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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92화 (192/470)
  • 제192화

    192화

    “그래도 안 좋은 일이기만 한 건 아니었고 나중에는 제가 SSS급이 됐고.”

    아진은 신이 나서 말했지만 이미 두 사람의 표정은 어두워진 채로 계속 멈춰 있었다.

    좋은 일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일단 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다른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가슴 언저리가 묵직해지고 슬픈 듯했다.

    “그래도…… 그래서 그 상태창이 나타났을 때 고민도 않고 이곳으로 올 수 있었으니까 잘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말 행복하고요.”

    아진이 웃는 모습을 보면서 북리의천과 소청은 그것이 아진의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승님이 매일 기쁘셨으면 좋겠어요.”

    소청이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아진을 보며 말했고 아진은 활짝 웃었다.

    “나는 정말 기쁘다. 소청아. 나는 여기에 와서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모습을 정말 많이 알게 됐어.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라는 것도 여기에 와서 알았어. 그때까지는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거든. 웃는 법도 잊은 채로 살았는데 여기서는 매일 행복해. 매일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행복해.”

    그러자 소청이 웃음을 지었다.

    북리의천의 얼굴에도 평화로운 웃음이 지어졌다.

    세 사람은 그 후로 한참 동안 그 침묵을 지키며 각자가 나눴던 말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이제는 서로에게 다시 부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로 인해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며 행복해하고 있는지 제발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아진의 바람을 그들이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라면 아진을 위해서 얼마든지 힘을 낼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금영 누님은 고독을 어떻게 하실까요? 고독을 충독처럼 만드실까요? 그분은 천마신교에서 가장 실력 좋은 의원이시라고 했지요?”

    소청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자 북리의천도 그것을 궁금해했다.

    “그런데 그건 확실히 통제가 가능하겠지?”

    역천마의가 전에도 그런 대법을 해 본 적이 있는지 북리의천이 물었고 아진은 린린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일단은 가 봐야 알겠구나.”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북리의천과 소청이 연달아 말을 했고 아진 역시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었다.

    어느덧 그들은 독지의 바깥으로 나왔다.

    이미 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이라 사람들이 없을 거라던 그들의 생각과 달리 그곳에는 독지에 들어갔을 때 마주쳤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독지에서 일을 당하고 못 나올까 봐 걱정돼서 온 건가?’

    아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마움까지 느꼈다.

    조금만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좋게 생각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아진이 들고 있는 커다란 자루에 향했다.

    고독이 든 옥병 말고도 크고 작은 짐승의 사체까지도 있어서 짐이 한가득이었다.

    사람들은 아진이 갖고 나온 독물에 욕심이 나는 듯했다.

    그들 중 몇몇은 이미 걸음을 옮겨 아진 일행을 에워쌌다.

    “이런.”

    북리의천은 별짓을 다 본다는 듯이 혀를 찼다.

    소청은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고 아진은 이번에야말로 자기도 실력 발휘를 해서 만회를 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독공으로 유명한 사람들이라 대부분 독장을 펼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 중에도 병장기를 사용해 덤비는 이들이 있었다.

    출검의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상당히 빨랐다는 정도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빠른 것도 아니고 여러 면에서 미흡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상적이기는 했다.

    요란하게 검을 휘두르는 사람을 향해 소청이 바닥을 차고 나가 검을 횡으로 그었고 그에 맞춰 핏빛 진눈깨비가 날리듯 피 분수가 쏟아졌다.

    소청은 바닥으로 내려오는 것과 동시에 다시 떠올랐고 몸을 회전하며 검을 넓게 그었다.

    잘 짜인 안무에 맞춰 흠 없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청의 발이 다시 바닥에 내려올 때면 어김없이 비명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쏟아졌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순식간에 사람들을 쓰러뜨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몇 사람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늙은이를 노려라!”

    아진은 그야말로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아무리 강호와 먼 운남이라고는 해도 적어도 정의맹주의 용모파기 정도는 서로들 숙지하고 있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마저 밀려들었다.

    “자네들 중에 고독을 가진 자들은 말을 하게. 그러면 목숨까지는 거두지 않도록 하지.”

    북리의천이 말했지만 대답을 하는 이는 없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장면이 펼쳐지는 바람에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이었다.

    “대답하는 자가 없으니 나는 남기지 않고 죽이겠네. 우리에게 이러는 자네들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고이 보내 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일세.”

    싸움이 벌어진 걸 알았으면 흑주가 신이 나서 나와야 했을 텐데 잠잠한 것은 아진을 대신해 주위의 독기를 흡수해서인 것 같았다.

    북리의천이 검을 들어 올리자 압도적인 기운이 대기를 휘감았다.

    검에 내공을 불어넣고 있는데 그 기운만으로도 주위의 사물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 같았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로 돌아 맹렬히 도망쳤다.

    그러나 그것은 북리의천의 시선을 끌기만 할 뿐이었다.

    “먼저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원하는 것이 그거라면 들어 주지. 어려운 일도 아니니.”

