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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95화 (195/470)

제195화

195화

-급히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그리고 부탁을 드릴 것도 있습니다.

-그래. 안 그래도 무척 급해 보이는 얼굴이군.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더 시간을 뺏으면 안 되겠지. 말을 해 보아라.

아진은 천마신교와의 문제를 말했다.

-사도련주를 붙잡는데 저희만의 역량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천마신교 내에 사도련주와 필적하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알려진 역천마의를 데려왔습니다.

-마교도를 데려왔다는 거군. 마두를.

-예. 폐하.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역천마의라는 자가 자발적으로 따라왔다고 해도 그렇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렇고 말이야. 천마신교의 교주가 그냥 있지는 않겠어.

-예. 폐하. 폐하께 부탁드리려는 것도 그것입니다. 사도련주를 잡기 위해서는 역천마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역천마의를 저희가 데리고 있으면 천마신교와의 격돌은 불가피합니다.

-하나의 적도 절대로 만만치 않은데 두 적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거군. 정마대전을 걱정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폐하.

다행히 황제는 눈치가 빠른 자였고 자기가 일으킨 문제가 어떤 파급효를 가지게 될지 알고 있었다.

-그렇군. 알겠다.

그는 조금 생각을 해 보는 것 같더니 말했다.

-짐이 교주를 불러서 중원을 넘보지 말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짐의 생각이 맞느냐. 아진.

-예. 폐하. 지금 교주를 막아 주실 수 있는 분은 폐하뿐이십니다.

-짐을 믿어 주니 고맙구나.

황제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아진은 황제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가 의심했다.

황제의 권한은 작금에 이르러 그동안 유례없이 강해져 있지만 천마신교의 교주가 얼마나 힘을 키웠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황제도, 정파도, 천마신교의 실체와 신교의 전력을 알지 못하는 것이 실상이었다.

황제에게는 천마신교의 교주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수백만의 황군과 맞설 각오를 하지 않는 한 교주는 황제의 명에 굴복하는 것이 옳겠지만 막상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교주가 황명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선포한 채 마도 천하를 외치며 중원을 피로 물들이려 할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설마하니 그런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려고 하는 것을 눌렀다.

-알겠다. 아진. 그 문제는 내가 처리하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폐하.

아진은 해야 할 말이 너무 급하다는 것 때문에 그때까지 황제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황제는 신수가 훤해 보였고 편안한 것 같았다.

아진이 바라보자 황제가 웃었다.

-선이남은 나에게 유익한 자다. 선이남을 진작 내 옆에 둘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짐은 잘 지내고 있으니 이곳의 일은 걱정하지 말고 너는 너의 일을 하도록 하여라.

-감사합니다. 폐하.

-내 명을 지키기 위해 너희가 치른 희생을 알고 있다. 그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며 모두에게 보상할 것이니라.

-그것도 감사합니다. 꼭 좋은 것으로 주시옵소서.

아진이 웃으며 말하자 황제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각 이상 전음을 하지 말라고 했다며 시간을 재어 가며 초조해하던 황제가 아니었다.

어느덧 이각이 훌쩍 지난 것 같은데도 황제는 걱정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아진이 황제에게 그것을 묻자 황제가 폭소를 터뜨리려 하다가 소리가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 듯 스스로 입을 막았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선이남이 먼저 실토를 하더구나. 내가 너무 말이 많아서 그런 거였고 사실 그보다 조금은 더 전음을 사용해도 된다고 하더라.

아진은 기겁을 한 채 황제를 바라보았다.

-설마…… 정말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까.

_그것을 왜 다시 묻느냐. 선이남이 어떤 인간인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아진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고 황제는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요즘은 정말 재미있다. 내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을 전부 다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위안이 되더구나.

황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아진이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정도로 말을 줄였다.

-어서 가도록 하여라. 아진아.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여라. 소청이에게도 힘내라고 하고. 아. 소청이에게 선물을 하나 주어야겠다.

황제가 말을 하더니 자신의 서탁 서랍을 열고 그 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무엇을 줄까 하는 것 같았다.

-고민하지 마시고 눈에 들어온 것은 전부 다 주시면 어떨지요. 폐하.

그러자 황제가 웃음을 짓더니 머리에 두르는 건을 꺼냈다.

-짐이 아끼는 것이다. 모후께서 직접 둘러 주곤 하셨던 것이지. 그때 짐의 나이가 소청의 나이만 했을 것이다. 자주 꺼내 보면서 그때의 일을 기억하려고 여기에 두고 있었다. 이걸 소청이에게 가져다주거라. 짐이 응원한다고도 꼭 전하거라.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다른 금붙이를 받은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소중했다.

아무리 그래도 소청이 그걸 직접 두르고 다닐 수는 없겠지만 그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제가 소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고 소청이 황제에게 그것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 주위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질 터였다.

산본의가 사람들이야 지금도 차고 넘치도록 소청에게 잘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소청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뵐 때는 사도련주를 죽였다는 말씀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폐하.

-그래.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라.

황제는 직접 일어나서 따라오며 말했다.

