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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71화 (171/470)
  • 제171화

    171화

    ‘저기에 맞으면 죽겠는데?’

    아진이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겠다.”

    아진이 말하자 소청이 아쉬운 듯 서서히 내공을 회수했다.

    너무 강한 제자 때문에 선수 보호 차원에서 공격을 중지시키다니.

    더군다나 대제를 상대로 싸우고 있으면서 그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아진이 피식 웃어 버렸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석화연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붉은 피가 계속해서 흐르는 것을 보면서 아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젠가 그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석화연린의 모습 위로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져 떠오를 것 같더니 끝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지나갔다.

    “으으으으……!”

    석화연린은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어댔다.

    “으으으으…… 살려줘. 살려줘. 으아아아악!!”

    그는 비명을 질렀고 세 사람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 것이다.

    지표 바로 아래에서 짐승이 지나가는 것처럼 복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위로 향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크기로는 절대 목을 지나서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더니 그대로 목뼈와 턱을 부수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빠져나온 그것은 충독이 아닌 벌레였다.

    놈의 아래쪽은 충독에게 물린 듯 잘려나가 있었다.

    끔찍한 광경에 소청이 구역질을 해 댔다.

    그러면서도 그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시선만은 똑바로 석화연린에게 향하고 있는 소청을 보면서 아진과 린린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충독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몰라. 준비해. 린린.”

    “응.”

    두 사람은 검을 들었다.

    “그런데 사로잡아야 해? 죽이면 안 되고?”

    린린이 말하자 아진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래. 그냥 죽이자. 너무 위험 부담이 커.”

    “응.”

    아진의 검에 내공이 쉴 틈 없이 달려들어 갔다.

    그의 검에는 지금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강기가 맺혔다.

    린린도 마찬가지로 검강을 키워나가며 석화연린의 몸을 노려보았다.

    소청도 제 검을 들고 만일을 대비했다.

    “소청아. 삼매진화를 할 수 있어?”

    “네. 스승님.”

    “불을 만들어. 충독이 튀어나오면 충독에게 불덩이를 날려.”

    “네. 스승님.”

    소청은 검을 검집에 넣어두고 구결을 외웠다.

    아진이 린린을 바라보고 준비가 되었냐는 듯이 눈길을 주자 린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아진이 먼저 달려나가 검을 휘둘렀다.

    석화연린의 몸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거미줄 같은 균열이 뻗어 나갔다.

    아진과 린린의 검에서 떨쳐나간 검강은 석화연린의 몸을 흙먼지보다 더 작은 알갱이로 되돌려 버렸다.

    불덩이를 만든 채 대기하고 있던 소청은 그것을 사용하지도 못했다.

    흙먼지처럼 자잘하게 부서져 튀어 올랐다가 가라앉은 것 중 어디까지가 석화연린이고 어디까지가 충독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불을 던져 볼까요? 충독만 모여서 구슬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소청의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구슬로 만들어지던 것은 충독이 아니라 충독에게서 나온 벌레이기는 했지만 충독은 또 어떨지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소청이 불덩이를 던졌지만 그것은 석화연린의 시신을 재로 만들어 버렸을 뿐 구슬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숙주들의 시신에도 불덩이를 던져 볼까요?”

    소청이 다시 말했고 그때는 정말 가능성이 있을 것 같기도 해서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린린의 품에 꼭꼭 숨어 있던 흑주가 나와서 머리로 소청의 손에 있는 불덩이를 쳐서 떨어뜨려 버렸다.

    아진은 흑주가 아주 기분이 나쁠 때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진이 제갈유진의 목함에 갇혀 있던 흑주를 다시 목함에 집어넣으려 했을 때도 목함 뚜껑을 향해 날아가 쾅 닫아 버린 적도 있었다.

    “흑주가 싫은가 봐. 그건 하지 말자.”

    “네. 스승님.”

    흑주는 그때부터 그들의 주변에 같이 머물렀다.

    충독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겁을 먹었지만 이제는 무서울 게 없는 듯했다.

    “이번에는 괴물이 아니라 그냥 벌레였어. 벌레가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 나는 더 큰 괴물을 만들 줄 알았거든.”

    지난번에 아이들의 몸에서 나왔던 작은 괴물들을 떠올리며 아진이 말하다가 벌레의 숙주가 되었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그들의 시신은 수습하기도 어려워져 버린 상태였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는데.”

    아진은 생각이 많아졌다.

    석화연린을 데려가 밥을 먹이려고 했던 여자는 거의 죽을 운명이었다가 가까스로 그 운명을 벗어났고 싸움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앞으로도 그렇게 해. 두 사람도 말이야. 이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으면 우리가 죽었을 거야. 쓸데없는 동정심을 베풀지 마.”

    린린은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소청은 안타까운 듯했다.

    아진은 소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기가 더 강해지면 그런 사람들도 전부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자. 이제 겨우 하나를 해치운 거야. 나는 소청이를 데리고 이 길로 계속 사도련주를 쫓아갈 테니까 린린 너는 분타에 가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알아낸 사실을 알려줘.”

    “나도 무서운데.”

