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177화
아진이 그를 향해 몸을 날렸고 린린만이 남아 사도련주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사도련주는 비틀거리면서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단 한 번의 기회.
그것이 사라졌다.
린린의 신형이 사도련주의 앞에서 나타났지만 한 번 당한 일을 사도련주가 다시 당할 리가 없었다.
공력을 손에 밀어 넣은 사도련주가 갑자기 돌아서며 린린에게 손바닥을 날리자 방비 없이 뒤를 쫓던 린린의 몸이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졌다.
“……!”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 린린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곳곳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와 린린을 부축하고 금창약을 발랐다.
함께 온 무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성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린린은 눈으로 아진과 소청을 찾았다.
그러다가 소청을 안고 있는 아진을 발견했다.
린린은 제 상처에 약을 바르려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소청에게 가는 동안 그녀의 눈에 가망 없이 쓰러진 무사들이 보였다.
‘…….’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렇게 끔찍한 광경을 본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침내 소청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는 아진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았다.
소청의 몸이 가끔 위로 튀어 올랐다.
벌레에게 잠식당한 것이다.
‘…….’
절대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다.
소청이 잠식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린린은 머릿속에 포말이 이는 것 같았다.
온통 하얀 포말이 시야를 덮치는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벌레의 숙주가 됐으니 이제 죽이는 수밖에 없다고 쉽게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는 동안 아진이 일어섰다.
린린은 소청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스승님을 믿고 따라온 사람들이잖아요. 죽으면 살려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무공을 전수해 주시겠다고 했고요. 그렇게 하세요. 스승님. 스승님의 세상은 멈추면 안 돼요.”
린린은 소청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너는 도대체 뭐냐고.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녀도 알 수 있었다.
소청의 세상은 온통 아진으로 이루어졌을 터였다.
비록 긴 시간을 아진과 떨어져서 지내야 했지만 소청이 단 한 순간도 아진을 잊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린린은 알 것 같았다.
아진은 그렇게 일어섰다.
그리고 사람들을 찾아갔다.
벌레의 숙주가 되었다가 죽은 사람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마나로 살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진 자신에게도 힘든 일일 테지만 괴로움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독한 술을 마시고 자신을 괴롭히고 싶은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고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린린은 소청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이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소청아.”
“……사고님.”
소청이 웃었다.
지금이면 벌써 잠식이 되고도 남았어야 했다.
그 빌어먹을 놈의 벌레.
그것이 소청의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육안으로도 확인이 되었다.
그것만 꺼내서 죽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소청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는데 그게 가능했다면 아진이 먼저 시도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횃불이 흑암을 뚫고 연약한 빛을 뿌렸다.
린린은 아진이 사람들을 고치는 것을 보았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지독한 절망감.
이렇게 고통스러운 패배감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린린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성문이 열렸다.
그 시간에 성문이 열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린린은 주위의 다른 일들에 신경 쓰지 않았다.
소청의 끝은 자기가 지켜봐 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청의 손을 잡고 있는데 소청의 손이 떨렸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린 것이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상황에 겁이 날 것 같아서 린린이 소청을 꼭 끌어안았는데 소청이 린린을 밀어냈다.
“저한테 가까이 오지 마세요. 사고님. 제가 사고님을 공격할지도 몰라요. 지금쯤 잠식돼야 하는데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자꾸 기대해 버리게…….”
린린도 같은 생각이었다.
린린도 소청과 같은 생각이었다.
왜 이러는 걸까.
함부로 기대하게…….
어느덧 아진은 북리의천을 고치고 있었다.
북리의천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아진이 북리의천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송하다고 말하며 오열하자 북리의천이 아진을 끌어안았다.
여러 대의 마차와 수레가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그게 무슨 행렬인지 알지 못했다.
성문이 열렸다는 것은 성주가 그들의 출입을 허락했다는 의미였다.
싸움이 끝나도록 보이지 않던 성주가 실은 숨어 버린 것이 아니라 궁수를 배치하고 전서구를 날리고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는 소식은 훨씬 늦게 전해졌다.
마차와 수레의 행렬에서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산본의가에서 왔소. 치료를 시작할 테니 다친 분들을 부축해서 이곳으로 오시오.”
도종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인지, 무인들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누군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누군가의 몸은 격렬히 떨렸다.
경험해 보지 못한 공포가 뒤늦게 찾아와 실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동안 어둠 속에서 혼돈은 계속 이어졌다.
* * *
죽은 이들은 벌레의 숙주가 된 이들이 전부였다.
그런 사람이 아니면 한 번 죽음을 경험했다가도 살아났다.
아진은 자기가 한 말을 지켰다.
“고생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두려움을 이긴 이번의 경험은 앞으로 매 순간 여러분을 각성시킬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진은 사람들을 보면서 배우고 싶은 무공을 물었다.
