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181화 (181/470)

제181화

181화

그에게 신교는 그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세계일 뿐이었고 그는 천마신교의 교주가 되었다.

마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천마신교를 인정하고 끌어나가며 그곳의 수장이 되었다.

‘교주가 뭔데?’

역천마의는 끝도 없이 반역을 일으켰고 그는 재미있다는 듯 역천마의를 죽이고 또 살려냈다.

천마비동에서 우연히 얻은 무공비급으로 생과 사까지도 손 안에서 주무를 수 있어서 저 자신이 신과 같이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마신을 마음에서 버렸는지도 모른다.

천마를 지키는 무력부대 섬마대의 대주, 단리서언.

천마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무위를 자랑한다던 그였다.

동서고금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던 패월악이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순탄하게 천마의 자리에 올랐을 사람.

그러나 패월악이 천마가 되었고 그는 천마의 호위를 맡았다.

역천마의는 지금도 천마를 죽인 사람이 단리서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가 가져야 했던 자리를 뺏은 불세출의 천재에 대한 열등감으로 천마 패월악을 죽인 인간.

‘너는 반드시, 내가 죽인다!’

역천마의는 단리서언을 노려보았다.

“또. 또 나쁜 생각 하네.”

단리서언이 역천마의를 보고 방긋 웃었다.

역천마의가 저 얼굴을 찢어 버릴 수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한 참에 단리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정말 역천마의는 구제불능이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죽는 순간의 고통을 갖가지 방법으로 육십 번이 넘게 겪어 봤으면 이제 좀 고분고분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염병.’

그 생각 역시 알아차린 단리서언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너처럼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을 패월악은 왜 그렇게 믿었을까. 그러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버렸겠지만. 그 인간이 뭘 하다 죽었는지 그건 정말 궁금한데. 너는 안 궁금해? 패월악이 죽은 이유를 아는 놈이 있으면 섭혼대법으로 네가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아쉽지?”

“시간이 늦었습니다. 돌아갔으면 합니다.”

“돌아가서 또 나를 저주하는 저주술을 만들려고? 그러면 안 되지.”

“그냥 자겠습니다.”

“그냥 잘 거면 여기에서 자면 되겠군.”

단리서언이 손을 들었다.

가공할 만한 수준의 허공섭물을 전개하려는 듯했지만 역천마의가 먼저 허공섭물의 구결을 외우고 발동을 금하자 이루어지지 않았다.

먼저 구결을 외워 무공의 발동을 금하는 것은 천마 패월악이 죽고 나서 너무 상심이 커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을 때 매달렸던 일이었다.

그게 됐을 때는 저도 모르게 좋아 방방 뛰면서 패월악을 찾았다.

‘천마님!’이라고 외치면서.

새로운 대법을 만들 때 자랑을 하면 그때마다 천마는 귀찮아 죽겠는데 너 혼자 좋아하면 안 되겠냐는 표정을 짓곤 했다.

심심하면 이것들을 보면서 혼자 놀라고 패월악이 수많은 무공비급을 훔쳐다 줘서 역천마의는 갖가지 상승무공의 구결도 전부 외우고 있었다.

패월악은 자기를 귀찮게 하는 건 싫어하면서 남을 귀찮게 하는 데는 선수였고 구결을 외워야 할 일이 있으면 꼭 역천마의를 끌어다가 나중에 쓸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같이 외우자고 하던 사람이었다.

단리서언은 설마하니 역천마의가 구결을 무효화 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움찔했다.

역천마의는 저 인간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본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졌다.

“내달이면 제1 마후(魔后)가 죽은 지 1년이 된다. 초씨세가에서도 새 마후를 들이는 일에 더 이상은 반대를 할 수 없겠지. 그날이 되면 너를 마후로 들일 것이다.”

역천마의는 입을 다물었다.

꺼져 가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어 대화를 되살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였다.

최대한 단리서언의 신경을 긁지 않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으로 나왔다.

머릿속의 생각을 읽는 짜증 나는 능력 때문에 단리서언의 앞에서는 패월악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생각을 읽지 못하게 하려면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러려면 내공의 소모가 많았다.

그래도 구결을 무효화 할 때는 생각을 읽지 못하게 해야 했다.

단리서언이 자신을 죽였을 때, 역천마의는 구결을 무효화 하고 싶었지만 그 망할 놈의 구결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단리서언은 새로운 무공을 수도 없이 만들어 냈고 역천마의는 거기에 절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터덜터덜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마주친 사람들은 역천마의를 문제아 보듯이 바라보았다.

역천마의 때문에 속이 뒤집힌 천마가 다른 사람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냥 역천마의가 참으면 될 일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하는 인간들이 너무 웃겼다.

아니. 이 천마신교 최고의 마두 역천마의한테 희생을 하라니.

저것들이 미쳤나.

역천마의는 저를 바라보는 놈들을 하나씩 마주 쏘아보았고 역천마의가 신교의 기둥을 이루는 여러 종주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한 놈들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넌 그 얼굴이 문제야. 역천마의. 너무 순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오해하고 기대하게 된다니까? 역천마의에게 말해 보면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고 기대하게 되고. 사슴 같은 눈을 하고 있으니 제 아무리 화를 내 봤자라고.

-어떻게 하면 천마님 같은 눈을 가질 수 있어요?

-이거? 이건 타고나야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착하게 살면 역천마의도 다음 세상에서는 나 같은 눈을 갖고 태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왜 이렇게 천마님 생각이 나는 걸까.

‘서러워서 그러나?’

역천마의는 한숨을 푹 쉬고 처소로 돌아갔다.

벽에 숨어 있던 그림자를 향해 뇌기를 던지자 반응도 하지 못한 채 한 놈이 튀겨지는 것처럼 죽더니 천장에서 두 놈이 동시에 비수를 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다음은 바닥인가?’

