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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74화 (174/470)

제174화

174화

“……알겠습니다.”

그래 봤자 부임한 지 하루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고 그 사실에 기분이 상한 이들도 많았다.

그래도 엄연히 자기들이 그곳에 더 오래 있었는데 부임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는 성주가 너무 기세등등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성주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기가 막혔다.

이 자들은 도대체 몇 번이나 자기들의 목을 내걸고 싸워 봤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것은 꼭 역효과만 낳은 것은 아니었다.

성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자들은 성주에게 제대로 자기들의 실력을 보여 주겠다고 별렀다.

“의개성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 제서성은 그렇지 않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너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려고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말이야.”

그는 측근들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려면 깐깐한 신임 성주에게 책을 잡히는 일을 하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그 생각으로 관군들을 소집했다.

한껏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관군들은 괜한 불똥이 튀었다고 속으로 불평을 하면서도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관군이 한밤중에 무장을 하고 경계에 나선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 * *

그 모습을 성벽에서 지켜보던 사도련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동안 수차례나 사전 연습을 했지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경비 무사들이 어디를 어떤 식으로 순찰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경비 무사들이 교대하는 시간도 알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 어느 정도나 머무는지, 어디가 언제 비는지도 전부 파악을 해 두고 있었는데 그날은 모든 게 엉망이었다.

경계를 선 자들의 수가 평소보다 적어도 네 배는 된 것 같았다.

‘혹시 누군가 내 계획을?’

그러나 련주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 외에 계획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대제들마저도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었다

련주는 계획을 세워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비밀이 누설되는 순간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저 사람들에게 짧은 간격으로 명령을 내리며 그들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련주가 성벽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대제들은 시큰둥한 표정을 하며 성을 내려다보았다.

련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벌레를 사용하기만 하면 한 번에 천 명이 넘는 관군들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텐데 왜 저러고 있나 했던 것이다.

사도련주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당연히 성공해야 할 일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뒤집히는 것을 본 후로 그는 이런 식의 불길한 징조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의 사소한 차이가 나중에 걷잡을 수 없는 결과로 번지게 될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련주님. 명을 내리시면.”

귀면이 말하자 련주가 그를 바라보았다.

“귀면. 네가 먼저 가도록 해라.”

“……예?”

안 될 건 없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해서 귀면은 잠시 갸웃거렸다.

“예. 알겠습니다. 련주님. 전부 다 쓸어 버리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 사파천하는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해라. 너희가 부수려고 했던 사파가 아직 살아 있고 너희는 오늘 밤 모두 그 사파에 의해 씨도 남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해라.”

한 마디 한 마디를 하는 동안 사도련주의 광기가 더해졌다.

귀면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거라면 딱 자기가 적임이라고 생각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러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는지 귀검사영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련주님. 저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우선 둘이서 놀아 보도록 해라.”

우선.

우선이라고 말을 해 놓고 련주는 대제의 수가 너무 적은 것을 아쉬워했다.

두 사람으로 부족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셋 정도는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금방 돌아온다고 한 놈은 왜 안 와?”

설마하니 석화연린이 이미 아진에게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한 채 그가 중얼거렸다.

련주의 허락을 받은 두 대제는 그대로 성벽에서 몸을 날렸다.

“으히히히히. 다 죽었다!”

귀면의 광소가 허공에 넓게 퍼졌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귀검사영도 신이 나서 날뛰었다.

충독을 가진 후 절대의 경지에 발을 들인 두 사람은 우선 자기들의 힘으로 사람들을 쓸어 내기로 했다.

성에 갇힌 자들은 마치 독 안에 든 쥐 같았다.

당황한 기색.

경악이 서린 얼굴.

끝없이 터져 나오는 비명.

그 모습들이 그들을 흥분시켰다.

“죽어 버려. 이놈들아!”

“사파천하다! 천하가 사파에 물든다!”

그들은 사파천하가 되건 뭐가 되건 그딴 것은 관심이 없었다.

사도련주가 왜 그렇게 사파천하에 목을 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의 옆에 붙어 있으면 힘을 얻을 수 있으니 같이 사파천하를 외치며 장단을 맞춰주는 것뿐이었다.

스스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힘을 받은 채 가끔 사파천하라고 같이 외쳐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세상에 이렇게 편한 일이 없었다.

“사파천하가 도래한다. 이놈들아. 너희들의 피로 사파천하를 맞이해라!”

폭과 길이가 성인 남자의 전신만한 칼이 뽑혀 나왔다.

어지간한 장정 여러 명이 들려고 해도 끄떡도 하지 않는 칼이 그의 손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성 안 곳곳에서 타오르고 있던 횃불을 받아 붉게 일렁이던 칼이 허공을 가르자 몸이 직접 닿지 않았음에도 그 아래에 있던 수십 명의 사지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갔다.

도강이었다.

“으아아악!”

사람들은 미친 듯이 외쳐댔고 칼은 더욱 몸부림을 쳤다.

비명조차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됐을 때 귀면은 바닥에 내려앉았다.

귀검사영은 귀면보다 조금은 이성적이었다.

그는 이 축제가 너무 빨리 끝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 피가 끓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은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벅찬 기대감이 그를 덮쳤다.

