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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90화 (190/470)
  • 제190화

    190화

    “계속 그곳에 있었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리고 역천마의는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전력에서 획기적으로 변화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사도련주를 잡을 방법은 요원합니다.”

    아진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북리의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부분까지 고려하고 데려온 거라면 그 뒷일은 자기가 수습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문제로 인해 정의맹까지 곤경에 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는 곧 정의맹과 선을 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먼 길을 오느라 힘이 들었을 텐데 안으로 가십시다.”

    북리의천의 말에 역천마의와 경비 무사들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라고 자기들의 존재가 환영받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북리의천을 보필하기 위해 산본의가에 와 있던 북리세가의 무인들도 아진과 동행한 사람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들에 한정되었고, 역천마의나 경비 무사들보다 무위의 수준이 낮아 마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산본의가의 사람들은 전혀 불편함이나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잘 오셨습니다. 모두 환영합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고 피곤하실 텐데 곧 쉬실 곳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주는 그들 모두를 환영했고 역천마의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역천마의의 마기는 느끼지 못하지만 그녀가 의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바로 알아차린 것 같아 아진은 신기해했다.

    역천마의도 산본의가의 의원들이 펼치는 의술에 관심을 가졌고 북리소은과 금방 가까워졌다.

    북리소은은 린린이 역천마의를 소개하자 역천마의와 인사를 나누면서도 린린이 언제 역천마의를 알게 된 건지 궁금해했다.

    이번에 나가서 알게 된 게 아니라 이전부터 서로가 서로를 깊이 알아온 것 같다는 분위기가 느껴져서였다.

    역천마의도 린린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린린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가끔 말실수를 하게 되는 때가 있었다.

    자꾸만 린린을 지존이나 교주라고 부르고 말았는데, 그때마다 역천마의는 눈이 동그래진 채 다른 말이 잘못 튀어나온 것처럼 행동했다.

    다행히 산본의가 사람들은 린린을 절대적으로 믿었고 린린이 천마신교의 교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역시 멋있는 사람이라며 그냥 넘어갈 것 같기는 했다.

    “아아. 허리를 삐었는데 그걸 처방하나요?”

    “소저는 혹시 다른 약초를 사용하셨나요? 허리를 삐었을 때 더 효과가 좋은 약초가 있나요? 있으면 저도 알고 싶어요.”

    “아. 그게…….”

    역천마의는 북리소은에게 묻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는 허리 통증에 효과가 있는 약초 중에 이곳에서 구하기 쉬운 것을 처방했을 테고 역천마의는 십만대산에서 많이 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뿐이었는데 괜히 그 이야기를 했다가 자신의 비밀이 들통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우리를 잡아 오라고 추살조를 보냈을 거야.’

    그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역천마의는 슬슬 그 일이 걱정되었다.

    천마신교의 일반 교도가 신교를 떠나도 그러는데 역천마의는 더군다나 교주가 마후로 삼으려고 점찍어 둔 여자였다.

    린린과 아진이 그곳에 갔던 것을 본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없기에 산본의가와의 연관성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나 또 모르는 일이었다.

    역천마의는 소청과 함께 돌아다니는 린린을 보았다.

    린린이 소청을 예뻐하는 모습은 정말로 적응이 안 됐다.

    지존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니.

    ‘지존이 확실히 이곳에 애착을 많이 갖고 계신 것 같은데. 그런데도 우리를 여기로 데려오셨단 말이야? 여기는 확실히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러신 거겠지?’

    역천마의는 지존만 있으면 걱정할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는 아진을 보았다.

    이곳에서 그가 혼자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뭘 하려고 해도 금방 사람들에게 둘러싸였고 마을에 나가도 사람들이 반가워하며 달려 나와 인사를 했다.

    애건 어른이건 상관이 없었다.

    ‘신기한 사람들이야.’

    역천마의는 왜 지존이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산본의가의 가주와 가모, 거기에 큰 오라버니까지도 지존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몰랐다.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사랑을 받다 보면 당연히 성격이 바뀌게 될 것 같았다.

    역천마의는 지존에게 그런 인생이 주어진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복리소은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한 노인이 역천마의에게 다가왔다.

    “이제야 보게 되는구려. 오래 기다렸습니다.”

    누군가 하면서 역천마의가 멀뚱히 있을 때 아진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제선문주님이십니다.”

    “아…….”

    제선문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소청을 어떻게 구해 줬는지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역천마의는 곧 그에게 인사를 했다.

    “석금영입니다.”

    물론 가명이었다.

    천마신교에서 언제 추살조를 보낼지 알 수 없는 판국에 자신의 이름이나 별호를 사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나 역시 소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선문주는 역천마의에게 기대한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부터 함께 이야기를 나눠 봤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석 소저.”

    “저야 물론 괜찮습니다.”

    여기에 오고 나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해서 안 그래도 조금 마음이 불편하기는 했다.

