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179화
북리의천은 소청을 안았고 소청은 깜짝 놀라서 잠을 깨려고 애썼다.
“괜찮다. 소청아. 자려무나.”
소청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북리의천이 같이 있으면 걱정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은 지극히 평화로워 보였다.
아진은 혼자서 술잔을 비우다가 린린과 눈이 마주쳤다.
린린이 고갯짓을 하더니 먼저 밖으로 나갔고 아진도 곧 그 뒤를 따랐다.
“어떻게 할 거야. 오라버니? 련주를 잡으려면 지금이 기회일 것 같은데. 지금이면 충독이나 대제도 아직 갖춰지기 전일 거고 맹주님께 소청이를 맡길 수도 있고.”
“그래. 그렇지.”
진작 계획을 세웠어야 했는데 마음이 모래처럼 자꾸만 부서져서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린린의 말이 맞았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또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으려면.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실의 아픔을 겪게 하지 않으려면 이제는 힘을 내야 했다.
아진은 린린이 기막을 두르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더럭 겁이 났다.
“왜 또 그래?”
“오라버니. 역천마의를 만나 봐야겠어.”
린린에게서 그 소리가 나왔을 때 아진은 생각지 못한 말에 놀랐다.
그러나 그때에야말로, 그의 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길을 내보이는 것 같았다.
“신교로 돌아가려고. 신교로 돌아가서 역천마의를 만나 보려고.”
“순순히 만나 주지 않으면? 네 말을 믿어 주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원래 천마였는데 지금은 이 꼴을 하고 있다. 그러면 역천마의가 그러시냐고 할까?”
“오라버니. 내가 누군지 잊었어? 오라버니라면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해? 나 천마야.”
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나 천마야”라는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만나 보자. 언제 갈 건데?”
“우리가 이런 계획 세우고 출발하는 데 오래 기다린 적 있었던가?”
“어?”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린린이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게 아니었던가.
“소청이에게만 말하고 와. 다른 분들한테는 대충 둘러대라고 하고. 소청이한테 이런 막중한 임무를 안겨 줘야 그 녀석도 정신 차릴 거야.”
“소청이 자.”
진지하게 하는 말인가 의심하면서 린린을 쳐다보다 아진은 고개를 흔들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진의 마음이 이미 다른 데에 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고 더 이상 술을 권하지도 않고 자리까지 정리했다.
강풍에 낙엽이 흩날려 버린 것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더니 나중에는 몇 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들은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냐. 아진아.”
“린린과 어디에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스승님.”
“그래. 내가 온 게 그 결정에 도움이 된 모양이구나.”
“예. 스승님. 스승님이 계시면 소청이를 맡길 수 있어서요.”
“그래. 내 제자가 나를 믿고 가겠다고 하니 나도 이제부터 힘을 내보마.”
“감사합니다. 스승님.”
아진은 말을 하고 다시 북리의천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정말 수많은 이유로요.”
“그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아진아.”
“예. 스승님.”
북리의천은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섰다.
그러자 흑주가 소청을 따라가려다가 갈팡질팡했다.
아진과 린린이 다른 곳으로 간다면 자기도 그쪽으로 따라붙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 같았다.
“소청이를 지켜 줘. 흑주.”
그러나 오히려 흑주는 그 말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북리의천이 있으면 소청의 곁은 이제 북리의천에게 맡겨도 된다고.
흑주는 린린을 향해 쌩 날아갔고 린린은 흑주를 주머니에 넣었다.
“흑주. 네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엄청난 곳에 데려다줄게.”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엄청난 곳.
아진의 가슴이야말로 떨려왔다.
* * *
아진은 몇 번이나 린린의 표정을 살폈다.
자기가 왜 그렇게 떨리는 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린린. 너 정말. 정말로 괜찮냐?”
“괜찮다는데 왜 그래? 아아. 오라버니. 오라버니 지금 오라버니가 살던 곳으로 갈 게 상상돼서 그래? 정말 거기에 좋아하던 사람이라도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있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하긴. 그렇겠다.”
“그렇겠다는 또 뭐가 그렇겠다야?”
“아. 또 왜 이렇게 까칠하실까?”
린린은 아진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리고 웃어댔다.
“그런데 천마신교에 몰래 잠입할 수 있어?”
“무슨? 어림도 없지. 천마신교가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 곳인데. 그 주위에 만들어진 진도 대단하고. 그 진을 만드는 데만 백 년이 훨씬 넘게 걸렸대. 진이 겹겹으로 돼 있어서 허락받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죽어.”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
“나도 잘 모르는데 내 생각에는 진이 내 기운을 알아차리지 않을까 해.”
“그래? 그런 게 있어? 천마들은 해진할 수 있는 거야?”
“응. 내 몸 자체가 열쇠인 거지. 그런데 이 몸에도 그게 통할지는 모르겠어.”
린린이 제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통하면 좋겠다.”
린린도 아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해진을 못하면 어떻게 할 건데? 포기할 거야?”
“아니. 진을 지키고 있는 자를 잡아서 해진하라고 하고 들어가야지.”
아진은 린린의 방식이 뭔지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마신교가 있는 십만대산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말들이 퍼져 있었다.
천마신교에 입교하려고 십만대산을 찾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 중 살아서 돌아온 이가 없다는 말도 있었다.
