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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89화 (189/470)
  • 제189화

    189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도련주를 잡고 나면 제가 영약을 모아서 여기를 채워 드리겠습니다. 저랑 패월악이 함께 마령독화도 캤거든요.”

    비고의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할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이내 비고 안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흑주는 갑자기 밝아진 것이 무서웠는지 아진의 곁으로 급히 날아오다가 아진의 가슴팍에 부딪히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아진이 흑주를 들어 올리고 흙먼지를 털어 주었다.

    “우리한테 여길 허락해 줄 모양이야.”

    흑주가 광분하는 것이 흑주의 불빛이 번쩍거리는 것으로 다 보였다.

    비고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공간이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은 그 순간에 바로 알 수 있었다.

    곧바로 눈앞에 린린의 무리가 나타났던 것이다.

    “오라버니.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부탁을 했는데 들어 주셨어.”

    “그 부탁을 왜 이제야 한 건데?”

    역시 린린은 린린이었다.

    “처음에도 부탁을 하기는 하셨잖아요. 지존. 그런데 그때는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가 비고의 존재를 죽이는 걸 보면서 마음이 달라진 게 아닐까요?”

    역천마의가 말하자 린린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영약입니다. 지존.”

    경비 무사들이 소리쳤고 주위에 온통 영약이 넘쳐났다.

    그때부터 역천마의의 재능이 빛을 발했다.

    아진과 린린은 영약에 대해 많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천마신교의 비고 안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천마의는 각각의 것들이 어떤 목함에, 혹은 어떤 주머니나 천에 어떤 모양으로 보관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수많은 영약 중에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찾아냈다.

    “필요한 것만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아진이 말하자 역천마의가 움찔하며 린린을 보았다.

    그러자 린린도 그렇게 하라고 말했고 역천마의는 아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면서도 웬만한 것들은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아진과 린린은 그때부터 욕심 사납게 영약들을 챙겼다.

    “……지존?”

    역천마의가 어떻게 된 건가 하는 표정으로 린린을 부르자 린린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많이 가져가야 하는데 역천마의까지 그러면 안 되잖아.”

    “아…….”

    역천마의는 왠지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비고의 사념이 다시 아진에게 전해졌다.

    아진은 작작하라고 할까 봐서 움찔했지만 전해진 말은 달랐다.

    -교주가 왔다. 원한다면 나갈 길을 열어 주겠다. 나는 교주가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아진은 그 소리를 자기밖에 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린린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길을 열어 주겠다는 말이 뭐지?”

    “벽에 틈을 만들어 주거나 통로를 알려 주거나 하려는 것 아닐까?”

    아진도 반신반의하며 말했고 그러는 동안 경비 무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기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역천마의님……, 역천마의님은 어떻게…….”

    적의의 경비 무사가 말하자 역천마의가 그들을 보았다.

    그녀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다시 지존을 떠나보낼 수 없어요. 나는.”

    그 말 외에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

    역천마의의 얼굴에는 그런 말이 쓰여 있는 것 같았다.

    경비 무사들의 얼굴도 환해졌다.

    “저기인가 보다.”

    아진이 말한 곳으로 빛이 들어왔다.

    빛이 보이자 그곳을 향해 모두가 달렸다.

    다시는 지존을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 * *

    소청은 자기 때문에 사조님이 마을 어귀에 나와 있는 것이 죄송했다.

    죄송하니까 나와 있지 말까 생각도 했지만 안에만 있으면 도무지 시간이 안 갔다.

    수련을 해 볼까 해도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두 분 모두 무사하시겠지?’

    그럴 거라고 믿고 있지만 그래도 스멀스멀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는 때가 있었다.

    ‘까불지 마. 이 벌레야. 이런 생각을 들게 하는 거, 너지?’

    벌레로서는 많이 억울할 법도 했다.

    자기 혼자 그렇게 생각을 해 놓고 갑자기 그러는 것이.

    “사조님.”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비에 붙잡히겠다고 생각하며 사조를 바라보자 사조가 피풍의를 넓게 벌려 소청을 쏙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얼굴만 피풍의 바깥으로 나왔다.

    “엄청 크지?”

    “네. 사조님.”

    “네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셨다. 이걸 받고는 이렇게 큰 피풍의가 어디 있나 해서 혹시 잘못 만든 건가 했는데 이렇게 쓰라고 크게 만든 모양이야. 아직도 자리가 있어. 아진이도 넣어줄 수 있을 거다. 린린까지는 힘들려나?”

    “그러면 아마 스승님이 밖으로 나가서 비를 맞으실 거예요. 사고님을 들여보내시고요.”

    소청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그들을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빨리 오면 좋겠구나. 너는 나처럼은 되지 마라. 소청아. 나는 너무 소중한 제자를 만나고 아주 오랫동안 제자를 그리워해야 했지. 아진이가 너무 보고 싶어질 때는 차라리 이 녀석을 안 만났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단다.”

    “저도 그래요. 사조님.”

    소청은 사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도? 정말이냐?”

    “네. 정말 너무 보고 싶어서 마음이 아플 때가 있거든요.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렇구나. 그건 그럼 정상적인 마음인가 보다. 나는 나만 이상한가 했지.”

    “그런데 제 생각에는 황상 폐하도 그런 생각을 하실 것 같아요. 스승님은 정말 재미있잖아요. 좋고요. 막 이렇게 큰.”

    소청이 팔을 쭉 올리더니 그걸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한 듯 일어서서 피풍의 밖으로 나가 깡충 뛰기까지 하며 팔을 높이 올렸다.

