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188화
비고의 존재는 고개를 돌려 아진을 찾으려 했다.
위로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아진은 땅속으로 들어가 비고의 존재를 낚아채 끌어들였다.
엄청난 괴력에 비고의 존재는 그대로 끌려들어 갔다.
린린이 달려와 아진의 손을 잡아 꺼내주고 바닥을 다졌다.
강기로 덧씌운 발로 비고의 존재를 밟자 몸통이 땅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머리는 남겨.”
아진이 말하자 린린은 그의 계획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은 놈의 머리를 붙잡고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동안은 다른 사람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 사용한 마나였지만 그때 의도한 것은 완전히 달랐다.
금강불괴의 몸.
그 몸을 직접 공략하는 것은 포기하는 대신 그 안을 진탕시키기로 마음먹은 아진은 마나를 힘껏 불어넣었다.
마나가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해일이 덮치듯 기혈마다 자리하고 있던 내공이 몸부림을 쳤다.
영약을 섭취했을 때 일어나곤 하던 일이 그의 몸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린린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동안 할 말을 완전히 잃고 아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냐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아진은 눈을 감고 있어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다.
마나를 불어넣은 그 순간부터 아진 자신도 큰 위험에 몸을 내맡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린린은 역천마의와 경비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는 외부의 공격을 모두 자기들이 막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래야 했다.
아진은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챘다.
린린이라면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린 순간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진의 몸에서 흘러 들어간 마나는 비고의 존재에게 불순한 기운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의 마기는 몸부림을 치며 마나에 저항했지만 그것들은 아진의 마나에 떠밀렸다.
마기를 흩으며 마나는 계속해서 안으로,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으으으으으!!”
비고의 존재가 몸부림을 쳤다.
추살조처럼 마기를 쫓아간 아진의 마나는 기의 폭주를 불러왔고 비고의 존재는 기혈에서 마기의 역류를 느끼며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죽음을 넘어서 더 이상 고통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이제껏 경험해 볼 일이 없었던 것일 뿐 사실과 달랐다.
마기의 폭주를 통제하는 것은 이미 포기하고 비고의 존재는 계속해서 몸을 떨었다.
아진은 서서히 마나를 회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폭발을 준비한 채 그곳에서 빠져나오려 했던 것이다.
마기를 쫓던 마나는 단전으로 향했다.
단전에 쌓인 마기와 각각의 혈에 흩어져 있던 마기들이 폭주와 역류를 일으켰고 그 결과, 비고의 존재는 전신 모공에서 진기가 섞인 피를 토해냈다.
아진은 이미 마나를 회수한 후였다.
경비 무사들과 역천마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에 할 말을 잃은 채 비고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린린 역시 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 그 말을 간신히 해 놓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진이 아니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점점 더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내공의 양은 자기가 비고의 존재보다 더 많을 것 같기는 했지만 남의 몸에 진기를 불어 넣어서 상대를 주화입마에 빠뜨리고 자신은 아무 피해 없이 유유히 빠져나오는 것은 아무리 린린이라고 해도 자신이 없었다.
경비 무사들과 역천마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진의 마나가 어떤 식으로 남의 몸속을 돌았는지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지만 일어난 일을 보며 그가 강제로 주화입마를 일으킨 거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저는…… 그냥은 시도하지 않을 겁니다.”
누가 물은 것도 아니었는데 적의의 경비 무사가 말했고 다른 경비 무사들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자기들에게 그런 걸 시키지는 말아 달라는 것 같았다.
역천마의는 아진에게 엄청난 호기심을 느꼈다.
혈맥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속속들이 꿰고 있으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존의 오라버니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호감은 이제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었다.
아진이 역천마의에게 갑자기 엄청나게 대단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배우고 싶다.’
역천마의는 남몰래 그런 마음까지 가졌다.
무공 제자로는 소청이라는 아이가 있지만 의술로는 따로 제자를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으니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역천마의는 꿈을 키워갔다.
* * *
시간은 많지 않았다.
지금쯤 비고 앞에 있던 경비 무사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상시라면 그 사실이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단리세가의 무인들처럼 예고 없이 그곳을 찾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서였다.
그 외에도 비고에 용무를 갖고 정당한 권한을 가진 채 비고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었다.
그들이 전부 들이닥친다고 걱정이 될 건 아니겠지만 아직은 남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안으로 가 보고 싶은 게 아진의 마음이었다.
“가져갈 수 있는 건 양껏 가져가자.”
린린은 아직도 영약이 보이지 않고 비고만 끝도 없이 펼쳐지는 것을 보며 지치는 듯이 말했다.
“저는 뭘 가져갈 건지 다 정해 놨어요. 같이 찾아 주셔야 해요. 지존.”
“귀찮아. 네가 찾아. 역천마의가 쓸 거잖아.”
역천마의는 미인계를 쓸 때가 됐다고 생각한 듯 아진을 돌아보았다.
“앞에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 수 없어서 경공을 쓰지 못한다는 게 안타깝군.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건가 봐.”
아진은 전혀 고의가 없이 다른 이야기를 했고 역천마의는 풀이 죽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서두르긴 서둘러야 할 것 같아.”
