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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98화 (198/470)

제198화

198화

일단 역천마의가 자신의 영업 비밀을 풀기로 한 이상 산본의가가 다시 한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은 정해진 순서였다.

‘어차피 주군이 돌아오시려면 시간도 오래 걸릴 테니까 그동안 내가 의원들을 키워 놔야지.’

천마신교의 대마두와 고독이 함께 산본의가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 * *

“폐하. 천마신교의 교주가 들었사옵니다.”

태감의 말에 황제는 안으로 들이라 명했다.

아진이 다녀간 후에 황제는 곧바로 교주를 불러들이도록 했고 교주는 달포가 다 지나가서야 황제를 알현했다.

교주가 일찍 오려고 마음먹기만 했다면 그보다 훨씬 더 일찍 올 수 있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황제는 교주가 늦어진다는 것 자체로 거기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호락호락하게 말을 들을 생각은 없는 거로군.’

그러면서 변방을 지키는 병력 중 이동이 가능한 병력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동안 십만대산에 들어앉아 있는 무리를 너무 오래 방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병력이 이동한 것을 알면 그동안 서로 대치해 오고 있던 적들이 곧바로 틈을 노리고 들어올 수도 있어서 황제는 우선 화친을 제의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사도련주를 처리하는 동안 천마신교가 뒤를 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자존심에 타격이 클 것 같았다.

‘그래. 황금 이천 관 정도를 써서 화친을 제의하자. 어차피 그놈들도 돈을 쓰는 건 마찬가지니까 화친을 제의하면 좋아할지도 모르지. 황금 이천 관은 너무 많은데……. 그냥 내가 직접 그린 그림을 보낼까? 내가 그린 그림이면 그 정도 가치가 있지 않은가?’

이모저모로 머리를 굴리던 차에 교주가 왔다는 말을 들었다.

안으로 들어온 교주는 정해진 예법대로 격식을 갖추어 인사했다.

황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고 교주는 웃었다.

‘웃어?’

황제는 자기가 지금껏 한 번도 상대해 본 적 없던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아진은 겁내는 척이라도 해 줬는데.

“교주는 경공을 펼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폐하.”

“입궁하라는 명령을 받은 게 언제인가?”

“아마 열흘 전일 것입니다.”

“열흘 전이라. 특별히 황궁 고수를 보냈네. 그대를 빨리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그랬지. 짐이 명을 전하는데 황궁 고수를 보냈을 정도면 사안이 급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텐데 꽤 여유를 부렸군.”

“시간이 걸리기는 했습니다만 거리가 워낙 먼 곳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

말을 하면서도 교주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었고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다.

겉으로는 송구하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하는 말 같지도 않았다.

이런 자라면 곤란했다.

명령을 듣고 그러겠다고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듣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교주와 이야기를 하면서 황제는 마음을 굳혔다.

황금 이천 관을 쓸 수밖에 없겠다고.

교주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미리 십만대산 인근에 병력을 이동시켜 놓으면 아진이 말한 시간 동안은 교주의 발목을 잡을 수 있지 않겠나 했다.

‘차라리 그 돈을 아진에게 주고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게 낫지 않나? 아…… 어차피 지금은 부를 수도 없지.’

교주를 앞두고 황제의 생각은 깊어만 갔다.

황제를 대하는 것이 편치 않은 것은 교주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황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랬다.

황제라는 자리의 권위와 위엄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자기를 앞에 두고 자꾸 딴생각을 하면서 고민하는 모습이 보여서 그랬던 것인데 교주는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이 황제에게도 당연히 통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궁에는 아주 강력한 진이 있어서 무공이 통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수준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자신처럼 마신의 경지 초입에 이른 사람이라면 진으로 제약을 받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궁에 와서 이미 몇 가지를 시험해 봤는데 그가 시도한 무공들은 전부 되었다.

그래서 황제의 생각도 당연히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거대한 벽에 탁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도통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기가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차단하려 애써서 만들어진 결과도 아니었다.

역천마의는 종종 그런 식으로 생각을 숨겼는데 황제는 자기가 생각을 읽으려 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황실의 혈통 때문이라는 건가?’

그것만 아니라면 교주는 황제가 자꾸 딴생각에 빠질 때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황제의 앞에서 할 일도 없어서 어떻게든 황제의 생각을 읽어 보자고 벼르고 집요하게 시도를 하자 황금 이천 관이라는 말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엄청난 압력을 가하자 작은 구멍으로 그것이 억지로 밀려서 나온 것 같은 형국이었다.

교주가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더 알아내려고 했을 때 그는 뜨뜻한 것이 코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하며 손을 대자 검붉은 진한 핏물이었다.

그것은 양쪽 귀에서도 흐르더니 눈에서도 나오고 이어서 전신 모공으로 솟구치려 했다.

교주가 깜짝 놀라며 능력의 사용을 포기하자 그제야 잠잠해졌다.

황제는 그런 교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놀랄 일은 차고 넘치도록 겪게 된다.

