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176화 (176/470)
  • 제176화

    176화

    “안 돼. 안 돼!”

    독고소영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북리의천은 허벅지와 옆구리가 너덜너덜해진 채 달려왔다.

    옆구리에서는 내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핏물이 묻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억지로 그것을 밀어 넣고 있어서였다.

    귀검사영은 환하게 웃었다.

    벌레 하나를 더 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북리의천의 살이 벌어져 있으니 벌레를 그냥 쑤셔 넣기만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는 것보다 두 연인이 적으로 맞서게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했다.

    귀검사영이 기괴하게 웃었다.

    그가 보기에 승기는 이미 자기 쪽으로 넘어온 듯했다.

    독고소영이 북리의천을 바라보았다.

    상황을 알아차린 북리의천의 눈동자가 경련하듯 흔들렸다.

    “내가 죽어도 싸움을 포기하지 마라. 의천.”

    그녀가 말했다.

    “너라면 그러겠어?”

    진한 선혈을 흘리던 입으로 그가 말했다.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졌다.

    제 심장처럼 사랑한 연인이었다.

    평생 오직 한 여인을 사랑했고 그 사람이 독고소영이었다.

    그의 세계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곁에 있기만 하면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불길로 들어가야 한다고 해도 심호흡 한 번이면 족할 것 같았다.

    그 후에는 주저하지 않은 채 바로 달려갈 수 있을 듯했다.

    그녀는 그의 신념이었고 그의 용기였고 그가 가질 수 있는,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의 집합체였다.

    소중하고 귀한 것을 전부 다 쌓아놓으면 그것은 그대로 독고소영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독고소영이 벌레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의천. 변하지 마. 계속 싸워. 나는 이곳이 좋았어. 네가 지켜 줘.”

    “네가 없이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화가 난 듯 소리쳤지만 그는 무서웠다.

    그녀가 없는 세상을 혼자 버텨야 한다는 것이.

    “너라면 그래? 너라면 그럴 수 있어?”

    흐느끼듯 말하는 북리의천을 보며 독고소영이 웃었다.

    “그래. 나라면 그래. 의천이 사랑했던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아니까. 포기하고 낙심하던 모습이 아니었잖아. 의천이 좋아하던 내 모습. 너를 이기던 나였잖아. 그렇지? 나는 너보다 더 강해. 의천. 이제 너는 가장 강해질 수 있어. 나를 베. 의천.”

    웃음이 나왔다.

    -내가 너보다 더 강하다는 거 알지, 의천?

    웃지도 않고 늘 진지하게 말하곤 하던 그녀였다.

    웃다가 오열하던 의천이 검을 던지자 독고소영이 그것을 발로 차올렸다.

    허공에 떠오른 검이 그녀의 손에 들어가 잡혔고 그녀는 망설이지 않은 채 그것으로 제 목을 벴다.

    생전 그렇게 붉은 피는 본 적이 없었다.

    “……!”

    북리의천의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세상에서 그녀가 쓰러졌다.

    쓰러지는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제 복부를 난도질했다.

    벌레가 죽기를 바라는 듯이.

    “의천. 나를 도와줘. 나는 숙주가 되고 싶지 않아.”

    북리의천은 눈물이 차오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을 잡았다.

    그녀의 손 위로 검을 겹쳐 잡은 채 그가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 역시 내공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선천진기까지 써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끌어왔고 그녀의 몸을 강기로 터뜨렸다.

    수천, 수만 조각으로 터진 살덩어리가 튀어 올랐다가 눈처럼 내렸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만큼은 남아 있었다.

    그녀답지 않게 평화로운 얼굴.

    그의 가슴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귀검사영은 그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충독을 가진 후 그렇게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귀검사영은 북리의천이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가 검을 들어 북리의천의 뒤를 노렸다.

    독고소영이 죽어 정신이 반쯤 나간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귀검사영의 생각은 틀리지도 않았다.

    북리의천은 귀검사영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제발 그렇게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는 의지가 그의 검을 움직였다.

    심검의 경지가 이렇게 발현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일이 이루어졌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경악한 채 눈을 떼지 못했겠지만 다른 이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여유가 아무에게도 없었다.

    북리의천의 검은 제 주인을 위해 싸우고 응징했다.

    단호한 검선이 그려지고 귀검사영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도 옆으로 기울었다.

    세상이 데굴데굴 구르더니 제 발과 몸뚱이가 보였고, 옆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터져 나갔다.

    목이 잘린 귀검사영은 제 죽음을 지켜보았다.

    ‘벌레…… 아끼지 말 걸 그랬나?’

    아껴 둔 것들이 남의 차지가 될 거라는 생각에 허무함이 가득했다.

    마지막 순간 귀검사영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그런 후회들뿐이었다.

    * * *

    챙-.

    챙-.

    병장기들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며 요란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던 감각에 이제 그 소리가 고통으로 다가올 정도였다.

    아진은 의개성주가 그곳으로 부임해온 것을 알지 못했지만 성주는 그를 알아보았다.

    성주는 수뇌부들과 함께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대비하려 했지만 싸움터에 무인과 병사들이 있어서 활을 쏘는 것도 어려웠다.

    처음에 적들은 열 명이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병사들이 사도련의 제물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렇게 될 바에는 그들을 후퇴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수뇌부들은 성주의 판단에 수긍하고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때부터는 싸움을 지켜보며 지원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비관적으로 흐르는 듯했다.

