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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00화 (200/470)

제200화

200화

“잊고 있었는데 상처받았어.”

린린이 그렇게 말을 해 봤자 누구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린린을 설득하기 위해 경비 무사들은 더욱 애를 썼다.

“저희는 짐승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기도 아니고 싸우는 기계도 아니고 말입니다. 생각할 기회를 주시는 게 어떨지 그냥 그것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여기에서 말하지 않았는데?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여기에서도 지극히 적어.”

“그러면 지존은 다른 곳에 계시고 지존은 지존의 제자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꼭 그렇게 복잡하게 해야 하는 거야?”

“예.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마음이 바뀌시면 일부러 신경을 긁으셔도 되고 말입니다.”

“좋아.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소청이 재미있겠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진과 북리의천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그 일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것은 린린의 무리가 알아서 하고 자기들은 추살접을 쫓아가는 게 낫다고 마음을 정한 것이다.

“소청아. 너는 거기에 있을 것이냐.”

북리의천이 인자하게 묻자 소청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사조님. 사손도 곧 따라가겠습니다.”

“그래. 너무 처지면 안 된다.”

“예. 사조님. 스승님.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소청의 말이 마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하늘에서 사람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들은 흉흉한 기세를 폭사했지만 정작 그들의 출현에 관심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곳에 있던 사람 중 대부분은 추살접을 쫓아가 버렸다.

잘못하다가 경비 무사들도 놓치는 게 아닌가 다급해진 섬전대주가 검을 들어 올리고 경비 무사들을 노려보았다.

“뇌혈검 사형이 어찌 이 자리에 있다는 말이오! 내가 사형을 믿었거늘 어찌 이리 사문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다는 것이오!”

섬전대주는 황의의 무복인에게 소리쳤다.

“대주. 다행히 지금은 때가 적당한 것 같군. 근처에 다른 사람도 없고.”

뇌혈검이 말하자 섬전대주는 웬 헛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에 계신 이분은 패월악 교주님의 제자이시다.”

“……!”

뇌혈검의 말에 섬전대주를 비롯한 마도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패월악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그들의 마음에 풍파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교…… 교주님의 제자라니…… 교주님이 생전에 제자를 두신 적이 없거늘 그게 무슨…… 그러면 교주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입니까…….”

다그치려 한 것 같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이거 안 좋아. 그냥 죽이자니까 그러네.”

린린은 연기를 하는 게 귀찮아진 듯 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 그들 주위에는 신교의 마도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마도가 아닌 사람은 소청뿐이었는데 소청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마공을 익혀온 아이라 딱히 그쪽에 거부감도 없었다.

그러기보다 오히려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말을 못 할 것도 없지. 내가 패월악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다시 태어나서까지 너희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다시 보게 된 거다. 나는 추살접을 따라가야 하고 사도련주를 죽여야 한다. 내가 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놈이 있으면 죽일 것이다. 질문?”

린린이 속사포처럼 말을 하자 섬전대 일행은 멍한 얼굴로 린린을 보았다.

얼굴도 완전히 다르고 목소리나 나이도 비슷한 게 없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똑같았다.

특별히 어떤 부분이 그렇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 중에 패월악과 직접 부딪힐 기회를 가졌던 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패월악의 생전에 교주에게 느꼈던 감정들이 전부 되살아났다.

린린은 그들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왜 사람들이 그래? 얘들을 죽이라고 명을 받고 온 거 아니야? 그러면 죽여야지 왜 고작 이런 말을 듣고 흔들리는 거야? 응? 그래도 되는 거야?”

린린의 입장에서는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들을 전부 포용하고 보듬는 것보다 그냥 썰어 버리고 가는 것이 훨씬 더 편했기에 이 상황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그렇게 눈물을 글썽거리지 말고 마음 단단하게 먹고 잘 생각해 봐. 정파 무림인들은 간악하고 나빠. 생각보다 더 그렇다고. 언제 말을 바꿀지도 모르고. 지금은 용서해 주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 자들이랑은 손을 잡지 마.”

린린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자 저들이 어지간히 귀찮은가 보다고 생각하며 경비 무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섬전대 무리는 그때부터 비상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여자라면 왠지 얼마든지 자기들을 쉽게 죽이고 정보도 조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형이 그렇게까지 말을 한다니 믿어 보겠습니다. 저보다는 사형이 더 잘 알 거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검을 집어넣는 섬전대주를 보며 린린은 뇌혈검을 노려보았다.

“뇌혈검이라고 했나?”

“예. 지존.”

이제 주위에 사람이 없다고 마음껏 지존이라고 불렀다.

“저자들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면 나는 그때마다 매번 너에게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쉽게 죽지도 못하게 길고 긴 고통을 느끼게 할 거야. 알았어?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을 때 저자들을 설득해라. 아니. 설득이 문제가 아니고 그냥 죽이자니까 그러네. 교주가 보낸 자들이잖아. 위험하다고.”

그 정도가 됐을 때는 섬전대원들도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

이 사람은 패월악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굳은 것이다.

무인이 되었다면 힘과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 강한 자를 주군으로 삼고 싶은 것은 본능이자 자연스러운 욕구였다.

