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201화 (201/470)

제201화

201화

사유람은 환자가 없다고 아침 일찍부터 독주를 빈속에 연거푸 들이킨 것이 후회됐다.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빙글빙글 돌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에게서는 희한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림인?’

하월과 함께 오는 북궁세가의 무인들을 본 적도 있었고 그 전에는 제선문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남궁세가의 개 노릇도 했다.

그래서 무림인은 잘 알고 있었는데 정파 무림인들의 것과는 묘하게 기운이 달랐다.

‘뭐 하는 사람들이지?’

그래도 일단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인데 자기가 나가서 맞이하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유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원래 앉아 있을 때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일어서면 그때부터 취기가 확 번지기도 하는 법이었다.

사유람은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넘어졌다.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바닥이 자꾸만 그를 잡아당기며 그냥 붙어 있으라고 하는 듯했다.

“이 자가 정말 제선문주라는 자란 말이냐.”

“예. 련주님.”

“고작 이런 자가?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련주님. 이 자가 맞습니다. 북궁세가가 몰락하고 지원이 끊긴 후에 환자가 오지 않으면서 이런 꼴이 되었다고 합니다. 의방에 있던 의원들이 집기를 가지고 도망쳤다고 들었습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기다릴 시간이 없으니 정신을 차리게 해라.”

“예. 련주님.”

사유람은 주정(酒精)이 억지로 배출되는 것을 느꼈다.

남의 몸에 남아 있는 주정을 이런 식으로 억지로 배출할 수도 있는 것인가 하며 사유람은 곁에 있는 남자의 무위가 상당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에 사유람은 말짱한 정신으로 그들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있었다.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느냐.”

처음 보는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놓았다.

다른 이들에게 련주라고 불리던 이였다.

“사람들이라면…….”

“말한 대로다. 그냥 사람들이면 된다. 조건은 없다. 아무나 모아라.”

사유람은 눈만 끔뻑거렸다.

자기가 그런 일을 해 줘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앞에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지만 이미 북궁세가로 인해 시궁창에 처박힌 신세인데 그런 말에 아무렇게나 휘둘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사유람의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이 련주가 말을 이었다.

“공짜로 진료를 해 준다고 하면 금방들 오겠지. 환자들을 데리고 오면 반냥을 준다고 하여라.”

“반냥…… 이라면 은자 반냥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사유람은 조금 전까지 하던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련주에게 묻고 있었다.

련주는 사유람과 말을 섞는 것도 내키지 않는 듯했고 련주의 곁에 있던 젊은 남자가 하얀 자루를 바닥에 거칠게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

사유람은 주저하는 걸음으로 가서 안을 확인하고 그 안에 있는 돈을 보고 눈이 돌아갔다.

“환자 수에 맞춰 네놈에게도 반냥씩을 주겠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데려오겠습니다. 그런데 인원수에 정해진 선이라도 있는지요?”

“없다.”

“기한은요?”

“그것도 없다.”

사유람의 눈이 돌아갔다.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그는 그대로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련주와 대제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방을 하던 곳이라 장소는 상당히 넓고 실용적이었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왔으면 좋았겠습니다. 련주님. 역시 련주님의 생각은 아무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경내에 기둥을 박고 거적때기를 덮어 사람들이 그 아래에 머물 수 있게 해라. 좀 전에 나간 그놈이라면 족히 이백 명은 데리고 오지 않겠느냐.”

“오백 명도 넘을지 모릅니다. 사람을 데려오기만 하면 은자 반냥을 주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오백 명을 어떻게 모으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의방을 찾아온 환자들까지 합치면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대답을 하고 대제들은 련주의 말대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맨바닥에 누우면 냉기가 그대로 올라오겠지만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죽을 놈들인데 죽기 전에 몸에 냉기가 느껴진다고 뭘 어쩌겠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유람이 나가고 나서 하나둘, 의방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잘 찾아온 게 맞는 건지, 정말 여기에 오면 돈을 주는 건지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는 자들이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저…… 의원님이 여기로 가 있으라고 하셔서 왔는데요…….”

“그래.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

들어오는 품새를 보아하니 허리가 좋지 않은 듯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

“도끼질을 하다가 허리가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소름 끼치게 아프더니 그때부터 통증을 달고 살고 있습니다요. 의원님이 처방해 주는 약을 먹고도 낫지 않고 약값도 만만치 않아서 요새는 의방에도 오지 못하고 일도 못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의원님이 여기에 가 있으라고 하지 뭔가요?”

련주는 대제 중 붉은 경장을 입은 독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환자에게 턱짓을 했다.

“이리 와서 누워라.”

아무리 의원이라고 해도 환자에게 함부로 하대를 하지는 않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기세에 눌려 바닥에 누웠다.

독혈은 환자가 바닥에 눕는 걸 보고, 그러면 자기도 쭈그려 앉아야겠다고 생각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있던 치료용 침상을 끌고 왔다.

허공섭물이었다.

그걸 가져오는 게 귀찮아서 내공을 낭비하는 독혈을 보면서 대제들마다 혀를 찼지만 련주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춘석…… 이라 합니다.”

독혈은 고개를 끄덕이고 춘석에게 자리에 누우라고 명한 후 운기요상을 시작했다.

