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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87화 (187/470)
  • 제187화

    187화

    린린조차도 무슨 말이냐는 듯이 아진을 보았고 비고 안의 존재가 더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한동안 그 기척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린린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비고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아진이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느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진이 자기보다 더 낫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차이가 크지는 않다고 생각하던 린린은 그 순간 충격을 받았다.

    아진은 다가오는 존재가 절대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천마의. 너는 대법을 알고 있지?”

    린린이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역천마의는 고개를 저었다.

    “비고의 존재를 만든 대법은 저희에게도 비밀이었어요. 궁금해서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미 폐기되어 있었고 아는 사람은 남아 있지도 않았고요.”

    린린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역천마의도 좋은 답을 해 줄 수 없어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처음에 아진은 린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검을 들고 눈앞의 존재를 향해 다가갔다.

    신교를 지키는 자들.

    죽음을 거부하고 대법의 실험체로 자신을 내맡기며 끝까지 신교를 지키기로 한 사람이었다.

    그 의지와 신념의 크기가 더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서도진이라 합니다. 함부로 들어와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지고 나갈 것이 있습니다. 꼭 필요해서 그런 것이니 부디 지나갈 수 있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막으신다고 해도 지나갈 수밖에 없고 그때는 아마도 영면에 드시게 될 것입니다.”

    아진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상대의 기세를 보고 느꼈다.

    절대로 봐 주면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목숨을 바쳐서 싸운다면 아진의 안전 역시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진도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말을 하고 아진이 린린을 보자 린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 뜻에 따르겠다는 것 같았다.

    아진도 처음부터 생각한 것이 있기는 했다.

    사도련주와 비슷할 정도로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상대한다면 갑자기 놀라는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사도련주보다 더 강하다고 해도 해치워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지.’

    아진이 비고의 존재를 향해 몸을 쏘았을 때 비고의 존재는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바닥을 차고 허공으로 뛰어오른 그는 공중에서 몸을 틀어 그대로 검을 앞으로 향하고 아진을 향해 무섭게 날아왔다.

    아진은 그 빠른 속도에 놀랐지만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진의 신형이 사라졌지만 비고의 존재는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인물.

    그런 것 하나하나에 놀라지도 않은 채 곧바로 아진을 쫓아왔다.

    ‘내공의 한계가 없는 건가?’

    린린에게 묻고 싶었지만 린린도 자세한 것은 모를 수도 있을 듯했다.

    그리고 답이 어떻더라도 싸워야 하는 거였고 그럴 때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채 버텨 나가면 되는 거였다.

    “오라버니!”

    비고의 존재를 놓친 것은 한순간이었다.

    자기가 그를 놓쳤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놓쳤고 그를 찾지 못한 채 뜨거운 통증을 느꼈다.

    “오라버니!”

    린린이 어느새 달려와 검을 휘둘러 아진을 도우려 했지만 아진의 머리에서 뇌수가 튀어 버린 후였다.

    아진은 기가 막혀서 웃었다.

    그런 일을 마지막으로 경험한 게 언제였던가.

    ‘아니. 경험을 해 본 적이 있기는 했던가?’

    아진이 채 손을 쓸 틈도 없이 역천마의가 먼저 달려왔다.

    그녀는 그가 힐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린린이 아진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들어대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치료하는 능력까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역천마의는 아진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고 경비 무사 한 사람이 그들을 지켰다.

    나머지 세 사람은 린린을 도와 비고의 존재와 싸웠는데 역천마의는 수십 개의 금침이 담긴 통을 꺼내 아진의 머리에 꽂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천마의는 듣지 않고 자신의 대법을 시행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린린이 소리쳐 막지 않았으면 역천마의는 대법을 시행했을 것이다.

    아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기력과 내공을 소진한다고 해도 얼마쯤 지나면 역천마의도 다시 힘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역천마의. 오라버니는 스스로 고칠 수 있다. 네 생명을 내놓고 하는 대법은 하지 마.”

    린린의 말에 아진은 깜짝 놀라서 역천마의를 보았다.

    “생명을 내놓는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역천마의는 아진이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말에 더 놀란 것 같았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역천마의는 아진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는 손을 대는 동작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라는 것을 아진은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마나가 폭주하듯 머리 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살이…… 새로 돋아나고 있어요.”

    역천마의가 감탄하고 있을 때 린린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오라버니. 어지간히 고쳤으면 빨리 와. 이 영감탱이 정말 괴물이 돼 버렸어!”

    아진은 린린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일어섰다.

    “야, 인마. 그러고도 네가 천마야?”

    “아니. 맞긴 맞는데 몸뚱어리가 이렇잖아. 왕년의 기량을 다 발휘할 수 없는 걸 어떡해? 그리고 저 영감탱이가 문제야. 진짜 괴물이라고.”

    린린은 아진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다 됐어?”

    아진은 자신의 상황을 알지 못해서 린린에게 물었다.

    “계속 치료가 되는 중인가 봐. 머리가 붙고 있어.”

    “너는 반성해. 고작 일 각을 못 버텨서 오라버니가 치료받는 시간도 못 기다리고 부르냐?”

