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186화 (186/470)

제186화

186화

아진은 역천마의가 그때까지 제대로 실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천마의의 신형이 화살처럼 날아가 기관장치 앞에 당도했다.

기관장치에서는 아직도 한 무더기의 화살과 암기들이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역천마의는 그것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호신강기를 두른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더니 주먹으로 기관장치가 들어 있는 벽을 박살내 버렸다.

린린이 그 모습을 힐끔 보고 웃음을 지었다.

역천마의도 그 모습을 보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폐에서부터 나오는 것 같은 시원하고 청량한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본 경비 무사들도 더욱 힘을 냈다.

교주가 옆에 있는 한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했다.

자라서 교주의 곁에서 교주의 수신호위가 되고 싶다던 간절한 바람을 결코 이루지 못하게 되는 줄 알고 절망했던 순간이 떠오르며 그들은 감격에 겨워했다.

다시는 가질 수 없을 것 같던 시간을 다시 갖게 된 탓이었다.

거침없는 파공성은 그들의 신형에서 나고 있었다.

그렇게 쭉쭉 비고의 안으로 들어갔다.

‘비고가 도대체 얼마나 깊기에?’

아진은 어느덧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관장치를 부숴가면서 나아온 거리만 해도 족히 삼 리는 돼 보였던 것이다.

그가 생각한 비고는 아주 커다란 약재 창고 같은 거였다.

그래서 지금의 이 상황이 그에게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금쯤이면 영약이 보여야 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린린이 그에게 말했다.

“이곳의 끝에는 나도 가 본 적이 없어. 허락받은 사람도 끝까지 가 볼 수는 없었거든. 사막 같은 길도 오래 이어져. 그리고 다시 영약이 나오다가 그런 길이 또 나와. 대부분은 그 전에 포기하고 돌아가지. 비고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찾는 게 정해져 있으니까 그것만 가지고 돌아가는 거야.”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떤 결말이 준비되어 있을지는 아진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하며 아진이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자 흑의의 경비 무사가 말했다.

“비고에는 술법이 걸려 있습니다. 비고 자체가 살아 있는 공간이지요. 그래서 얼마든지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비고 안에서 백 리 길을 걸었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닐 겁니다.”

그 말을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아진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너무 크게 넘어서 버려서 그랬을 것이다.

린린은 아진을 보고 웃었다.

이곳에 있는 한 아마 그런 혼란은 계속 느끼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암기도, 화살과 창도 날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어진 공격은 독이었다.

역천마의는 아무렇지 않게 팔찌를 꺼냈다.

“피독의 효과가 있는 광물로 만든 거예요. 거기에 제 내력을 때려 박아서 웬만한 신물만큼이나 효과가 있을 거예요. 이건 두 개밖에 없어서 아마 이 구간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은 돌아가는 게 나을 거예요. 여기에서 퍼진 독이 지금부터는 입구 쪽으로 이동해 나갈 테니까요.”

역천마의가 말하며 먼저 린린을 바라보았다.

“나는 필요 없어.”

그러자 이번에는 아진을 보았고 아진 역시 웃으면서 자기도 괜찮다고 말했다.

남은 사람들은 네 명의 경비 무사들이었는데 그들은 간절히 린린을 호위하고 싶어 했기에 그것을 자기들이 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누구에게 줄지 역천마의가 결정을 하기도 전에 아진이 불길을 일으켰다.

“독이 불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린린을 바라보았다.

“검막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보호해. 독을 한꺼번에 없애자.”

그리고 거의 동시에 불길을 독이 있는 쪽으로 날렸다.

기관장치가 부서져 나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센 폭발이 연이어 일어나며 사방에서 독진이 쾅쾅 터졌다.

천장과 벽 할 것 없이 모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폭음이었는데 그런 충격에도 비고가 끄떡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합니까?”

경비 무사들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 광경을 보았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괴물의 실체가 때로는 그냥 박쥐 한 마리일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는 실제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보다 더 크게 겁에 질리기도 하죠. 독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독도 여러 가지에 약하고 우리는 그 독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면 됩니다.”

추가로 다른 것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역천마의는 장력을 방출해 불길이 더욱 번지게 했다.

쿠콰콰쾅-!

독연이 얼마나 깊이 깔려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안쪽으로 불길이 번질수록 폭발은 더욱 커졌다.

그 거리를 견디고 온 이들이라면 더 강한 독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빼꼼 고개를 내민 흑주가 바깥의 상황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흑주가 독을 견딜 수 있을까 했지만 이미 한 차례 불타고 남은 독기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견딜만하기는 한 것 같았다.

겨우 견딜 수 있는 것을 뭐 하러 저러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흑주는 린린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아. 내가 이 녀석 얘기를 했나?”

린린은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계속 흑주의 이야기를 했다.

역천마의와 경비 무사들은 흑주가 린린을 살려 주었다는 얘기를 듣고 흑주를 예뻐했다.

그 흑주와 이 흑주가 다르기는 한데 이 흑주에 그 흑주가 조금 들어가 있기도 하고 어차피 마음은 서로 통하는 것 같다는 말에 역천마의가 신기해했다.

“지존. 많이 변하셨군요. 그런데 저는 정말 좋아요. 지존의 곁에 그런 존재들이 생겨났다는 게요. 지존의 오라버니도 그렇고요.”

“아아.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를 정말 걱정하고 아껴 주는 사람들이 산본의가에는 득실득실하거든. 오라버니는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그러면서도 린린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는 것을 보며 이 자리의 사람들은 린린이 아진을 얼마나 의지하고 좋아하는지 느꼈다.