    린린이 답지 않게 약한 척을 하자 소청이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소식만 전하고 바로 따라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당연하지.”

    “스승님이랑 사고님도 같이 오셔야 할 것 같아. 사도련주랑 대제들이 같이 움직이는 것 같거든.”

    “그럼 소청이를 데려가는 건 위험하잖아.”

    린린의 말에 아진도 그렇겠다고 생각하며 소청을 보았는데 소청은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이랑 같이 갈 거예요. 제가 있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자 아진과 린린이 피식 웃었다.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 * *

    오랜만에 모인 강호의 명숙들이 한 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후기지수들에게 가르침을 주면서 느꼈던 감격의 여운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 상태였고 왠지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아진이 한 말과도 연관이 있었다.

    자기가 가진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는 말이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에 있었던 푸르른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침 분타에 질 좋은 은침차가 있어 제공되었고 그들은 위기의 와중에 잠시 여유를 찾고 있었다.

    린린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명숙들이 있는 곳이니만큼 분타의 무인들이 밖을 지키고 있었는데 린린은 그들이 보고할 때 이미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저희가 대제 하나를 발견하고 죽였습니다. 충독도 같이 죽였는데 오라버니가 다른 대제들과 사도련주의 기운을 느끼고 추적 중입니다. 같이 가 주셨으면 합니다.”

    린린은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을 보며 말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같이 일어섰다.

    “어서 앞장서거라. 린린.”

    “서두르지 마시고 차비를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 대제만 해도 결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싸움을 구경하던 자들을 허공섭물로 끌어당겨 그자들에게 벌레를 집어넣고 숙주로 부렸는데 벌레를 넣고 나자 초절정의 초입도 아니고 절대의 경지인 것 같았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서 소저. 충독을 가진 대제가 아니라 벌레의 숙주가 절대의 경지라고 말한 것인가!”

    그 말은 큰 충격이었다.

    린린도 그 말이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지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구경꾼이 두 명이라 두 개의 벌레를 각자 집어넣었는데 그렇게 해도 능력이 분산되지는 않는 듯했습니다. 절대 경지에 이른 두 명의 무인과 상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가 가지고 있던 벌레는 모두 네 마리였던 것 같은데 지나가는 사람이 더 있었으면 네 명의 절대 고수와 싸워야 했을 겁니다.”

    시간이 급했지만 급하다고 아무 준비 없이 데리고 가는 것보다는 이 자리에서 준비를 어느 정도 시키고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린린이 말했다.

    “지금부터는 내공을 아끼셔야 합니다. 그리고 계산을 하셔야 합니다. 혹시 지금 내공이 소진된 분들이 계시면 내공을 회복하시고 따라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제들과 련주를 발견한 곳에서 제가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린린의 말을 들으며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섰다.

    “어서 가자. 린린. 소청이도 같이 간 것이냐? 두 사람도 같이 싸웠으면 이미 내공의 소모가 많았던 것이 아니냐.”

    천하의 북리의천을 그렇게 겁에 질리게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사도련주와 대제들을 쫓고 있었다.

    린린은 더 이상 그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자리를 떠났다.

    * * *

    아진은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이번만큼은 소청을 그냥 두고 가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청은 아진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자기를 보는 건지 다 알고 있는 듯 조금도 멈추지 않았고 아진이 멈칫거릴 때마다 오히려 더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갔다.

    ‘분명히 도움이 될 거다. 지금의 소청이라면 절정의 단계는 훨씬 넘은 상태야. 어쩌면 초절정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소청의 나이에 그렇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은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소청에게 영약을 아끼지 않았고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추궁과혈을 해 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북리의천은 아진에게 해 주고 싶었던 것들을 모조리 소청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소청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아버지를 통해 전수받은 은씨세가의 무공과 함께 북리세가의 무공에 독고세가의 무공까지 전수받았고 린린에게 배운 천마신공만 해도 여러 가지였다.

    어느 것 하나 간단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는데 모든 무공의 정수를 맛보았다.

    아진은 소청이 자꾸만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웃어 버렸다.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그러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아진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췄다.

    소청은 아진이 경공을 펼치면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아주 멈추는 것을 보며 자기를 멈춰 세우려고 그러는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자들도 멈췄다. 밤을 틈타서 야습을 하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우리도 여기에서 우선 쉬도록 하자.”

    “……네. 스승님.”

    소청은 아진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진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소청아. 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조급증을 내지 않아도 된다. 너는 내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도움이 된다. 너를 보면 이기고 싶어지고 강해지고 싶어지니까.”

    소청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샘처럼 맑은 눈에 습막이 맺히는 듯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자기에게서 찾고 싶어 하는 건가 생각을 하면서 아진은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원래의 아진이었다면 멋대로 자기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아이를 봤다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을 텐데 소청은 특별했다.

    가족도 아닌데 핏줄만큼이나 끈끈한 정이 느껴졌다.

    ‘하긴. 이곳의 가족들도 나랑 핏줄로 연결된 관계는 아니니까 비슷한 건가?’

    “이렇게 급하게 뒤를 쫓게 될 줄 알았으면 삼매진화를 하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내공이 많이 소진됐겠다.”

    아진이 말하자 소청이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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