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180화
“이럴 줄 알았으면 빙소검후의 목에 현상금이라도 거는 건데 그랬어. 내가 직접 딸 걸 그랬나?”
아래층에 누가 와 있는지도 모르고 지역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이들이 겁도 없이 지껄여 댔다.
“그래도 됐을 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오욕하는 건 가능하겠습니다만. 아아. 몸통도 남지 않고 겨우 머리만 남았다고 했지요?”
“그렇게 됐으면 일이 훨씬 빨리 해결됐겠지. 앞으로 정파의 판도가 어떻게 바뀌건 간에 사파는 앞으로도 한동안 힘을 쓰지 못하겠지. 황상이 저리 사파를 탄압하시니. 그런데 나는 그것도 불만이네. 사파를 흑도와 같이 취급을 하시는 것 같아서 말이야. 이럴 때 정파 무림인들이 멍청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 되는 일인데.”
“형님도 같은 생각을 하시는군요.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관이 치안을 확보하려 한 거였다면 흑도 방파들을 쓸어 버리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사파를 건드린다는 건 관이 더 이상 무림과의 불가침 원칙을 지키지 않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정의맹은 아직 자기들의 밥그릇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바보들만 모여서 그런 건지.”
아진이 일어서려 하자 린린이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에는 관의 힘이 미치지 않아. 관의 위임을 받아서 몇몇 무가의 무인들이 치안을 맡고 있고. 말을 들어 보니까 정의맹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지역의 무가 소속 무인이거나 그런 놈들 같아.”
“뭐든 상관없어.”
아진은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진을 특별히 주의하지 않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고개를 돌렸다.
1층에서 표홀히 2층으로 올라온 것은, 그리고 2층에 내려서는데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진의 심후한 내공을 짐작하게 해 주는 부분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 정도의 내공 고수가 나타났다면 벌써 소문이 들어와야 했을 텐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자리에 함께한 이들의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들은 이룬 것 없이 입만 터는 부류의 전형처럼 보였다.
“웬 놈이냐! 여기에 계신 분들이 누군지 알고 함부로 날뛴다는 말이냐!”
자리에 앉아 있던 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좀 전에 개소리를 지껄인 놈이 어떤 놈이냐. 그놈의 주둥이를 뽑으려고 왔다만.”
아진이 싸늘한 얼굴로 하는 말에 그들 중 몇은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챙, 챙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한 사람은 아진의 턱에 검을 겨누기까지 했다.
“네놈들 모두인가?”
“왜들 이러나. 이곳에 처음인 소협이 세상 물정을 모르고 한 소리가 아닌가.”
그중 가장 나이가 많고 무공의 수위도 높은 양하성이 다른 사람들을 말리며 말했다.
그는 일류 고수 소리는 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에서 갑자기 나타난 아진의 내공과 무공 수위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눈에 보자마자 아진이 절대 함부로 건드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이들은 사람을 보는 눈이 없는 데다 자기들의 쪽수가 많은 것을 믿고 설치는 중이었다.
아진은 목소리를 듣고 그자가 자신의 사고를 모욕한 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빙소검후에 대해 주둥이를 놀린 놈이 네놈이냐.”
“형님. 이놈은 제가 죽이겠습니다. 감히 이렇게 광오한 소리를 지껄이는 놈을 살려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한 남자가 아진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 검은 아진의 손이 닿지도 않은 채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것을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어떤 술법이어야 그런 것을 할 수 있는가 했던 것이다.
“설마…….”
그들의 입에서 여러 무공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중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절대의 경지에 들어서지 않고서는 쉽게 펼칠 수가 없었기에 몇 사람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서 죽어야 억울하지나 않겠지. 네놈들이 경박한 입에 올렸던 그분은 내 사고님이시다.”
“…….”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눈을 굴리며 독고소영을 사고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떠올렸다.
그녀의 사형제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단연 북리의천이었다.
“서, 설마…….”
그들은 머릿속에 집요하게 떠오르려고 하는 그 이름을 부정하려고 애썼다.
그게 사실인 순간 눈앞의 남자는 북리의천의 제자인 서도진이라는 말이 되었고 그게 맞다면…….
“사고님을 욕되게 한 네놈들을 절대 대충 죽이지 않겠다.”
순간적으로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린 아진이 주먹에 강기를 둘렀다.
그의 팔이 뻗어 나간 것과 동시에 비현실적인 소리가 들리며 남자의 안면이 함몰되었다.
“여럿이 몰려다니면 안 해도 될 말도 하게 되지. 그러면 나 같은 사람도 만나게 되고. 나는 네놈들이 하루를 더 살아 봤자 공기나 탁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네놈들은 생각이 다른가?”
“서…… 서 소협.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검을 내던지고 무릎이 깨져라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꿇어앉은 놈들을 보면서도 아진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네놈들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두려움과 싸우면서 버티고 사람들을 지켰다!”
어느새 린린이 다가와 아진을 말리려 했지만 아진은 도무지 화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네놈들을 죽이면 안 될 이유를 말해라.”
“소협.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저희가 너무 경솔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고상한 사람도 아니고. 내가 지키려는 세상에 네놈들이 있는 것뿐이야. 기생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 세상을 지키려다 보니 네놈들이 숨을 쉴 수 있는 거야. 알고 있나?”