    “그러게 말이야. 나 같은 건 죽어 버려야 하는 건데 그냥.”

    린린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경비 무사들은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다.

    비고의 존재가 검으로 황의의 경비 무사를 내리치려 했고 아진은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려 비고의 존재를 발로 차 냈다.

    쾅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벽에 날아가 박히는 순간 아진은 생각이 따라올 틈도 없이 몸을 날렸다.

    한 번의 공격이 성공했다고 안심하기는 일렀기에 그는 강기로 덧씌운 검을 휘둘렀다.

    검이 상대의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튕겨 나왔다.

    ‘젠장!’

    호신강기였다.

    필요한 순간마다 내공을 움직여 신체 일부분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상시로 금강불괴가 된 것 같았다.

    ‘안 좋게 생각할 것 없어. 어차피 사도련주와 싸우려고 해도 이 문제는 극복해야 하는 거니까. 지금은 함께 싸울 사람들도 있고.’

    아진은 이번에야말로 해법을 찾겠다고 생각했다.

    경비 무사들도 잇따라 병장기를 휘둘렀지만 그들 역시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아진은 그나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이라도 하고 팔을 보호한 채로 공격을 했는데 그런 것도 없이 공격을 한 사람 중 둘은 팔뼈가 가루가 될 정도로 부서져 버렸고 다른 이들도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 자리에 역천마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을 고쳐주려고 했는데 역천마의가 한발 빠르게 다가왔다.

    “제가 치료하겠습니다.”

    아진이 바라보자 역천마의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를 고치는 것으로는 제 생명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저도 제 생명이 중요한 건 알고 있습니다. 소협.”

    아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 눈으로 린린을 찾았다.

    린린은 곧바로 공격에 가담하기보다는 공략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린린은 비고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아진은 린린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알지 못했지만 린린이 공략법을 알아낼 때까지 버티고 있기만 하면 될 것 같아서 희망을 품기로 했다.

    던전과 같은 비고.

    괴물 같은 비고의 존재.

    전에도 그의 곁에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도진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곁에서 같이 괴수를 노리는 이들을 보면서도 그들을 자신의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수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도 같았다.

    그의 동료들은 그보다 훨씬 약했고 별 것 아닌 공격을 당하고도 퍽 퍽 나가떨어졌다.

    싸움을 하기에는 SSS급 헌터였던 그때가 훨씬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진은 웃고 있었다.

    ‘쓰러지면 내가 일으켜 주면 되니까.’

    힘들게 가더라도, 넘어지고 구르면서 가더라도 함께 가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고 있었다.

    답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는데도 자꾸만 웃음이 지어졌다.

    비고의 존재는 다시 반듯하게 일어섰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솟구쳤다.

    정확히 아진을 노리고 자신의 몸을 무기로 삼아 아진을 부숴 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흑주가 튀어나와 비고의 존재에게 날아가 그의 머리에 몸을 부딪쳤다.

    비고의 존재는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받았지만 놀라는 표정도, 당황하는 것도 없었다.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적의 수가 하나 더 많은가 보다는, 그냥 딱 그 정도의 반응이 다였다.

    “흑주. 괜찮다. 린린에게 가 있어. 너 자신을 아껴.”

    아진은 이미 흑주의 죽음을 본 적이 있었다.

    이번에 흑주가 나선 것도 아진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흑주는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린린에게로 쏙 돌아갔다.

    비고의 존재가 빠르면 그놈보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면 된다.

    공격을 일일이 다 받아 내려고 하지 않고 몸을 틀어 피하고 흘리면 된다.

    말이 쉽지,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주의를 요하고 얼마나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꼭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비고의 존재를 처리하는 것이 아진에게는 그런 문제였다.

    빠르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아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몇 번이나 비고의 존재가 가해 오는 공격에 당했다.

    ‘보는 걸 포기하자. 보고 나서 반응하면 이미 늦어.’

    아진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자기에게 주어졌던 많은 감각이 그에게 도움이 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오해하게 하고 속이는 것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눈을 감아 버리자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졌다.

    듣는 것도 포기하고 기감을 열자 비고의 존재가 움직이는 순간이 포착되었다.

    방향과 속도.

    퍼부으려는 힘의 크기.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그에게 그려지고 감지되었다.

    아진은 처음보다 늦게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소협!”

    역천마의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진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비 무사들도 기겁을 한 채 몸을 날렸다.

    아진이 바란 것은 그게 아니었지만 그 후의 일을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그러면 그 후의 상황에 대비하면 될 일이었다.

    경비 무사들이 다치겠지만 지금은 각자를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경비 무사들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것은 자기들이 다쳐도 남은 사람들이 그 뒤를 책임져 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일 것이다.

    아진은 역천마의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린린을.

    아진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못 박혀 있는 동안 비고의 존재는 한 발 앞까지 다가왔고 경비 무사들이 몸을 던졌다.

    허공으로 피 분수가 치솟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경비 무사들의 것이었다.

    두 사람이 쓰러졌고 길이 열렸다.

    비고의 존재는 감격 같은 것도 없이 아진을 노렸다.

    그 순간 아진의 신형이 벼락같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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