가끔 광기에 사로잡히지만 그래도 그는 다른 이들보다 계산적인 편이었다.

사도련주에게 받은 벌레의 숫자는 모두가 비슷했고 그 사이에 많은 수를 사용해 버린 이들은 이제 고작 서너 마리만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귀검사영은 사도련주에게 받은 벌레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은 벌레가 지금 그의 항아리 속에 서른 마리가 넘게 들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아는 대제는 없었다.

귀검사영이 속임수를 쓰고 가끔 사람들에게 벌레를 집어넣은 것처럼 해서 그 역시 벌레를 많이 소진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귀검사영은 재미를 느끼고 싶었지만 제 벌레는 아끼고 싶었다.

이번에도 귀면이 날뛰는 동안 자신은 그냥 검강만 몇 번 날리면서 흥만 돋울 생각이었다.

귀면이 엄청난 괴력을 앞세워 함부로 도강을 풀풀 날리는 것과 달리 귀검사영은 계산적으로 움직여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장소에 정확하게 날렸다.

경쾌하게 도약해나가 검을 휘두르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절대의 고수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른 날에 비해 많은 자가 깨어 있었고 경비가 삼엄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었다.

곳곳에서 종이 울리고 수많은 사람이 달려왔다.

명령이 내려지고 화살이 무섭게 날아들었다.

그것은 생각하지 못한 반격이었지만 귀찮게 된 것일 뿐 크게 상황을 어렵게 만들지는 않았다.

귀검사영은 검에 내공을 전혀 불어넣지 않은 채 다가갔다.

순수한 의미의 살육을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사도련주가 보면 누가 장난이나 하고 있으라고 했냐고 하겠지만 일단 사도련주가 호통을 치면서 빨리 끝내라고 할 때까지는 그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저를 향해 달려오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서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를 향해 벼락같이 달려가 가슴에 검을 긋자 가슴이 갈라지고 피 분수가 솟구쳤다.

그보다 아주 조금 먼저 터져 나온 비명에 핏물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엄청난 쾌감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 요동하고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자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나 확실하게 느끼게 해 주는 순간은 없었다.

눈앞에서 저에 의해 죽어 가는 자들을 볼 때.

더 이상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

더 이상 삶을 향유하지 못할 사람들.

그들을 보는 것으로 마음이 너무 벅찼다.

“죽어라. 이 악귀 놈아!!”

누군가 용기를 끌어 올려 그를 향해 달려왔다.

귀검사영은 보지도 않은 채 팔을 뻗었다.

검 끝에 목울대가 닿았다.

검이 지나가면서 그것이 갈라지는 것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검신을 타고 손잡이에 전해진 것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러다가 곧장 심장으로 전해져 그곳을 달구었다.

“으으으으으아아아아!!”

말할 수 없는 환희 속에서 그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사신이 지상에 내려온 것 같은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벌벌 떨다가 눈물을 흘리고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건 너무 큰 고통이야. 무서운 거 싫지 않은가? 정신이 나갈 것 같지?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지.”

기괴하게 웃음을 짓고 그가 검을 뻗었다.

캉-!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격이 이루어졌다.

귀검사영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앞에 나타난 자를 보았다.

관군이 아니었다.

그 재미없고 단조로운 무복이 아니었던 것이다.

“너는 누구지?”

묻고는 있었지만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그는 제 눈앞에 나타난 이가 정파 무림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위선적인 정파 놈들.

역겨운 것들.

분노가 바닥에 쌓여 있던 눈송이처럼 흩날리다 솟구쳤다.

“큭!”

귀검사영의 검을 막아낸 남자는 그것이 전부였다.

감히 자기가 막을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저릿해 오는 팔을 다른 손으로 붙잡았다.

귀검사영은 기가 막혔다.

“이 애송이가!”

자신의 즐거움을 막은 놈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자가 자신의 상대가 될 만큼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무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더욱 화가 났다.

“뭐야. 이 새끼야!”

그의 검으로 사나운 공력이 급하게 몰아쳤다.

그러나 귀검사영의 앞에 있던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지?’

그냥 그것 한 번만 막으려고 나타났던 것처럼?

그게 자기가 맡은 임무의 전부였다는 것처럼?

그 기척을 놓칠 귀검사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묵직하고 거대한 공력 덩어리가 그의 앞으로 내려서서였다.

이번에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아직 늦지 않았기를 바라네.”

“……?”

귀검사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너는 뭐지?”

이번에도 질문과 함께 그 답을 스스로 깨우쳤다.

하늘이 내린 근골.

어디 가서 덩치가 작다는 말을 듣는 일이 없는 귀검사영보다도 그자는 한 뼘 정도가 더 컸다.

“하북팽가? 설마. 벽력십팔도?”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가 왜 지금 이런 곳에 있다는 말인가.

자기들이 이곳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서?

“뭐가 궁금하지? 너는 입으로 싸우는 자인가?”

팽가의 호법은 서늘한 칼을 들어 올렸다.

귀면의 도만큼이나 무시무시한 형상을 한 칼이었다.

귀검사영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검을 휘둘렀다.

카카카캉-!

귀검사영은 한 번 휘두르고 말 생각이었는데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상대의 칼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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