아마도 죽었을 거라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린린에게 묻자 린린도 그럴 거라고 말했다.
“일단 귀찮잖아. 들어오지 말라는 곳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거야. 그런데도 들어가면 왜 들어왔는지 말을 들어보는 것보다 그냥 다 죽이는 게 빨라.”
“…….”
그러고 보면 지금껏 린린과 별 탈 없이 잘 지내온 것이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몰랐다.
“내 동생이 이런 녀석인 걸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진작 알았으면 뭘 어쨌을 건데? 그래 봤자 만두야, 만두야 하면서 예뻐서 죽으려고 했을 거면서.”
그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너는 어렸을 때 너무 귀여웠어.”
“오라버니한테는 동생이 없었어? 그쪽 세계에서.”
“저기로 가면 되는 거냐? 너는 배 안 고파? 나는 슬슬 배고프다.”
아진이 말을 돌리자 린린도 아진이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 생각한 듯 그를 따라갔다.
“오라버니. 역천마의 소개해 주면 만날 생각 있어? 진지하게.”
“할머니시라며. 역천마의 손녀를 소개해 줘. 그러면 만날 생각 있어.”
“할머니까지는 아니야. 아주머니라면 몰라도. 그리고 외모가 뭐가 중요해? 여기서는 술법으로 그런 거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데.”
“몇 살인데?”
“육십이 좀 넘었나?”
“장난하냐? 어쨌든 싫어. 겉으로 보이는 게 젊어도 어떻게 할머니랑 사귀냐?”
“할머니 아니라도 그러네! 그리고 내가 먼저 나이를 말 안 했으면 어차피 몰랐을 거면서.”
그래도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안 된다는 당연한 말을, 왜 린린에게는 매번 이렇게 진지하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역천마의라면 소청이를 고칠 수 있을까?”
“나도 모르지만 일단은 데려가 보려고. 소청이는 못 고친다고 해도 사도련주와 충독 문제는 역천마의랑 상의를 해 보는 게 빠를 것 같아. 어차피 우리 힘으로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잖아.”
아진도 그 말에 동의했다.
만약 제서에서의 공략이 아무 준비 없이 이루어진 거였다면 다음에는 준비를 제대로 해서 공략하면 될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보니 아진도 조금씩 자신감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대제가 많지도 않았다.
그리고 함께 전투에 임한 사람 중에 초고수들이 많았다.
벽력십팔단만 해도 대부분이 절정에, 초절정도 한 사람이 끼어 있었고 다른 명문세가의 대표적인 무력단체들도 사정이 같았다.
그들은 늦지 않게 그곳에 도착했고 일찍부터 전투를 위한 공략을 해 나갔는데 그러고도 진 것이다.
독고소영을 포함해 여러 명의 사망자를 내고 소청의 몸에 벌레를 남긴 채.
린린도 아진의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린린. 지금이라도 말해. 네 소중한 부하들을 죽이는 게 싫으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다치게 하지 않고 역천마의만 납치하는 걸로 계획을 수정할 수 있잖아.”
“뭐라는 거야? 어차피 지금 있는 놈들은 새로운 교주의 명령만 들을 거야.”
아진과 린린은 툭탁거리면서 십만대산으로 부지런히 경공을 펼쳤다.
* * *
이제 하루만 더 가면 십만대산이었다.
그곳에 살던 린린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정확하게 찾아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린린의 표정은 조금 긴장한 듯이 보였다.
아진도 이제는 린린을 놀리지 않았다.
과거와의 조우.
아무리 그리운 사람이 없다고 해도 몇몇 사람과는 좋은 기억으로 얽혔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진은 린린을 자주 바라보았다.
혹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린린도 몇 번이나 그 생각을 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아가면 모든 게 수포로 되기에 그러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도련주를 죽이기 위해서. 그리고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오라버니 혼자 갔다 올까?”
객잔에서 식사를 하다 아진이 묻자 린린이 그를 보았다.
“됐어. 길 찾는 거 어렵다니까?”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정도로 운은 띄워놨으니 혹시 멈추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을 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린린이 아니어도, 자기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해 나가면 되는 거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점소이가 여러 번 오가며 그 객잔에서만 만드는 술이 있다는 둥 질 좋은 군산 은침차가 있다는 둥 하면서 열심히 영업을 했다.
“우리 둘 다 돈은 전혀 없게 생겼는데 왜 그러지?”
린린이 모르겠다는 듯 물었고 아진은 혀를 찼다.
“둘 다는 무슨? 너는 그래도 나는 안 그런데?”
“아이고오오.”
린린은 할 말 많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2층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말이지. 무림맹이나 정의맹이나 모두 거기서 거기라고. 정의맹은 뭔가 대단한 개혁을 하려는 것처럼 굴더니 사도련주를 잡지도 못하고 은근슬쩍 무림맹과 다시 손을 잡지 않았나? 빙소검후가 죽고 나서 맹주가 모든 의욕을 다 잃어버린 틈을 타서 무림맹이 정의맹을 먹을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러게 말입니다. 무림맹에서는 사도련주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될 일인 줄 알았으면 진작 사람을 보내서 빙소검후를 죽여 버렸으면 될 일이 아니었습니까?”
부지런히 그릇을 비워가던 아진의 손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