역천마의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들 각자를 해치웠다.

-역천마의. 역천마의 때문에 우리 신교도 수가 너무 줄어들잖아. 자꾸 그렇게 죽이지 말고 반성을 하게 해 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팔을 얹고 사과를 베어 먹으며 놀리던 모습마저도 오늘은 너무나 선했다.

“이럴 게 아니다.”

역천마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마님 말씀대로 너희를 다 죽일 게 아니야. 그건 너무 아까워. 어차피 너희는 내 목숨을 노리고 들어왔으니까 내가 죽여도 되는 놈들이고 나한테는 너희 같은 실험체가 아주 필요하지.”

그녀는 그때부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자 기세도 달라졌다.

“아. 아니지. 그 실험은 꼭 산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역천마의는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파도가 밀리는 것처럼 바닥이 요동쳤고 그 아래에 숨어 있던 자객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시간이 얼마나 절묘했던지,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던 자의 공격을 그가 온몸으로 받아 냈다.

“저런. 적아의 구분도 없는 건가? 아니면 평소에 마음에 안 들었어?”

역천마의가 손을 휘젓자 갈라진 바닥이 암기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그것을 전력으로 날렸다.

“오늘은 좀 많네? 그래도 용하다. 싸우지 않고 오밀조밀 나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까 귀엽기도 하네.”

역천마의는 검좌대에 있는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이 날아온 곳은 역천마의의 손이 아니었다.

그대로 벽을 향해 날리자 그곳에 숨어 있던 사람이 울컥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검은 다시 역천마의의 손으로 들어왔고 그녀는 무시무시한 검강을 만들어 냈다.

‘천마님이 이걸 보셔야 하는데.’

-역천마의의 검강은 언제 역천마의의 키를 넘어서지? 역천마의의 검강은 참 겸손한 것 같아. 감히 주인을 넘어서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말을 들으면 기어이 검강을 그만큼 크게 만들어 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해냈다.

“오늘은 많아. 오늘은 많아.”

역천마의가 중얼거리며 곳곳에 검을 휘둘렀고 깜짝 놀란 듯이 제 입을 가렸다.

“그런데 내가 왜 자꾸 혼잣말하지? 천마님이 하던 행동인데. 노인네같이 혼자 중얼거리신다고 욕했는데 내가 이러고 있네?”

역천마의의 손에서 뇌기가 줄기줄기 만들어졌다.

방을 여기서 더 이상 부수지 않고 끝내려면 이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고도 방을 부수는 것은 면치 못했다.

도중에 성질이 나서 마구 휘둘러댄 탓이었다.

역천마의의 손에서 나온 뇌기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자들이 툭툭 떨어졌다.

“왜 먼저 공격하지 않은 거지? 공격하지 않고 보고만 있으라고 지시를 받은 건가? 하여간. 고지식하기는. 그래도 목숨이 소중한 건 알았어야지.”

이제야 겨우 잠잠해졌다고 생각하던 역천마의의 고개가 옆으로 조금 돌아갔다.

‘뭐야. 아직 더 있어?’

“하. 진짜 말 안 듣네. 여기가 맞다고! 그러니까 좀 닥쳐. 이 오라버니야!”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야. 그래도 여기는.”

소신껏 반항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는데 목소리를 들어서는 두 사람 모두 20대 안팎의 젊은 남녀 같았다.

창문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벽이 군데군데 터져나간 탓이었다.

그래서 그런 거였을까.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창을 넘어 들어온다는 인식이 없었던 것 같았다.

역천마의는 그들과 갑자기 마주쳤다.

“아. 아아…….”

눈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인세에서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남녀였다.

“…….”

여자에게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강대한 마기가 느껴졌고 남자에게서는 정파의 내공과 그것과 다른 희한한 기운이 전해졌다.

도대체 그들을 뭐라고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 갑자기 들어와서 미안합니다.”

여자는 전혀 안 미안한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네.”

역천마의는 느닷없이 침입한 자에게 왜 자기가 공손하게 대답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여기는…… 원래이래요? 부수고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었으면 지금 가죠? 아휴. 가루 떨어지는 거 봐. 여기서도 한바탕 했나 보네. 저…… 그런데 혹시 전부 죽은 게 아니면…….”

아진이 제대로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흑주가 린린의 품 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것 중에 먹을만한 게 없는지 찾고 다니는 땅거지처럼 자객들의 시신을 뒤지고 다녔다.

처음에는 마구 서두르면서 이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니 갈수록 흉포해졌다.

설마 이렇게 많이 쓰러져 있는데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는 않을 거라고 자기를 다독이는 것 같던 흑주는 점점 폭주하고 있었다.

“설마. 다 죽인 거야?”

린린은 어느덧 역천마의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는데 역천마의는 그게 이상하다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혹시 요즘에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전각을 치자. 흑주가 예민해지면 정말 골치 아파.”

린린이 역천마의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초씨세가하고는 아직도 사이 안 좋지? 아니면 단리서언을 죽이러 갈까?”

“……!”

역천마의는 눈앞의 여자를 보면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미친 사람은 단연 한 사람뿐이었다.

“교주…… 님?”

“거봐. 오라버니. 내가 그랬지? 역천마의는 나를 알아볼 거라고.”

“못 알아볼 거라고 말했다. 이 바보야.”

“아니야. 내가 여러 번 말을 바꾸기는 했는데 마지막에 말했을 때는 알아볼 거라고 했을걸?”

흑주는 그대로 아진의 가슴에 날아들었다.

그러면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냐는 듯이 속상해했다.

먹을 게 있을 줄 알고 기어 다녔는데 전부가 다 꽝이어서 어지간히 속이 상했던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