아진이 말하자 린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고 안이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기는 한데 빨리 가는 게 좋기는 할 거야.”
“그럼 내가 먼저 가 볼게.”
아진이 말하고 경비 무사들을 보았다.
“안에 있기는 한 거죠?”
“예. 소협. 원래 정당한 방법으로 들어오면 이 길 자체도 단축됩니다. 반 각도 안 가서 영약들이 있는 곳이 보입니다.”
아진은 비고라는 곳이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공을 펼치는 아진의 뒤로 흑주가 따라붙었다.
‘태양을 보고 싶어. 정작 태양 아래에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아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흑주가 아진을 따라가 버리고 남은 사람들은 흑암에 잠겨 버렸다.
“오라버니. 흑주는 보내 주면 안 돼?”
비고 뒤에서 린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진은 흑주를 설득할 수 없었다.
흑주가 아진보다도 더 앞서 날아갔던 것이다.
린린은 아진에게서 답이 없는 걸 알고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아차렸다.
“그래도 앞은 보이지? 우리도 가자.”
린린은 간단히 포기하고 말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성질이 급해져서 경공을 펼쳤고 다른 이들도 린린을 따랐다.
* * *
태양도 없고 바람이 불 일도 없었다.
그러던 곳에서 서서히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비고는 그 자체가 거대한 생명체 같았고 그 안에 있는 비고의 존재들은 비고의 조종을 받았다.
비고는 비고의 존재가 죽은 것을 알고 계획을 바꿨다.
하나씩 내세워 쓰러지게 하기보다는 한꺼번에 나가서 막게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비고는 모르고 있었다.
비고의 존재들은 모든 감정을 함께 나눴고 감정이 복잡하지 않은 그들은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공유할 감정조차 없었다.
그러던 그들에게 그날 하나의 강렬한 감정이 전파되었다.
그것은 극한의 두려움이었다.
대법을 받으며 생을 마감하고 생과 사, 그 중간쯤에 존재하던 그들은 자기들이 다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될 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소름 끼치는 감정은 다시 느끼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이제껏 경험했던 어떤 것보다도 더 강렬했다.
이백여든아홉.
비고에 존재하는 수호자들의 숫자였다.
그 모든 이들이 감정에 전율했다.
오랫동안 감정의 진공 상태에 빠져 있던 그들은 두려움을 기점으로 서서히 다른 감정들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을 깨운 공포가 워낙 거대해서 그때부터 감정이 폭주하고 그것들이 공유되었다.
-온다.
-다가오고 있어.
-가까워져.
아진은 그들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느꼈던 기운과는 조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저는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죽은 후에도 신교를 위해서 신교를 지키기로 하고 영면을 포기한 여러분을 깊이 존경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제 필요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죄송하게도 여러분을 죽여야 합니다.”
아진은 걸으면서 말했다.
차라리 이럴 때는 혼자 걷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여러분이라면 저희가 여기에서 영약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신교에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아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저와 같이 들어온 아이는 지금 겉모습이 저렇게 바뀌어서 그렇지 사실은 패월악이라는 교주였습니다.”
패월악이라는 이름에 비고의 존재들이 반응을 나타냈다.
비고의 존재 중에는 패월악을 아는 이도 있었다.
-지존이 돌아오셨다고?
-그분이 지존이시라고?
역천마의가 모르고 있었을 뿐 패월악의 시대에도 대법은 여전히 존재했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수호자들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마신에게 서원한 이들에게 찾아가 대법을 받겠는지 묻고 대법을 시행한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역천마의도, 패월악도 알지 못했다.
수호자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저희는 사도련주를 쫓고 있습니다. 그놈은 충독이라는 것을 만들어 세상을 혼돈에 빠뜨립니다. 몇 번 사도련주를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습니다. 운도 좋았고 기회도 좋았는데 놓쳤다는 건 제가 부족해서일 겁니다. 사도련주 때문에 사고님을 잃었고 제 제자는 몸에 벌레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어느 날 벌레에 잠식당해서 저를 죽이게 될까 봐 몇 번이나 스스로 죽으려 했지요.”
처음에는 일단 대화를 시도해 보기는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얘기였는데 갈수록 진지해졌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진은 자신의 마음도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았다.
사고가 그리웠다.
자신의 제자가 되라고 말하던 독고소영.
“그분은 제 수신호위가 되겠다고 하셨었어요.”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며 아진이 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분을 잃은 게 속상하고 제 제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저를 위해서 행동하고 싸웁니다. 제가 원하는 걸 이루려고 강해졌어요. 저는 충분히 강합니다. 그래도 여러분을 죽이면서까지 영약을 가져가고 싶지는 않아요. 어쩔 수 없다면 그렇게 하기는 해야겠지만요.”
그들 역시 아진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고의 존재들이 귀를 기울이는 동안 비고 역시 그랬다.
비고의 사념이 아진에게 전해진 것은 뜻밖이었다.
-이곳을 해치지 마라. 꼭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나가는 것은 허락하겠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지는 마라.
아진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비고의 존재들은 비고가 아진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소리도 내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