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178화
그는 지금껏 늘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가 하는 말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그의 말을 믿으면 가주는 늘 자신의 말대로 되게 해 주었으니까.
스승님의 아버지는 스승님과 똑같은 분이라고 생각하며 소청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는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했고 북리의천과 아진에게 깊은 위로를 표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덕분에 제서성을 구했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만 하게. 회복될 때까지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장원을 제공하겠네.”
“그러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회복될 때까지 치료받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시면 합니다. 성주님. 웬만하면 이곳에 남아서 직접 살피고 싶지만 제자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게. 그렇게 하겠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무인들에게만 희생을 감수하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준다면 나야말로 고마운 일이네.”
“감사합니다.”
성주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준 덕분에 아진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먼저 산본의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도련주를 놓쳤으니 당분간은 경계를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맹주님.”
정의맹과 무림맹의 무사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지만 북리의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진도 사도련주가 당분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충독을 증식시켜 대제를 세운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지금은 우리가 다시 일어설 기회인 듯하오. 각자 부족한 수련도 더 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더 강해지도록 합시다.”
북리의천의 말에 모두 승복했다.
아진이 소청과 떠날 때 북리의천은 산본의가로 함께 가지 않았다.
그는 독고세가로 가서 독고소영의 시신을 손수 안장해 주기로 했고 아진은 소청이 안정되는 대로 그쪽으로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북리의천을 혼자 두는 것이 못내 걱정됐지만, 북리의천은 자기가 산본의가로 찾아가겠다며 아진을 다독였다.
“소청아. 이 사조는 소청이 너 때문에 버티고 있다는 걸 기억해 주련?”
그 말은 소청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북리의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북리의천은 소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할 때까지 답을 재촉했다.
이제는 그 어린아이에게 희망을 걸어 두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산본의가로 가는 동안 아진은 소청을 업고 경공을 펼쳤고 린린이 그 옆을 따랐다.
그리고 잠식의 징후가 조금씩 나타났다.
소청은 몇 번 아진의 살점을 물어뜯었고 그때마다 흑주가 소청의 머리에 날아가 세게 부딪쳤다.
표정 같은 것은 없는 구슬이지만 그때의 흑주를 보면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진은 소청이 물어뜯은 살점에서 알싸한 통증이 퍼지는 것을 느꼈지만 소청이 그러는 것이 싫지 않았다.
버티기 어려운 상태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못내 고마울 뿐이었다.
제선문주는 산본의가에 먼저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사이에 새로 만들어 놓은 약을 소청에게 계속 먹였다.
몸 안에 있는 충독의 벌레를 죽이는 약이었다.
비율이 맞는지 확신을 할 수는 없었지만 틀리면 틀리는 대로, 다시 새로운 방법, 정확한 비율을 찾아내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포기를 모른 채 소청에게 매달렸다.
수십 가지의 약초를 가져다 놓고 그 속에 파묻혀 각자의 효능과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끝없이 연구하고 소청의 몸에 조금씩 투여해 반응을 살폈다.
하루에 한 시진도 자지 못하며 연구에 몰두하고 시간 대부분을 화로 앞에서 보냈다.
약을 만들기 위해 불을 때는 것은 대신해 주고 싶어서 아진이 나서려고 해도 그는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불의 강약 조절을 자기처럼 잘할 수 없고 거기에 따라서 약효가 완전히 달라질 텐데 그런 일을 맡길 수는 없다는 거였다.
무령독화로 약을 만들 때 원래의 무령독화가 낼 수 있는 영약의 효과를 믿을 수 없게 증진했던 제선문주였기에 아진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진은 틈이 날 때마다 제선문주의 몸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으로 그의 노고에 보답했다.
그러면 제선문주는 신기하다는 듯이 아진을 보았다.
“이것은 내공과도 다른 기운이군. 그렇지 않은가. 혹시 선천진기…… 는 아닐 테고.”
아진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다 죽어 가는 것처럼 초췌해지던 제선문주의 몸이 아진으로 인해 다시 생기를 되찾는 것을 보면 마음이 놓였다.
제선문주를 보는 사람들은 그날 저녁이라도 당장 극락에 이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던 제선문주의 몸이 갑자기 20년은 젊어진 것 같은 모습을 보면서 한두 번 놀라는 것이 아니었다.
제선문주는 더욱 신명이 나서 제약에 매달렸다.
그리고 자기가 찾아낸 방도대로 약을 만들어 소청을 찾아갔다.
“네 몸에 있는 벌레는 이미 너무 강해졌다. 은소청. 벌레를 죽이면 너도 죽을 거다. 이제는 공생밖에 답이 없다. 이겨라. 네 몸의 주인은 너다.”
제선문주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일에 매달리다가 소청에게 말했다.
벌레를 제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는지 소청은 눈에 띄게 낙심한 표정이었지만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는 대신에 조용히 독을 투여했을 거다. 그리고 일찍부터 화의 근원을 제거해 버렸을 거야. 그런데 너는 아니다. 너는 이놈을 제어할 수 있다. 지금까지 네가 네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제선문주는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듯 손을 들었다가 끝내 쑥스러웠는지 손을 거두었다.
그 모습을 본 아진이 웃음을 지었다.