일반적인 치료법이 아니라 내공을 불어넣어 일시적으로 통증을 감소시킨 것인데 어차피 상대가 내공을 가진 자가 아니라 효과가 오래가지도 않을 것이고 근본적인 치료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을 끌어모을 만큼은 효과를 발휘할 터였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딱 그만큼의 효과였다.

“일어나서 걸어 보아라.”

“…….”

춘석은 추나술이라도 받을 줄 알았다가 그런 것도 없이 잠시 몸에 손만 대고 있다가 일어나 걸으라고 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기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주변 사람들의 기세가 너무 무서워서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러다가 조금 전까지 아주 익숙하게 느껴지던 통증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떠하냐.”

“……아프지 않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그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믿기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며 정말 안 아프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놔두지 않은 채 독혈이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뛰어가서 사람들을 모아 오너라. 명의가 왔다고 하고 무료로 진료해 준다고 말하거라. 네가 데려온 사람의 수에 맞춰 은자 한 냥씩을 주겠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면 제 치료비는…….”

춘석은 멍한 표정을 한 채 물었다.

“무료라고 하지 않았느냐. 다른 사람들은 무료로 봐 주면서 너에게만 돈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으냐.”

그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더니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보이고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나갔다.

불편하던 허리를 고쳐 준 것으로도 모자라 돈도 받지 않고, 게다가 사람들을 데려오면 은자 한 냥까지 주겠다니.

춘석은 지금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했다.

스무 명만 데리고 가도 일 년 내내 일해서 벌 돈을 전부 버는 것이었다.

그가 달려나가자 곳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기함하며 달려왔다.

“이보게, 춘석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허리가 아프다고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던 자네가 어떻게 뛰는 거야?”

“형님. 말도 마시오. 그리고 지금 당장 제선문 의방으로 가 보시오. 거기에 명의가 오셨소. 치료비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했소. 가서 내 이름을 대시오. 춘석이가 가 보라고 해서 왔다고 해야 하오. 아셨소?”

“제선문 의방? 거기가 아직도 무료로 치료를 해 준다고? 거기에 남아 있는 의원도 없을 텐데? 문주라는 작자만 혼자 남아서 매일 술만 퍼마신다고 하던데.”

그러나 춘석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형님. 형님. 어서 제선문 의방으로 가 보시오. 지금 당장 가시오. 거기에 엄청난 의원들이 와 있소.”

춘석은 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춘석이가 보내서 왔다는 말을 꼭 해야 진료비를 받지 않는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보내 놓고도 그 사람들 몫의 돈을 받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춘석은 어디로 가야 사람들을 모으기가 쉬울까 하다가 산본의가 의방으로 달려갔다.

아픈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 있을 곳이 그곳이라서였다.

그곳에 당도하자마자 그는 길게 늘어서 있는 사람들 틈으로 가서 그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여보시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제선문 의방으로 가시오. 거기에 지금 황궁 의원들이 오셨소. 황상께서 보내신 분들이오. 이 마을 사람들은 내가 원래 이렇게 걷지도 못했다는 것을 알 것이오. 그런데 내가 지금 뛰고 있지 않소? 진료비도 받지 않았다오. 내가 오는 동안 나를 본 사람들이 먼저 거기로 갔으니 오늘 안에 치료를 받으려면 당신들도 서두르시오.”

얘기를 다 마칠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이 이미 대열에서 이탈해 제선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황궁 의원이라는 말이 적중한 듯했다.

어디서 그런 거짓말이 술술 나왔는지 춘석 자신도 용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게 다 얼마야?’

춘석이 말을 하기 전에 제선문주도 이미 산본의가 의방을 다녀갔지만 그는 워낙 신망을 잃었던데다 황궁 의원이라는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고 그 자신이 아팠다가 낫지도 않아서 설득력이 떨어졌던 듯했다.

제선문주가 포기하고 떠난 곳에서 춘석은 엄청난 영업실적을 올렸고 춘석의 말을 들은 환자 중에는 서로 먼저 가려고 밀고 밀리면서 넘어지는 이까지 생겨났다.

밖에서 그런 소동이 일어나는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줄을 선 사람들을 문진하고 기록지를 작성하던 의생이 안으로 들어가 밖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 주자 그 전부터 낌새를 눈치채고 있던 의원 남이천이 일어섰다.

남이천은 산본의가 의학당에 다니면서도 아진을 쫓아다니며 무공 좀 가르쳐 달라고 할 정도로 무공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학사 집안의 촉망받는 공자였는데 의술을 배우고 싶다며 어느 날 갑자기 산본의가 의학당에 들어갔고 그다음에는 또 무공을 배우고 싶다며 아진을 따라다녀서 그의 부모는 늘 걱정을 멈출 줄을 몰랐다.

위에 있던 아들 넷이 전부 사고로 죽고 그마저 잘못될까 봐 어려서부터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걱정하며 행동을 조심시켰더니 막내아들은 그게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터져 버린 듯했다.

한 번 엇나가기 시작한 남이천은 그때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든 해 버렸고 덕분에 지금 그곳에서 무공 실력을 어느 정도 갖춘 의원으로 행세를 할 수 있었다.

“황궁 의원이 왔다고요? 황궁 의원이 올 거면 여기로도 공문이 왔을 텐데. 사기꾼인가 보네요. 마침 일도 일찍 끝나서 잘됐는데 우리도 구경이나 가 보죠.”

남이천은 그러면서 산본의가에서 받아 온 침통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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