    “이렇게 높은 성벽 같아요. 그 성벽 안에 있기만 하면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고요.”

    소청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북리의천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피풍의를 펼쳤다.

    “어서 들어와라. 소청아. 내 제자가 얼마나 큰 놈인지는 나도 잘 안다.”

    “네. 사조님.”

    소청이 피풍의 속으로 들어왔고 두 사람은 둥지 속의 두 마리 새처럼 하염없이 동구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린 보람도 없이 하루가 저물었고 그들은 누가 더 불쌍한지 우열을 가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축 처진 채 산본의가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나와 두 사람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공자님과 아가씨는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실 거라고 했다.

    충독의 벌레에게 삶을 뺏길 뻔했던 아이들은 당당하게 저들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영. 네 당부를 지키려고 나는 오늘도 살고 있다. 오늘 짓는 웃음은 전부 다 너에게 빚지고 있는 거지.’

    산본의가 정문 앞에 길에 늘어져 있던 환자들의 줄은 모두 사라진 후였다.

    모두가 그렇게 하루를 마감해 가고 있었다.

    다음날 두 사람이 다시 마을 어귀에 나갔을 때 그곳에는 나무 밑동을 잘라 만든 의자가 있었다.

    의자라고 하기도 뭣하고 그냥, 흙바닥에 앉지는 말라는 뜻으로 놓은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은 나란히 그 위에 앉아서 아진과 린린을 기다렸다.

    “조금 큰 나무로 만들지. 내 엉덩이는 옆으로 다 나온다.”

    북리의천이 말하자 소청이 깜짝 놀라더니 정말 그렇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는 자리가 남아서 정말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양쪽으로 다 이렇게 남거든요.”

    소청은 굳이 손바닥을 엉덩이 옆에 내려놓으면서 확인을 시켜주었고 북리의천은 자기도 엉덩이가 큰 편은 아니라며 열심히 항변을 했다

    “이걸 만든 형들은 제가 앉을 것만 생각했나 봐요.”

    “그런 것 같기는 하다만 소청아. 그렇게 말을 하면 나는 서운하단다.”

    “아아……! 사조님. 저는 그동안 왜 그렇게 제가 깨달음이 느린지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지 못한 게 정말 많네요.”

    북리의천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도록 크게 웃고서 북리의천이 말했다.

    “그래. 소청아. 네 말이 맞다. 그런데 지금도 이렇게 훌륭하니 나중에는 더 대단해지겠지. 그때는 네가 검신의 사손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 내가 너의 사조라고 불리게 되겠지.”

    소청은 그 말이 놀라운 듯 북리의천을 바라보았다.

    상처가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며 태양이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일 때까지 아진을 기다렸다.

    “수련 안 해서 좋다고 생각하겠구나. 소청아.”

    “아니에요. 사조님. 몸으로는 안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계속하고 있어요. 그런데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하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사조님!”

    소청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아진이구나. 내 제자가 오고 있다.”

    북리의천은 신이 나서 당장 소청을 안고 경공을 펼쳤다.

    만만치 않은 속도로 경공을 펼치며 오고 있던 사람들은 북리의천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마두들이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나 중원에 나타나면 그 파급효가 얼마나 대단할지 알고 있어서 아진과 린린은 다른 이들과 속도를 맞춰서 함께 오고 있었다.

    역천마의는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속도도 느려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린린은 다른 건 몰라도 경공은 미리미리 수련해 놓으라고 자기가 몇 번을 말 했냐고 하면서 역천마의의 양심을 계속 자극했고 역천마의는 새로 정착하는 곳에서 경공 먼저 수련을 하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다른 건 다 잘 한 것 같은데 잘못한 한 가지를 콕 집어서 두고두고 야단을 치니 제대로 감정이 상했던 것이다.

    “스승니이이임!”

    소청이 멀리서부터 부르며 달려오는 것을 보고 아진은 이제 역천마의도 잘 따라오겠지 하며 신형이 보이지도 않게 빠르게 달렸다.

    “스승님!”

    소청은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했고 그것은 아진도 마찬가지였다.

    “다녀왔습니다. 스승님. 그런데 어떻게 알고 나와계셨습니까?”

    “어떻게 알긴. 네 제자가 항상 마을 어귀에 나와서 기다리는 바람에 나도 그 옆에 앉아서 말벗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중요한 얘기도 많이 나눴단다.”

    북리의천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 경비 무사들과 역천마의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아무리 마기를 숨기려 한다고 해도 북리의천과 같은 고수에게 완전히 숨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천마의와 비고를 지키던 경비 무사들입니다. 스승님.”

    아진은 그들에게 북리의천과 소청을 소개해 주었고 그들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인사를 나눴다.

    북리의천은 천마신교에 가서 영약이나 훔쳐올 줄 알았지 대마두들을 이렇게 주렁주렁 달고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진을 바라보았다.

    이 일의 파급효에 대해서는 너도 알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네가 생각 없이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진아.”

    “비고에 들어갔는데 빠져나올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스승님. 영약이 있던 비고는 그 자체로 거대한 생명체 같은 곳이었는데 저희가 비고로 들어가고 교주가 비고에 와서 급히 도망쳐야 했습니다. 비고의 사념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그 사실을 모르고 한바탕 싸움을 벌여야 했을 거예요.”

    아진이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말해 주었지만 북리의천은 여전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대마두가 산본의가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무림맹은 정의맹을 공격할 테고 정의맹은 급격히 명분을 잃은 채 흔들리게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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