박동을 멈출 거라고 생각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처럼, 소청이 버텨낸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아직도 가끔 벌레가 너무 강해지는 때가 생기고 소청이 제 의지로 이겨낼 수 없는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는 소청이 먼저 도움을 요청하거나 흑주가 사람들을 불러왔다.
흑주는 이제 린린의 품을 떠나 소청의 곁을 지켰다.
갓 태어난 아기를 지키는 충직한 개처럼 소청의 발치에 머무르다가 벌레의 기운이 강해지는 것 같다 싶으면 곧장 아진에게 달려가 그의 팔에 몸을 부딪쳤다.
그러면 아진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차리고 소청에게 달려올 수 있었다.
아진이 없을 때면 린린을 불러왔고 린린도 없으면 다른 사람들을 불렀는데 다른 사람들도 흑주가 와서 자기 몸에 부딪히면 뭘 해야 할지 알아차렸다.
벌레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을 겪어야만 했다.
벌레 입장에서는 산본의가 같은 지옥이 없었을 터였다.
제선문주는 벌레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꼈고 소청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 * *
북리의천이 산본의가에 온 것은 한 달이 지난 후였다.
머리카락이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모두 하얗게 세어 있었다.
“소청아.”
그는 다른 사람들을 보기에 앞서 소청을 찾았고 소청은 그저 서러워서 북리의천에게 달려가 포옥 안겼다.
북리의천은 무릎을 꿇은 채로 소청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견뎠구나. 아가야. 장하다. 정말 장하다.”
우는 사람은 소청이었지만 그 많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북리의천인 것 같아서 그 모습을 보는 사람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아진도 북리의천에게 비슷한 말을 하고 싶었다.
버텨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지 알면서 그러기를 부탁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북리의천이 없는 삶을, 그리고 소청이 없는 삶을 상상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북리의천도 그것을 알고 끝까지 버텼다.
독고소영의 부재가 목을 조를 것처럼 고통스럽고 참혹했지만 자기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버텨 냈다.
아진에게도, 소청에게도 자기가 있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자기가 딛고 있는 발밑이 흩어져 무너지는 것 같을 때마다 억지로 힘을 냈다.
북리의천은 자기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아진을 보았다.
그리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진은 스승이 저를 보고 웃음을 짓는 것이 싫었다.
얼마나 힘든지 아는데 그 고통을 견디고 웃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그냥 힘들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여기에 오는 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스승님. 술 사 주세요.”
“…….”
북리의천이 가만히 아진을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말해 보아라. 아진아.”
“술 사 주세요. 스승님. 괴로웠습니다. 그러니까 투덜거리게 술 좀 사 주세요.”
북리의천은 한동안 배를 감싸 안고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내가 좋은 기루는 모른다만 좋은 술을 고르는 법은 안다.”
“저도 끼어도 되겠습니까. 형님.”
한참 전부터 곁에서 지켜 보고 있던 가주가 나서자 그 옆에서 제선문주도 손을 탁탁 털었다.
“어디로 갈 겁니까? 잘 차려입고 나와야 합니까?”
북리의천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수가 불어나는 것을 보고 아진을 바라보았다.
“저도 가면 안 돼요. 사조님?”
소청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소청이를 데리고 기루에 갈 수는 없고. 아무래도 여기에서 판을 벌여야겠구나.”
그러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모와 소청의 어머니가 사라졌다.
소주방에서는 안주를 만드느라 분주했고 가주전 대청에 여러 개의 술상이 차려졌다.
제서에서 그 일이 있은 후, 산본의가에서 그렇게 떠들썩한 소리가 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의원들도 무슨 일인가 하며 가주전을 기웃거렸고 술판이 벌어진 것을 알고는 자기들도 서둘러 진료를 마치고 하나둘 합류했다.
아진은 사람들이 권해 주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마셨고 자기도 그들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다시 웃게 되는 것은, 다시 웃음이 나와서가 아니라 그 웃음을 짓기로 결단하고 애를 써서 그러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웃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이유들이 아진의 곁에 촘촘하게 앉아 있었다.
다시 웃는 사람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
아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당분간은 여기서 머물까 한다. 정의맹에는 인물이 많다. 무림맹의 수뇌부가 우리를 찾아와 깊이 사과하더구나. 다시 합치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무림맹을 적대하거나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긴장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나도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해서 왔다.”
북리의천이 말하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 자리도 내려놓고 싶었는데 그건 안 된다고 하더구나. 원할 때까지 푹 쉬고 오라더라. 대행은 확실히 해 놓겠다고. 낭왕에게 맡겼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다행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함께 계신다면 저희는 두말할 것 없이 환영입니다.”
“아진이가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알게 됐구나.”
북리의천은 사람들이 자기를 걱정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진심으로 격려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좋은 분위기에서 술이 오갔다.
소청은 북리의천의 곁에 있었고 흑주는 그 순간에도 소청의 옆을 지켰다.
소청은 흑주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북리의천이 그 모습을 보았다.
“이제 흑주를 네가 갖고 있구나. 소청아.”
“네. 흑주가 저를 지켜 주고 있어요. 사조님. 제가 이상해지면 흑주가 어른들을 불러다 줘요.”
소청이 북리의천의 옆에서 조잘거렸고 나중에는 잠이 오는지 조금씩 소청의 머리가 북리의천 쪽으로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