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169화
석화연린은 작업을 하기 위해 늘 엉성하게 그린 약도 하나를 들고 다녔다.
길을 잃은 소년의 흉내를 내면 사람들은 거기에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었다.
약도는 석화연린이 있는 곳과 전혀 다른 곳이고, 사람들은 그에게 길을 완전히 잘못 든 것 같다고 말을 해 주며 석화연린은 낙심하다가 서럽게 울먹였다.
그러면 많은 여자가 연민을 느끼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집에 가서 하루 정도 쉬다가 가라며 식사를 내어 주기도 하는데 그때 석화연린은 여자들을 겁탈하고 목숨까지 취했다.
충독의 벌레를 사용할 수 있게 된 후에는 여자들의 몸에 장난으로 벌레를 넣어서 여자들이 집안사람들을 전부 죽이게 하기도 했다.
순전히 재미로 하는 짓이었는데 사도련주는 석화연린이 벌레를 그런 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막지 않았다.
벌레를 몇 번이나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석화연린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도움이 되어서였다.
“너. 아무래도 길을 아주 잘못 든 것 같아.”
바느질감을 얻어 가던 여자는 약도를 보면서 혀를 찼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길을 틀었어야 했는데 그때 잘못 온 것 같은데? 도중에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 보지 그랬어? 거기에는 마을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오다가 도적을 만나서 돈을 뺏기고 맞아서 사람들이 무서워서요. 그래서 웬만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은 피했어요.”
석화연린이 말하자 여자는 연민을 느꼈다.
“불쌍한 것. 밥은 먹었니?”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저런. 돈이 없니? 도적을 만난 건 언젠데?”
석화연린은 일이 술술 풀린다고 생각하면서 몰래 웃음을 지었다.
“도적을 만난 건 산에서 내려오면서였고 나흘 전인 것 같아요. 돈은 하나도 없어요.”
“안 되겠구나. 일단은 나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가자. 돈은 주지 못해도 먹을 건 줄 수 있으니까. 어쩌다가 그런 일을 당했는지. 딱하기도 하지.”
여자가 석화연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그가 여자 몰래 더욱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저게 사기(邪氣)라는 건가? 은근히 다르네. 전에는 잘 못 느꼈는데. 풍기는 기운 자체가 다르구나? 사파 놈들은.”
아진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석화연린은 깜짝 놀랐지만 상황을 타개해 나갈 기회가 아직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기를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면 범행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게 좋았을 텐데 허리에 차고 있는 항아리를 믿는 마음에 조금 대담해졌다.
여자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일행은 가족 같았다.
소청 때문에 그들에 대한 경계심은 금방 사라졌다.
그러나 갑자기 사기 운운한 것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저. 먼저 돌아가시오. 저자는 사도련의 잔당입니다. 사도련을 괴멸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 있었소.”
아진은 길게 말하지도 않고 그 정도로 상황 설명을 끝냈다.
석화연린은 기가 막혔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였다.
석화연린은 옆에 있던 여자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거리를 벌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나. 저는 저게 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몰라요. 저 같은 애가 어떻게 사기 같은 걸 갖고 있겠어요? 황제 폐하의 명령은 뭐고 사도련은 뭔데요? 저는 그런 게 뭔지 하나도 몰라요.”
“나도 모르겠다. 그건 저분한테 말씀드려 봐. 억울한 게 있으면 현청에 가서 말해 보고.”
여자는 아이가 억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살면서 오지랖을 부리는 게 얼마나 안 좋은 버릇인지 알고 있었다.
“현명하네요. 소저.”
린린이 말하자 여자는 잠시 더 눈치를 보더니 이내 돌아서서 전력으로 달렸다.
“누나…… 누나. 저 좀 도와주세요. 그렇게 가 버리지 마시고요. 이 사람들이 저한테 왜 이러는 건지 몰라요.”
그래도 여자는 마구 도망쳤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하나씩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약도를 보는 동안 자신의 몸을 끈적하게 보는 것 같던 시선하며, 우연인 것처럼 스치며 자꾸 손을 만지거나 몸에 접촉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치가 떨렸던 것이다.
“작작 좀 하지? 어차피 다 들킨 것 같은데.”
린린이 말하자 석화연린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너희는 뭔데 그러지? 거의 다 성공했는데.”
아진의 말대로 그에게서 진한 사기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품에 묶어두고 있는 항아리가 의심을 더욱 짙어지게 만들었다.
채영각에서 봤던 항아리와 닮은 형태였다.
“련주가 되게 멍청한가 봐. 저런 건 쉽게 바꿀 수 있는 거잖아. 항아리를 똑같은 걸 쓰다가 들킬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나 보지?”
린린이 말하자 아진도 웃었다.