    아진은 성벽 아래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사도련주를 놓치면 앞으로의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사도련주를 공격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버텨 봤자다.”

    사도련주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대제들이 벌레를 사용해 숙주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며 사도련주는 웃음을 지었다.

    그는 대단한 무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온몸이 금강불괴 같아서 검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진이 내공을 힘껏 불어넣어 검에 강기를 덧씌우고 휘둘러도 캉 캉 소리만 내며 튕길 정도였으니 말을 할 것도 없었다.

    공격은 애초에 대제들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니 자기는 그냥 자신의 몸을 방어하는 것에만 모든 힘을 집중한 것 같았다.

    린린과 소청은 대제와 숙주들을 계속 해치워 나갔고 모두가 내공의 부족을 느끼고 있었다.

    아진은 두 사람이 힘들어하는 게 보일 때마다 다가가서 마나를 불어넣어 그들을 회복시켜 주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그들 셋만으로 대제 둘을 해치우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였다.

    숙주들까지 전부 처리하고 린린과 소청도 아진에게 가세했다.

    그러나 사도련주는 긴장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자기를 죽일 수는 없을 거라고 확실히 믿는 것 같았다.

    린린은 아진의 몸이 크게 오르락거리는 것을 보았다.

    여간해서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마나를 나눠 주고 성과없는 공격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내공의 많이 사용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린린의 품에서 흑주가 나온 것은 그때였다.

    린린은 흑주가 사도련주와 충독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는 웬만해서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흑주였지만 아진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린린에게서 나가 아진의 등에 붙어 내공을 불어넣었다.

    흑주가 위치한 곳은 딱 아진의 명문혈이었다.

    린린은 이전의 흑주가 자신을 구하려고 하다가 깨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흑주가 소멸을 각오하고 아진을 돕는 게 아닌가 했다.

    그 상황이 오래 간다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독고소영에게 일어난 일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린린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아래를 내려보았다가 북리의천을 보았고 그가 독고소영을 안고 오열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

    독고소영에게 몸이 남아 있지 않고 북리의천이 안고 있는 것이 독고소영의 머리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린린은 그 얘기를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아직도 귀면이 만들어 놓은 숙주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나마 귀검사영이 죽은 게 다행이었다.

    린린은 혹시나 하면서 귀검사영의 항아리가 어떻게 됐는지 보았고 그것이 산산조각이 나서 형체조차 남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슬픔에 잠겼지만 그러면서도 북리의천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 놓았던 것이다.

    “나는 불사의 존재가 되었다. 나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 대제들을 죽이고 숙주를 죽인다고 해도 너는 사파 천하의 도래를 멈출 수 없다. 그건 운명이기 때문이다.”

    광소를 쏟아 내며 사도련주가 외쳤고 그때 소청이 사도련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은 아진도, 린린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소청 역시 아진이 얼마나 사도련주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무모하게 덤벼들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불사의 존재라고 했다.

    금강불괴의 몸이었다.

    검도 통하지 않고 어떤 공격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소청은 자기가 사도련주를 죽이겠다는 마음만으로 달려들었고 사도련주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린아이의 손이라고 우습게 여길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대단하고 강한 몸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호흡해야 하는 존재.

    사도련주의 눈동자가 잘게 경련했다.

    소청은 손에 권강을 만들어 사도련주의 입과 코를 틀어쥐고 막았다.

    사도련주는 두 손으로 소청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소청은 사도련주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옭아맨 채 사도련주의 호흡을 차단했다.

    설마 그 방법이 통한다는 건가 하면서 아진이 공격에 가세했다.

    그러나 괴력을 발휘해 다른 공격으로 돕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사도련주의 몸은 그런 공격에 끄떡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호흡을 막는 것만이 사도련주를 죽일 방법 같았다.

    목을 졸랐다고 해도 사도련주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도련주는 소청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아진이 그의 두 팔을 감아쥐었다.

    힘으로 맞서서 사도련주의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는데 사도련주는 한 줌의 호흡도 하지 못해 몸이 덜덜 떨렸다.

    어느덧 린린도 그들에게 가세했다.

    만약 그날, 대제의 항아리가 깨지는 동안 혼자서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린 벌레 한 마리가 없었다면 사도련주는 소청에게 죽었을 것이고 아진의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사도련주나 다른 대제들조차 알지 못했던 벌레 한 마리가 살아남았고 그 벌레가 사도련주를 향해 기어왔다.

    항아리가 깨지면서 위기를 느낀 벌레는 저를 낳아준 충독의 존재를 느끼며 다가갔고 충독의 숙주가 위험에 처한 것을 깨달았다.

    제가 살아남으려면 충독의 숙주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벌레의 머릿속에 본능적으로 각인되어 있었고 놈은 소청의 몸을 노리며 바닥으로 튀어 올랐다.

    사도련주의 입과 코를 틀어막느라 여념이 없었던 소청은 등이 따끔한 것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 됐는데 이제 와서 손을 놔버릴 수는 없었다.

    사도련주의 눈에는 흰자위만 남았고 이제 곧 숨이 완전히 끊어질 것 같았다.

    “……!”

    다 됐다고 생각한 순간 소청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으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끔찍한 비명이 터지고 소청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