“아 참. 오라버니가 역천마의는 싫대. 할머니는 싫다면서 역천마의한테 손녀가 있으면 소개받고 싶대.”

“……!”

아진은 린린이 폭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득츠르. 른른!”

이를 꽉 깨물고 아진이 말했지만 린린은 아진이 당황한 모습을 보는 게 마냥 즐거운 듯했다.

역천마의는 화들짝 놀라는 듯했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어머. 실망이에요. 그런데 저는 늙지 않는다고요.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손녀는커녕 딸도 아직 없고요. 지금껏 저 싫다는 남자들은 본 적이 없는데 저를 보고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신가요. 소협?”

역천마의가 자신 있게 묻자 그때까지 조용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던 네 명의 경비 무사들이 거의 동시에 손을 들었다.

“저는 싫습니다.”

“저도요. 역천마의님. 그건 역천마의님의 오해인 것 같고 저는 그런 오해는 옆에서 바로잡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임자가 있습니다. 아들이랑 딸도 있고요.”

“저는 지금껏 여자를 만나본 적도 없고 좋아해 본 적도 없지만 역천마의님은 싫습니다.”

역천마의는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가 누더기가 되었다.

린린은 배를 움켜쥐고 웃어대다가 역천마의의 어깨에 손을 탁 걸치고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역천마의. 참아. 저런 인간들도 있는 거지. 저런 인간들에게 단련되고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세상을 사는 게 정말 쉬울 거야. 정말 엄청나게 쉬울 거야.”

역천마의는 그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본인이 직접 대답을 해 보라는 듯이 아진을 보았다.

아진은 역천마의를 한 번 힐끔 보았다가 앞으로 빠르게 걸어나갔다.

속으로 역천마의에 대해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역천마의를 봤을 때 든 기분은 예쁘게 생겼네, 하는 정도였지 그 이상의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천하의 벽예월을 매일 봐서 그런 건지 이제 어지간한 미인을 본다고 해도 심장이 통증을 느끼는 정도의 충격은 받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벽예월을 봤을 때도 심장이 아프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린린을 바로 알아봐 준 게 고맙기는 했지만 혈천방이나 비룡채 사람들, 그리고 천이재에게 느끼는 호감 정도인 거지 역천마의와 뭔가 대단한 서사를 쌓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진이 갑자기 말하자 역천마의는 자기 얘기를 하려는 건 줄 알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아진은 그대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린린에게만 전음을 보냈다.

-린린. 여기 말이야. 던전 같이 생겼다.

-아아. 오라버니가 살았다는 그곳?

-응.

-신기하네.

안에서 영수가 튀어나온다면 정말 비슷하겠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걸음을 내디뎠고 그때마다 흑주가 조금 앞서서 가며 불을 밝혔다.

“그런데 저건 야명주 같네요. 지존.”

적의의 경비 무사가 말하자 린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본가가 어려울 때 흑주를 가지고 사기를 칠 계획도 세웠었어. 야명주라고 팔고 돈을 챙기려고.”

“좋은 생각 같은데 왜 안 하셨어요?”

할 이야기는 끝이 없었고 아진은 역천마의에 대한 얘기가 그대로 지나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진은 공기 중에 아직 독기가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바람을 일으켜 밀어낼까 했는데 그것을 의식하고 숨을 들이쉬었을 때 공기 중에 남은 독기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흑주가 더 밝아졌네요. 지존.”

경비 무사가 말해서 보니 그 말대로 흑주가 더 환하게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흑주가 독기를 흡수한 건가?’

아진이 생각하며 손을 뻗자 흑주가 냉큼 날아와 아진에게 안겼다.

“아무거나 흡수하지마. 네가 흡수한 게 나한테도 들어올 텐데.”

그 말을 하고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흑주는 가리지 않고 진기를 흡수했고 그렇게 흡수한 진기 중에는 정순하지 않은 갖가지 내공이 뒤섞여 있었는데 지금껏 그런 문제를 느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신기하네. 흑주가 한 번 거르고 보내주는 건가?’

그러면서 아진은 흑주를 바라보았다.

흑주가 독기를 흡수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독기를 자기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어쩌면 독공으로 대성하는 것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괜찮냐?”

흑주를 쓰다듬으면서 묻자 흑주가 자신만만하게 빛을 반짝거렸다.

“그래. 괜찮으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힘들면 돌아오고.”

역천마의와 경비 무사들은 아진이 흑주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다.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고 여겼던 것이다.

린린은 다시 ‘내가 그 얘기했던가?’로 시작해서 소청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경비 무사들은 지금껏 린린이 무슨 이야기를 해 주기만 하면 감격하고 열광하던 것과 달리 소청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대번에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소청이 린린의 호위무사가 될 거라는 말 때문이었다.

자기들도 누구 못지않게 그러기를 바랐지만 오랫동안 이룰 수 없었던 꿈을 소청은 착실히 이루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것 같았는데, 소청이 사도련주가 만든 충독의 벌레 때문에 지금 힘든 상태라는 것을 알고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런데 그 어린 녀석이 그 고통을 이기고 버텨 내더라고? 죽으려고도 많이 했어. 자기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버티고 있지. 대단한 녀석이야. 나중에 소개해 줄게.”

린린은 말을 하면서 자랑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고 아진은 린린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돼서 좋았다.

“이제 나타나려나 본데?”

기척을 가장 먼저 느낀 사람은 아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