    억지로 린린을 따라왔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제선문주는 역천마의가 말을 하자마자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전각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3층짜리 전각의 2층에는 대청이 있어서 시원하게 뚫려 있었는데 대청이라고는 하지만 약초를 말리는 용도로 더 자주 사용되는 것 같았다.

    역천마의가 그것들을 주의 깊게 보자 제선문주가 각각의 약초를 설명해 주었다.

    역천마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해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약초에는 오히려 지식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관련한 책을 읽은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책을 한두 번 읽는다고 그 방대한 내용이 머릿속에 남는 것도 아니고 자주 사용하지 않는 지식은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기 마련인데 그것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래도 제선문주는 역천마의가 설명을 잘 듣는 것을 보며 그곳에 있는 약초를 전부 알려 주었다.

    역천마의는 그가 그러는 것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설명을 들었다.

    “석 소저가 누구인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을 해 준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벽에 부딪힌 상태여서 나는 석 소저가 와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역천마의는 그가 소청에 대해 말하는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지금 소청이는 어떤 상태인가요?”

    “충독의 벌레가 배 속에서 공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란 벌레가 버티고 있는데 살아 있다는 것이 용하죠. 그건 소청이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지만 그 벌레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안 죽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선문주의 말을 들으면서 역천마의는 그가 그동안 그 문제로 인해서 얼마나 고민이 깊었을지 알 것 같았다.

    “석 소저는 사도련주가 했던 것처럼 충독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얼굴을 보면 이미 믿는 얼굴이었다.

    “여기에 있는 약초는 소청이의 몸에 있는 그 벌레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나는 내가 배합 비율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는데 석 소저가 혹시 비율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줄 수 있는지 부탁하고 싶습니다.”

    역천마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선문주에 대해서 얘기를 들은 게 있는 만큼 그녀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길에 신념이 대단한지 짐작하고 있었는데 비율을 확인해 달라는 말을 들으면서 이 문제를 정말 간절히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문주님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지만 그래도 일단은 고맙습니다. 이 일을 끝낸 후에는 벌레를 만들어서 조련하는 것을 보고 싶은데 필요한 걸 말해 주면 내가 준비하겠습니다.”

    역천마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천마신교에서라면 벌레를 구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겠지만 그동안 모아두었던 수많은 재료와 실험체도 전부 그곳에 있었다.

    “고독이 필요합니다. 많을수록 좋아요. 백 마리건, 이백 마리건요.”

    “그건 내 영역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공자님에게 말을 하고 오겠습니다.”

    제선문주는 역천마의를 그곳에 남겨두고 아진에게로 갔다.

    역천마의는 이런 곳에 마두를 혼자만 두고 가도 되는 건가 하면서 웃었다.

    그러나 자기가 여기에 혼자 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가 그럴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에 제선문주와 함께 아진이 왔다.

    “고독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어디로 가면 잡을 수 있는지 아는 게 있으면 도움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역천마의는 자기가 알고 있는 고독의 서식지들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정말 주의하셔야 해요. 고독은 독성이 정말 강해서 조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크게 당할 수도 있거든요.”

    “린린은 조련할 수 있습니까?”

    “아뇨. 고독을 조련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알았습니다.”

    들을 이야기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천마의는 그날 이후로 한동안 아진을 보지 못했는데 사라진 사람은 아진뿐만이 아니었다.

    북리의천과 소청도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그나마 린린은 남아 있었는데 천마신교에서 추살조가 나올 때를 대비해서 그런 것 같았다.

    * * *

    “남만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들었는데 이제 오게 됩니다. 스승님.”

    “그러게 말이다. 나도 내가 남만에 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우리가 여기에 오는 걸 알았으면 현무단주도 어지간히 따라오고 싶어 했을 것이다.”

    북리의천은 그 말을 하면서 웃었다.

    아진과 소청도 자기들끼리만 알 수 있는 웃음을 지었다.

    스승과 제자라는 것은 이곳에서 혈연에 비해서도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가졌다.

    가족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기가 쉽지 않을 텐데 아진은 자신의 스승과 제자가 모두 자기를 위해 기꺼이 그럴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청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것만 해도 그랬다.

    아진을 위험하게 하기보다는 그냥 자기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있으면 독지(毒池)네요.”

    운남의 사람들도 함부로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곳.

    독지의 심처로 갈수록 온갖 독성이 강한 독물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살고 있어서 한 번 들어가면 여간해서 살아 나올 수 없다는 곳이었다.

    아진은 역천마의에게서 피독 팔찌를 빌려와 북리의천과 소청에게 주었고 그들은 일찌감치 그것을 꼈다.

    “그런데 스승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러자 아진이 흑주를 꺼내 보였다.

    “나는 흑주를 믿어야지.”

    “흑주가 왜요?”

    “내가 기절하면 흑주가 깨워 주겠지.”

    “아아. 그런 거라면 제가 깨워 드릴게요. 스승님.”

    소청의 말에 아진이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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