단리서언이 교주인 이유는 그가 천마신교 내에서 가장 강한 자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패월악이 다시 나타났다면 더 이상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역시 어쩔 수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사형의 말을 믿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섬전대주는 같은 말을 반복했고 린린 역시 자신의 말을 반복했다.

“티끌 만한 허물만 발견이 돼도 뇌혈검, 네가 죽는다.”

“…….”

뇌혈검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기억은 미화된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더욱 그렇다.

그는 자기가 패월악에 대해 너무 많은 기억을 미화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맞아. 그런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뇌혈검은 정말 이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섬전대와 같이 갈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이 자리에서 죽이자.”

그들은 그냥 뇌혈검의 판박이였다.

섬전대주는 검을 검집에 꽂고 검파에서도 손을 뗐다.

이미 자기는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는데 선배들이 자기들을 공격할 수 있는 거냐고 항의하려는 것 같았다.

소청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웃었고 린린은 고개를 내두르다가 말을 달렸다.

태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이 그렇게 물들면 괜히 가슴이 웅장해졌고 조금은 자비로운 마음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린린 일행이 추살접을 따라붙었을 때 그들을 본 아진과 북리의천은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웃었다.

서릿발 내리는 눈을 하고 전부 다 해치울 것처럼 하던 린린이 조무래기들을 전부 다 달고 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거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

아진이 앓는 소리를 하자 북리의천도 웃었다.

“무림에서 우리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황상께 받아 달라고 하면 될 일이 아니냐. 아진아. 그보다 나는 산본의가의 경비대장이 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기는 하다만 말이다.”

더 이상 복잡하게 이것저것 따지는 것도 귀찮다는 듯이 북리의천이 말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북리의천과 아진이 능히 정파 무림인들의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영향력으로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사도련주까지 잡는다면 그때는 더 말을 할 것도 없을 터였다.

* * *

새벽같이 의방을 열었지만 환자는 구경도 할 수도 없었다.

의생과 의녀들에게 줘야 할 돈을 주지 못하고 여섯 달이나 급봉이 밀렸더니 하나둘 집기와 약재를 훔쳐서 의방을 떠나버렸고 제선문 의방이라는 현판이 처마 밑에 처량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어쩌다가 그랬는지 한쪽 귀퉁이가 덜렁거리고 있어서 잘못 하면 현판이 떨어져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어찌해 보겠다는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제선문주 사유람.

제선문주.

그 이름이 주어졌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그때 심장이 얼마나 터질 것 같았는지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헛된 꿈이었는지 이제 그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한여름의 꿈 같았다.

북궁세가가 견고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곧 천하가 제선문의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북궁세가의 공자가 하는 말은 달콤했고 그가 약속하는 것은 모두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정말 그랬다.

그에게 협조하는 사람들은 날개를 단 것처럼 날아올랐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참혹한 삶을 살았다.

다른 이들의 삶이 처절하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유람은 자기가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까지 느꼈다.

이제는 실소만 나오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구문제독이 아니었던가.

그 구문제독의 북궁세가가 아니었냐는 말이다.

북궁세가는 견고했고 그 가문이 무너지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것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상상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 버렸다.

그렇게 될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하월이 황상의 총애를 잃고 감당도 못 할 빚더미에 깔린 채 추락했다는 말을 듣고도 오랫동안 사유람은 그 말을 믿지 못했다.

한 손으로 천하를 주무를 수 있을 것 같던 그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돼 버린다는 건가 했던 것이다.

‘아니. 그거야 뭐. 이제 와서 상관도 없는데. 나는 이제 어째야 하냐는 말이다.’

그가 이어받은 제선문은 이제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한때는 문도의 수가 급격히 늘었고 저를 신선처럼 여기며 굽신거리는 문도들을 보면 가슴 속에서부터 뿌듯함이 밀려왔지만 이제는 전부 퇴색된 옛 기억일 뿐이었다.

무료로 의방을 열었을 때 개떼같이 모여들던 공짜 환자들은 강풍에 구름이 떠밀려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의방을 낼 때 목이 좋은 것을 떠나 산본의가 의학당 출신의 의원이 문을 연 곳 옆에 의방을 내라고 해서 수익성이 좋은 곳에 낸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하월이 뒤를 받쳐 줄 때는 어떻게든 손실을 보전해 주고 급봉도 줘서 불만은 없었는데 하월이 몰락한 후에 그 여파는 고스란히 제선문에 미쳤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사유람은 답도 없는 상황에서 연신 술만 비우고 있었다.

산본의가 의원은 어쩌고 있는지 한 번 가 봤다가 환자의 줄이 끝도 없이 이어진 것을 보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 한밤중에 불이라도 질러 버리려고 갔다가 사람들에게 들킨 게 몇 달 전 일이었다.

그를 발견한 사람들은 몽둥이와 낫까지 들고 덤벼들었고 그날 사유람의 팔을 잘라 버린다고 난리였다.

‘웃기는 놈들. 공짜로 치료해 줄 때는 공짜 추나술을 잘도 와서 받던 것들이.’

사유람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었다.

“문을 열고 있어 봐야 환자도 안 오는데 계속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가?”

사유람은 혼자 중얼거리며 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그곳으로 몇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봤을 때 그는 정신이 가물가물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는 아닌 것 같은데.

‘나를 찾아올 사람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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