은 거예요?”
소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는 사람들 틈을 지나다니며 앉아 있던 이들의 가슴팍을 발로 차서 억지로 눕게 했다.
“악!”
누군가 비명을 지르자 소녀가 귀여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말했다.
“한 번 더 소리 내면 죽일 거예요.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면 다시 한번 소리를 내봐요.”
그러고 사람들을 노려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운이 좋았다며 몸이 전혀 아프지 않다고 떠들어 대던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여러분에게 좋은 걸 해 드리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협조를 안 하면 어렵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화나게 하지 말고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어요. 그러면 화를 내지 않을 거예요.”
소녀의 손에 어느 틈에 비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겁을 먹고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여러분은 아주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해요. 원래 이런 건 여러분 같은 하찮은 것들에게 쓰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련주님이 특별히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한 거예요. 여러분은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힘을 얻게 될 거예요. 몇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힘이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을 거예요.”
소녀는 들고 있던 비수로 한 사람의 옆구리부터 길게 갈랐다.
“아아아악!!”
쉽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고통을 떠나서 그 상황이 너무 이상하고 두려워서 그 일을 당한 사람은 겁에 질렸다.
소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항아리에서 벌레를 꺼냈다.
소녀가 내내 들고 있던 항아리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했던 사람들은 그게 뭔지 마침내 알게 됐지만 두려움에 잠식돼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비수에 찔린 사람이 계속 비명을 질렀지만 밖에서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들렸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녀가 기막을 두른 탓이었다.
“조용히 하라니까 말을 참 안 듣네. 어차피 얼마 안 가기는 하겠지만.”
사람들은 하나둘 소녀의 희생양이 되었고 항아리에 있던 벌레는 모두 그곳에 누워 있던 사람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에서 혈광이 폭사되고 있었지만 이지를 잃은 그들은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갔을 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하며 그들을 불렀다.
“저거…… 피 아니야?”
옆구리에서 흐른 붉은 자국을 보고 몇몇 사람들이 말했지만 피를 그만큼 흘리고도 아픈 내색도 없이 걷는 것이 이상해서 설마 피겠냐 의심했다.
눈이 단체로 붉어졌지만 눈이 충혈되는 것이야 대단한 일은 아니기에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모두가 말없이 지나가 버리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왜들 저러지?”
“약효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그런 것 아닐까?”
“탕약도 아주 좋은 걸 주는 모양이네. 나도 그런 얘기 들은 적 있어. 영약을 먹을 때는 입을 벌리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영약 같은 것을 준 모양인데?”
“아아. 그래서 눈이 저런가 보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좋을 대로 생각을 하며 떠들어 댔다.
무료 진료를 하면서 영약을 선뜻 준다는 사람이 있다면 백이면 백 사기꾼일 텐데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인생에 기적이 찾아왔는데 그것이 악마가 내민 손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조용히 사람들 틈에 끼어 동향을 살피던 남이천은 수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지 살피다가 방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의원이라는 자들에게서 사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허리에 웬 핏자국이지? 그것도 하나같이 전부? 거기다 눈이 붉어?’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그들이 이지를 잃은 듯 멍하니 걷고 있어서였다.
옆구리가 피에 젖어 있었지만 그것을 사도련의 충독과 연결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들 중에는 남이천이 아는 사람도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져 어깨가 부러진 환자였는데 그때 바로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하다가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팔을 절반도 들어 올리지 못했다.
그래도 남이천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치료해 준 덕에 지금은 팔을 똑바로 들어 올려 귀 옆에 대는 것까지 가능해졌는데 치료 때문에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꼬박꼬박 봐 온 사이였다.
그러나 남이천의 곁을 지나가면서 그는 아는 척을 하지도 않았다.
일부러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곁을 지나갈 때 그 남자의 복부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충독의 벌레?’
그 생각은 갑작스럽게 떠올랐지만 일단 그 생각이 떠오른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제자리를 찾아갔다.
황궁 의원 행세를 하며 사람들을 고쳐 주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도 뒤늦게 깨달았다.
남이천은 가슴이 요란하게 뛰는 것을 숨기며 돌아섰다.
여기서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벌레를 이식받은 거야. 이 자들을 숙주로 삼아서 사람들을 공격하려고 가는 거야!’
남이천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방에서 나온 이들은 열을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약은 먹었어? 뭐가 들었어? 내일도 또 오래?”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남이천은 그들과 함께 의방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싸움에서 실전을 경험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진료가 끝나고 의방 문을 닫은 후에 매일 꾸준하게 수련을 하기는 했지만 수련은 수련일 뿐 생사투를 벌인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사형. 사람들을 죽일 때는 두 마음이 충돌하지 않아요? 우리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응. 그러니까 충돌하지 않지. 사람을 구하는 방법은 아주 많아. 가주님과 아진이가 그랬던 것처럼 전쟁을 막는 거야말로 정말 많은 사람을 구하는 방법이지. 그리고 사람들을 죽게 할 악한을 죽이는 것도 사람을 구하는 방법이야. 그럴 때가 오면 사제도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이게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걸.
선이남은 시원하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남이천은 정말 그럴까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남이천은 그때처럼 의문을 품지 않았다.
선이남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들의 학살은 시작됐다.
“아버지. 왜 거기에서 나오세요? 한참 찾았는데요. 시장에 데려가 주기로 하신 거 잊지 않으셨지요?”
어린아이가 한 남자에게 다가가며 말하자 그 남자가 주먹을 들고 아이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뇌수를 쏟으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남이천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침통을 꺼냈다.
어떤 상황인 건지 이제야말로 정확하게 그의 머릿속에서 이해가 됐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잖아.’
자책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그 생각을 뒤로했다.
언젠가 아진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형님. 미친 듯한 속도로 경주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경주예요. 형님이 가다가 개와 부딪혔고 개가 나가떨어졌다고 해 봐요. 그러면 형님은 더 이상 그 개에 대해서 생각하면 안 돼요. 개를 걱정하는 건 형님이 그 경주를 마친 뒤로 미뤄야 하는 거예요. 나쁜 놈들은 그걸 잘하는데 어정쩡하게 나쁜 놈들은 그걸 잘 못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나더러 어정쩡하게 나쁜 놈이라는 거냐?
-역시 이해가 빠르시니까 제가 한 말도 이해하실 수 있죠?
남이천은 그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미 저지른 실수에 계속 발목 잡히지 말자. 자책하는 건 일이 전부 끝난 다음에, 이 일을 바로잡은 후에 하자.’
남이천의 손에서 침이 날아갔다.
꾸준한 축기와 수련으로 그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틱.
티딕.
틱-.
침은 어느 것 하나 사람의 몸에 박히지 않은 채 떨어졌고 그때까지 다른 사람의 말에 반응하지 않던 이들이 일제히 남이천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짓쳐들어 남이천이 서 있는 곳으로 달려와 쇳덩어리 같은 묵직한 주먹을 휘둘렀다.
“뭐 하세요. 형님? 신수가 좋아 보이네요? 인기 폭발인데요?”
바람이 일고 그의 몸이 휙 들렸다.
그 순간에 분명 남이천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