린린은 한숨을 쉬었다.
폭주하지 않는 게 이상했을 것이다.
북리의천과 소청이 걱정돼서 지금까지 가까스로 참아왔던 것뿐이지 아진의 고통도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린린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너희는 그냥 죽는 게 낫다. 사람들은 멍청해서 본보기를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그래도 되는 줄 알거든. 이미 하나를 죽였는데 너희를 살려 두면 균형이 맞지 않지.”
“소협. 부탁입니다. 제발 목숨만!”
아진이 손을 쓰려 했을 때 린린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검이 길게 사선을 그렸고 검기가 폭발했다.
“으으아아악!!”
여기저기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켜켜이 쌓였다.
놈들의 단전이 부서지고 사지근맥이 잘려나갔다.
검이 긴 울음을 멈췄을 때 그곳에는 아비규환이 참상이 벌어졌다.
“그냥. 태어나지 말지 그랬나. 이건 또 무슨 민폐야.”
검을 흔들어 피를 털며 린린이 태연히 말했다.
“포기하면서. 입 다물고 살아. 아. 혹시. 복수하려고 산본의가에 가고 싶어 하는 멍청한 놈들이 있을지 몰라서 하는 말인데 거기에 가면 우리가 본가 사람 중에 제일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될 거다. 복수는 언제든 환영이다만 네놈들 가문이 멸문당하는 꼴 보고 싶으면 대가리 잘 굴려 보고. 힘들 내.”
린린이 말하고 먼저 바닥으로 내려섰다.
“계산하고 나와. 나 돈 없어.”
뒤늦게 현실감각이 조금 드는 듯했다.
소식을 들은 듯 객잔 문이 열리고 수십 명의 무인이 들이닥쳤다.
각각 같은 무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러 종류였다.
2층에 있던 자들이 힘깨나 쓴다는 곳의 2세 정도 되는 분위기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가문의 사람들이 급히 달려 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위에서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입을 다물었다.
정의맹주 검신의 제자 서도진.
모든 혼란이 그 말 한마디로 사라지고 객잔 안이 고요해졌다.
아진은 린린의 말대로 음식값을 계산했다.
점소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잔돈을 주었고 아진의 손에 제대로 내려놓지 못해 바닥에서 철전이 나뒹굴었다.
“…….”
아진은 작게 한숨을 쉬고 철전을 주웠다.
“소, 소인이…… 소인이 주워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소란을 부려 죄송합니다.”
아진은 객잔 주인을 만나 보기를 바랐고 주방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남자가 덜덜 떨며 밖으로 나왔다.
“사고님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바람에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귀 업장에 피해를 드린 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손해배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족한 것 같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객잔 주인은 괜찮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귀신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아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진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그곳을 나왔다.
먼저 나간 린린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밤안개가 낄 모양이야. 어차피 안 보이는 건 똑같겠지만.”
화관처럼 구름을 머리에 두른 높은 산들을 바라보며 린린이 여상하게 말했다.
* * *
십만대산이 보인다고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초입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아진은 객잔에서의 일을 자주 생각했다.
“린린. 너도 그렇게 생각해? 황상이 그런 게 무림을 길들이려고 그런 걸까? 그중에서 그나마 명분을 내세우기 쉬운 게 사파를 정리하는 거라서 정파를 이용하신 걸까? 그런 다음에는 정파를 노릴 거고?”
“가능성도 있는 일이고 해 볼 만한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해. 내 생각에는 황상이 오라버니를 직접 만나지 못한 채 계획을 세우고 일을 진행했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오라버니를 봤잖아. 그리고 황상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분이지.”
“그래서?”
“답이 나왔잖아. 무림을 길들이려고 하는 일은 아니라고. 만약에 그런 거였으면 황상은 황실 무가를 키우는 게 좋았을 텐데 오히려 북궁세가를 숨도 못 쉬게 탄압해 버리셨지. 처음에는 그자들 말대로 계획을 세우셨을지 몰라.”
“그 계획이 나 때문에 바뀌었고?”
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한 사람이랑 손을 잡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너한테도 그래?”
“뭐가?”
“너한테도 내가 믿음직한 사람이야?”
“참 내. 역천마의가 섭혼대법 한 것 같네. 그런 이상한 질문을 다 하고.”
그 말은 한 번에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섭혼대법에 걸리지 않는 거지?”
“응. 역천마의가 그 사이에 몇 번이나 벽을 부수고 우리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경지에 이른 게 아니라면. 그런데 역천마의라면. 그런 것도 할 수 있으려나?”
린린은 아진을 놀리려고 한 말이었지만 아진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어쩌나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 되는 게 아니었다.
‘린린이 갑자기 나를 못 알아보고 검을 휘두르면 어떡하지?’
다른 게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린린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 * *
“여기에 있으면.”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허공에 퍼졌다.
“신교의 모든 곳이 다 보인다.”
터무니없이 부드러운 음성.
“알아. 역천마의?”
그가 돌아보며 웃었다.
“너도 이리 와서 보지 그러느냐.”
전대미문의 천마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오른 천마는 오래 가지 못했다.
모두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가 당한 일은 훨씬 더 끔찍했다.
마신을 모시는 신전에 천마의 시신이 걸렸다.
누군가 마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신교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