    북리의천의 검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허공을 찢는데 그들이 휘말린 것인지, 그들을 죽이는데 허공이 휘말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붉은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허공에서부터 핏물이 가득 쏟아져 내렸다.

    북리의천의 얼굴에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돌아섰을 뿐이었고 그의 앞에 서 있던 사람 중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동정은 베풀어지지 않았다.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수백 개의 검기가 날아갔다.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지만 소청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을 믿으라고.

    아진은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이대로 쉬지 않고 돌아가도 되겠습니다.”

    아진이 말하자 북리의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청아, 이 사조에게 업히겠느냐?”

    “우선은 제힘으로 가 보겠습니다. 사조님.”

    “그래. 그러자꾸나.”

    북리의천은 소청이 하는 모든 말이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 * *

    아무리 초고수라고 해도 비가 오는 날 비를 쫄딱 맞으면서 가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객잔을 잡을까요, 스승님?”

    아진이 말하자 북리의천이 고개를 저었다.

    “객잔은 무슨. 괜한 일에 휘말려서 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구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스승님. 스승님은 오래오래 저희 곁에 머물러 주셔야 합니다. 이 제자가 스승님을 놓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진이 말하자 북리의천이 웃음을 지었다.

    시간의 흐름은 일정하지 않았다.

    견디기 어려운 충격과 슬픔은 시간을 널뛰게 만드는 듯했다.

    아진은 처음 그를 봤을 때 괴질과 오래 싸우고도 스승의 모습이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독고소영이 죽은 후, 세월이 그를 쓰러뜨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그에게는 노쇠한 기운이 조금씩 덮이기 시작했다.

    영원히 함께 자신의 곁에 있어 줄 것 같던 스승이 갑자기 늙은 것 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듣게 될 때마다 아진은 고통스러웠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별 뜻이 있는 말은 아니다. 너희와 조용히 비 구경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아진과 소청은 비를 피할 곳을 찾아 그곳에 불을 피웠다.

    소청이 웃어서 쳐다봤더니 전에 동굴에서 비를 피했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때 아진은 린린에게 진기도인을 해 주었고 소청은 두 사람을 자기가 지키겠다고 했었다.

    비까지 내리는 날 동굴에 사람들이 찾아올 거라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설상가상 제선문의 살수들이었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격이었지만 소청이 흑주와 함께 싸워 두 사람을 구해 주었다.

    아진은 소청에게 그 일이 큰 의미가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힘으로 스승과 사고를 지켜내고 스스로가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래도 오늘은 조용히 지나가면 좋겠어요.”

    소청이 말했고 북리의천과 아진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아. 신교에서 온 사람들은 어떻게 할 참이냐.”

    모닥불의 따뜻한 열기 때문인지 소청이 먼저 잠이 들자 북리의천이 물었다.

    “정의맹에 부담이 된다면 다른 곳으로 가도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면 그때는 제가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신교에서는 추살조를 보낼 것이다.”

    “예.”

    “그러면 그때는 정마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다. 내가 정의맹주이기 때문이다.”

    “…….”

    정마대전으로까지 비화할 일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듣고 보니 타당한 말이었다.

    “역천마의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도련주를 잡기 위해서도, 그리고 소청이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도 지금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역천마의뿐일 거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난번에 제서성에서 당한 것이 우리의 불찰 때문이었다면 다음에는 그 부분을 보완하면 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운까지 좋았고 모든 게 거의 완벽했으니까요.”

    “그래.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고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사도련주와 싸우면서 우리 전력이 약화할 때를 틈타 천마신교에서 공격을 해 온다면 우리는 약해진 전력으로 그들을 마주해야만 한다. 그때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 너무도 뻔하다.”

    “…….”

    아진의 머릿속도 복잡했다.

    역천마의.

    천마신교의 추살조.

    지금의 교주.

    비고를 지키던 경비 무사들이 지금까지도 패월악 교주를 잊지 못한 것을 보면 지금의 교주가 남들에게 인정받는 권위를 갖고 있지는 못한 것 같았다.

    린린이 워낙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천마신교 내부에 균열이 있다면 더더욱 교주는 그 문제를 외부로 터뜨리려 할 가능성이 컸다.

    “함께 해법을 모색해 보자꾸나. 아진아.”

    “예. 스승님.”

    그 자리에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북리의천도 모닥불 옆에서 자리를 잡았고 아진은 그 곁에 앉아 그들을 지켰다.

    역천마의.

    천마신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끝에 갑자기 아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황상. 황상이 교주를 불러다 명령을 내린다면 교주도 그 명에 따라야 할 테지.’

    천마신교를 걱정하느라 사도련주를 포기할 수도 없고 사도련주에게만 몰두하다 천마신교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우선은 그 방법이 가장 나아 보였다.

    관과 무림이 불가침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사정이 없을 경우에 그런다는 것뿐이지 황상의 명령에 따라 상황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분간 우리는 사도련주를 잡는 일에 몰두할 수 있다.’

    사도련주를 잡으라는 것이 황상의 명령인만큼, 그 일에 전력을 쏟아붓는 정파를 위해 천마신교를 막아 주는 것은 황상이 충분히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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