그러나 처음에 그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환희에 들떠 좋아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아진의 무공을 탐내지 않았다.
그들도 이제 그것이 무공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아진이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알고 있었다.
사고를 잃었고 제자의 몸에는 벌레가 남았다.
언제 그 생명이 꺼져 버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진은 슬픔에 잠겨 있는 대신 사람들의 앞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것이 제자가 바라는 일이라서 그랬다.
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다.
생전 그렇게 큰 거인의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한마음으로 소청과 아진을 응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함께 아진의 동료로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며 그것을 가슴에 새겼다.
벌레의 숙주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시신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장례가 치러지고 안장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서 소협.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당채운이 다가와 아진에게 말했다.
다른 무림의 명숙들 역시 그들을 위로했다.
독고소영은 북리의천이나 아진만의 사람이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만큼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아진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도 독고소영만큼은 살리지 못하는 것을 보며 크게 낙심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입을 열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진이 얼마나 상심했을지 알고 있었고 아진과 북리의천이 고통을 당하는 동안 자기들이 기꺼이 그들을 지키는 산성이 되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진은 소청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고 했지만 줄곧 소청의 곁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린린은 소청의 옆을 계속 지켰는데 그의 부탁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기도 했다.
“사고님. 목이 마르는데 물 좀 가져다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 조금만 기다려.”
린린이 물을 가져간 사이에 소청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소청아. 소청아!!”
그 소리에 놀라 아진과 북리의천이 삽시간에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가 보니, 소청은 죽으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켜 실패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어. 이 사조를 욕보이지 마라. 소청아!”
북리의천은 벌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청이 무슨 마음으로 그런 건지도 알 수 있었고 자기가 소청의 입장이라고 해도 분명히 소청처럼 그럴 거라는 걸 알아서 더욱 그랬다.
언제 벌레가 몸을 잠식할지 모르고 그때가 되면 자신으로 인해 자신의 동료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죽게 될 텐데.
살아 있는 것이 그렇게 두렵고 죄스러울 수가 없을 것이다.
아진은 소청을 바라보았지만 소청은 차마 그의 시선을 견뎌내지 못했다.
“많이 힘들어. 소청아?”
한참 만에 마침내 두 사람만 남게 됐을 때 아진이 소청에게 물었다.
소청의 조그만 머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서 이 스승님을 못 보게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야?”
소청이 놀란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건…… 아니에요. 스승님.”
아진도 소청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청이 사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버틸 수가 없어서 못되게 굴기로 했다.
“조금만 더 버텨 주면 안 될까. 소청아? 다른 사람을 위험하게 할까 봐 걱정이 되는 거면 스승님이랑 조용한 곳에 가서 둘이서만 살까?”
소청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 후로 몇 번이나 소청이 성 안의 거대한 아궁이로 뛰어들려 해서 아궁이가 있는 곳마다 경비가 섰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려고도 해 본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해 봤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소청을 보호하며 안정적으로 착지를 해 버려서 그것으로는 죽을 수가 없었다.
소청은 확실히 잠식 진행 속도가 이상했다.
이미 잠식이 되고 남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진행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그에게서 공격 성향이 나타났다.
그건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소청은 어떻게든 멈추고 싶어 했지만 매번 그 일은 벌어졌고 일이 끝나면 소청은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그리고 그 후에 죽으려는 시도에 집중되었다.
“소청아. 우리는 방법을 찾고 있다. 체내에 있는 벌레를 죽일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연구와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네가 버텨 주기만 하면 우리는 그 방법을 반드시 찾을 거다. 그러니까. 미안하고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네가 버텨 주었으면 하는구나.”
가주인 서종욱의 말에 소청은 쉬지도 않고 눈물을 쏟아 냈다.
“어머니가 기다리신다.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계셔. 어머니를 실망하게 하지 말거라.”
소청도 그 말에는 마음이 약해진 듯 가주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을까요. 가주님? 그러다가 그곳에서 제가 잠식되면 그분들은…… 그 많은 분은…….”
“소청아. 너는 아이야. 우리는 어른이고. 그런 일은 어른들에게 맡겨라. 너는 그냥 네가 원하는 것만 해라. 너는 네가 원하는 걸 하면서 살아도 돼.”
“……산본의가로. 가고 싶어요. 가주님. 어머니를 보고 싶어요.”
소청의 말에 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청을 안아 주었다.
“안 무서우세요. 가주님? 이러고 계시는 동안에 제 몸에서 벌레가 저를 조종하고 제가 가주님을 공격할 수도 있어요.”
“너에게 미안하기는 하겠지만 슬프지는 않을 것 같구나. 소청아. 네가 겪는 일에 가슴이 아프기는 하겠지만 내가 당한 일 때문에 마음이 아플 것 같지는 않아.”
소청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가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가주가 자기를 안심시키려고 괜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