거기다가 서도진이라는 사람을 알고 지내게 되면 놀랄 일이 훨씬 더 많아진다.

‘또냐?’

황제는 그 정도로 생각하며 교주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왜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럴 만하니까 그런 거겠지 할 뿐이었다.

“짐은 무림 세력 간의 다툼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본교는 지금껏 조용히 지내왔습니다. 폐하. 정파나 사파를 준동한 일도 없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일이 생긴 후에 말하면 늦으니 이러는 것이다. 다시 말하겠다. 짐은 무림 세력 간의 다툼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정파가 사도련을 괴멸시키려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짐의 명령이다. 사도련은 흑도 왈패들과 다른 바가 없고 도적 무리를 이루어 짐의 백성들을 괴롭혀 왔다. 그런 자들을 토벌하지 않고 어찌 백성들의 삶이 평화롭고 안전하기를 바라겠느냐.”

“그러면 폐하의 말씀은 본교와 정파 간의 대립에 국한되는 것인지요.”

“그렇다. 정파 무림이 짐의 명을 이행하느라 전력이 분산되거나 약해지는 틈을 타서 정마대전을 준비한다면 짐이 좌시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교주는 즉답을 하는 대신에 황제를 바라보았다.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눈빛이었는데 황제는 그저 웃었다.

교주는 모르겠지만 황제가 황위에 오른 후부터 지금까지 황제를 겁박해 온 인간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황제를 가르치려 드는 이들 역시 하나둘이 아니었고 이런 눈빛을 본 것도 여러 번이었다.

황제는 교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비록 황제에게는 교주와 같은 능력은 없었지만 그동안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겪다 보니 저절로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는 때가 있었다.

지금과 같은 경우가 그랬다.

명백히 반항적인 눈빛을 보고도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면 교주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황제가 겁먹었다고 생각하며 만족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황제는 거기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누가 오랫동안 눈을 깜빡거리지 않고 참는가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라. 퍽 바쁜 위인인 것 같으니 말이다.”

“…….”

“얼마나 바쁘신 몸인지 알았으니 이제는 부르지 않도록 하지. 그대도 짐이 그대를 부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

“…….”

“나가 보라.”

교주는 황제에게 천천히 포권을 취했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짙게 남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 *

나비의 집념.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비는 끝도 없이 날았고 도중에 멈추는 일도 없었다.

그 때문에 나비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객잔에 가서 편안히 식사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밤이 된다고 해도 잠을 이루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틀 동안 강행군을 한 후에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사도련주를 찾아내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전멸하겠다고 생각하며 대책을 세웠다.

커다란 마차를 여러 대 구입하고 꼭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고는 마차 안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하면서 나비를 쫓고 나서야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사도련주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차올랐다.

아진과 소청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일찌감치 따라붙었고 모두 소청의 건강해진 모습을 보면서 감격을 금치 못했다.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일단 소청만 보면 자신감도 생기고 낙관적이 되고 행복감이 충만해졌다.

충독의 벌레에 잠식됐지만 죽지 않은 소청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희망이 되었던 것이다.

“고독은 잘 자라고 있겠지?”

린린이 묻자 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고독의 안부를 묻는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겠지.”

“사도련주를 찾으면 오라버니가 가는 거지? 산본의가에?”

“그렇지. 내가 가장 빠르니까. 고독은 중요하고.”

아진이 당당하게 말하다가 북리의천과 눈이 마주치자 목을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게 더 비참하구나. 스승이 돼서 느려서 미안하다. 아진아.”

“아닙니다. 스승님. 저를 제자로 두셔서 고충이 많으실 거라는 것을 이 제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아진이 안 하던 말을 다 하자 북리의천이 더욱 크게 웃었다.

그것도 이제 소청이 나았다고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아진에게서 그의 비밀을 듣고 북리의천은 아진을 대하는 것이 조금은 달라졌다.

전에는 마냥 어린 제자를 대하는 것 같았다면 이제는 낭왕 같은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훨씬 더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아진이 살던 곳에서 그의 나이가 서른여덟이었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 생각을 하면 그냥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행복이 넘쳐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 것이다.

이제는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도련주를 잡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그 후에는 사도련주와 그가 그사이에 다시 만들어놨을지 모를 대제들과 싸워서 이겨야 끝이 나는 것이지만 걱정이 되지 않았다.

일단 상대가 눈앞에 나오기만 하면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신감이 넘쳤다.

이렇게 기뻤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고 그 분위기는 비단 그들 사이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쟤들은 지치지도 않나 봐요. 속도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아요. 오히려 더 빨라지는 것 같아요.”

린린의 말에 북리의천도 동감했다.

나비가 빠르다고 해서 무인들이 경공으로 쫓아가지 못할 속도는 아니었다.

말을 타고도 넉넉하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밤낮없이 날고 조금도 쉬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였다.

“그래도 이제 끝나가니까.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끝이 날 테니까.”

북리의천이 말하자 모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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