아진은 황제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 그곳을 떠나왔다.

* * *

바삐 움직인 사람은 아진만이 아니었다.

북리의천은 아진이 자리를 비운 그 시간이 자기가 일을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은밀히 움직여 낭왕을 찾아갔다.

독고소영이 없는 지금, 북리의천이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년배가 그였다.

천마신교의 마두들이 산본의가에 와 있다는 것은 정의맹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북리의천은 자기가 정의맹주로 남아 있는 한 그 문제는 지속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한밤중에 찾아온 사람이 북리의천인 것을 알고 정의맹의 무인들이 놀라며 그를 낭왕에게 안내했다.

웬만해서는 놀라는 일이 없는 낭왕도 갑작스러운 북리의천의 방문을 받고는 꽤 놀란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가. 검신.”

낭왕은 의관도 정비하지 못한 채 나와 북리의천을 맞으며 말했다.

“들어가서 말하지. 그럴 시간은 있네.”

“그래. 그렇게 하세.”

낭왕은 북리의천이 이런 시간에 찾아올 이유가 도대체 뭐가 있을까 하다가 그대로 우뚝 섰다.

소청이 죽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검신. 설마 소청이……?!”

그러자 북리의천이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웃었다.

“그 일로 온 것이 아니라 참으로 다행스럽군. 내 사손은 잘 버티고 있다네. 정말로 잘 버티고 있지.”

“그렇군. 다행이네. 다행이야. 그러면 무슨 일인가.”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네. 꼭 들어줘야 하네.”

“대체 무슨 일인가. 검신.”

아무리 검신이라고 해도 이런 시간에 이렇게 와서 하는 말에는 쉽게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북리의천이 낭왕의 손을 잡았다.

“고민하지 말게. 내 말을 들어 주지 못할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 자네는 내 말을 들어 줘야 하니까 말이네.”

북리의천이 낭왕의 손을 탁탁 두드리고는 놓았다.

“대단히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 그냥 나를 대신해서 정의맹의 맹주가 되어 주기만 하면 되네.”

“……그게 무슨 말인가.”

“말한 대로네. 그리고 한 가지만 당부하겠네. 아니. 부탁이라고 해 두지.”

낭왕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큰일이 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그리고 마공을 익힌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실만으로 무림공적으로 몰고 멸문을 시키는 일은 우리 정의맹에서는 없었으면 하네. 그 힘을 가지고서 약한 자들을 돕고 의와 협을 행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찌 그들을 악하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의 말에 낭왕이 북리의천을 불렀다.

그러나 북리의천은 자기가 먼저 말을 마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우선 자네만 알고 있게. 그래도 약속을 하겠다는 문서는 하나 작성을 해 주면 좋겠군.”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 검신.”

“자. 이제 앉아서 그 내용을 쓰도록 하게.”

북리의천이 서두르자 낭왕이 그를 바라보았다.

낭왕은 그때까지만 해도 산본의가에 마두들이 와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북리의천이 소청의 문제를 확실히 해결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소청이 마공을 익혔다는 것은 낭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낭왕은 이제 그것이 불가피한 일인가 하며 북리의천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북리의천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소청을 위해 그 곁을 지켜주고 싶은 것 같은데 마냥 거절할 수가 없어서였다.

“알겠네. 대신 나도 조건이 있네.”

“뭔가. 말해 보게.”

“내 힘으로는 정의맹을 이끌어갈 자신이 없네. 그리고 정의맹에 산적한 현안도 벅차네. 게다가 정의맹에는 그 문제만 있는 것도 아니지.”

“자네에게 짐을 전부 떠안으라고 하지는 않네. 어려운 부탁을 했으니 내가 약속 하나 해 주지. 내 제자와 내 사손 같은 아이들을 두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약속이지.”

북리의천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도련주는 내가 잡아 주겠네. 반드시 그 자리의 목을 베서 자네에게 주지.”

“…….”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면 믿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일이 대꾸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리의천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낭왕은 북리의천의 팔을 다독였다.

“나를 믿어 줘서 고맙네, 검신.”

“그럼 어서 써서 주도록 하게. 나는 일찍 돌아가야 하네.”

결국 북리의천은 낭왕이 써준 문서를 가지고 산본의가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정의맹주가 아니었지만 마두들을 지켜줄 힘은 갖게 되었다.

이제야말로 가뿐하고 후련하고 싸울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 * *

방에는 일찍부터 많은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흑주도 긴장한 듯 린린의 옆에서 그 광경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흑주의 빛만으로도 방은 충분히 밝은 듯했다.

‘잘 되겠지?’

아진은 역천마의에게 자신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괜한 부담을 안기게 될까 봐 차마 말을 하지는 못했다.

방안에는 최소의 인원만이 함께 하고 있었다.

북리의천과 제선문주.

그리고 린린과 대법을 받게 될 소청이었다.

역천마의는 긴장이 되었는지 이마에서 연신 솟아오르는 땀을 닦아 냈다.

“시작하겠습니다.”

역천마의가 말을 하고 소청의 혈도를 순서대로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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