“사도련주는 어디에 있지? 다른 대제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석화연린은 눈앞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무슨 일로 자기를 막은 건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도련주와 대제까지 운운하는 것을 보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일이 귀찮아지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항아리 얘기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는데 나중에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사도련주가 한 번 대제들을 몽땅 잃은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때 그자들에게도 항아리에서 벌레를 키우게 한 모양이었다.
“왜 나한테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는데?”
석화연린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셋 중 한 사람에게 벌레를 넣을 수만 있다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했다.
그게 어렵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자신의 무위만 해도 초절정을 넘어섰기에 눈앞에 서 있는 애송이 셋을 해치우는 것은 전혀 어려울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그들을 보고 있을 때 아진이 먼저 검을 빼어 들었다.
“항아리는 깨지 말고 가져와 봐. 오라버니.”
린린이 말하자 아진이 그녀를 보았다.
“무슨 소리야? 나는 소청이를 지켜 줘야지. 네가 갔다 와. 린린. 항아리 안 깨지게 조심하고.”
린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진을 보더니 별수 없겠다고 생각한 듯 몸을 날렸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소리가 났다.
사람이 아니라 검 한 자루가 날아가는 것 같은 소리.
린린이 서 있던 곳에는 잔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고 석화연린은 분명히 린린을 보고 있다가 순식간에 그녀를 놓쳐서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목과 어깨, 팔에 동시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때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말도 안 되는 노릇이었다.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생각했을 때 그의 팔은 부러져서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무언가 따끔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침?’
그 생각을 하고 고개를 내려 제 몸을 보자 언제 날아와 박힌 건지 알 수 없는 굵은 장침 수십 개가 요혈에 꽂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그렇게 형편없이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돼.’
만약 그것이 자기만의 문제라면 그는 웃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대제였다.
사도련주의 대제.
자기가 이곳에서 멀뚱히 서 있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당했다는 것을 안다면 련주는 당장 그의 몸을 가르고 충독을 뺏을 터였다.
충독을 뺏기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힘없는 백성들을 등쳐먹고 협박해서 살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누려왔던 삶은 전부 다 헛된 꿈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시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대제다. 나는 사도련주님의 대제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그는 항아리를 더듬었다.
그것을 덮고 있던 뚜껑을 치우고 손을 집어넣자 벌레가 물컹하고 잡혔다.
린린은 말도 안 되게 꺾여 있던 손이 그 상태 그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충독 때문인가 보지? 이 꼴이 됐는데도 움직일 수 있는 건?”
석화연린은 린린이 하는 말이 놀라웠다.
이 자들은 도대체 뭔데 충독에 대해서까지도 이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는 건가 했던 것이다.
“재주가 많네. 그래서 이제 어쩌려고? 그 벌레를 나한테 집어넣게?”
린린이 석화연린의 항아리를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구경에 나선 손님 같은 얼굴이라 화가 나서 한 번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어 버리고 싶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사람을 조롱할 수 있는지 보자고 생각하며 그가 손날로 린린의 복부를 찌르려 했을 때 린린은 가공할 만한 호신강기로 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손가락이 부러졌겠지만 미리 내공을 불어 넣은 상태라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고 석화연린은 린린을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린린에게 벗어나 거리를 벌렸다.
팔은 여전히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린린은 충독이 그런 식으로도 효과가 있는 건가 보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석화연린에게 몸을 날렸다.
처음에는 무방비로 있다가 당했다지만 한 번 당한 수법에 다시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그는 몇 번이나 몸을 피했다.
린린도 린린이었지만 그런 그녀를 계속 피하는 석화연린도 대단했다.
“저러면 내공 싸움이 되는 건가요. 스승님?”
소청이 묻자 아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린린이 질 거야.”
“네?”
소청이 깜짝 놀라 아진을 보았다.
아진이 특별히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한 것도 아니었기에 린린도 그 말을 들었다.
린린은 아진이 왜 그랬는지 뻔히 알 것 같으면서도 아진이 의도한 대로 일이 돌아간다는 것에 더 화가 났다.
“와. 나도 진짜 단순하네? 오라버니가 노리는 대로 되냐, 왜?”
린린이 멈춰 서서 고개를 옆으로 툭 툭 움직이자 그때마다 뚝, 뚝 하고 뼈가 꺾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나는 기꺼이 너랑 놀아주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꼬마야. 그런데 우리 오라버니가 나를 놀릴 거야. 시간이 오래 걸리면.”
린린이 석화연린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할 때였다.
석화연린이 다시 한번 몸을 풀쩍 날리더니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린린은 그가 뭘 하려고 그러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두 남자가 허공을 날아 석화연린에게 오는 것을 보았다.
‘설마…… 이게 허공섭물이라고? 사람에게 허공섭물을 사용했고?’
그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 거리를 생각했을 때 절대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있다는 것을 린린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고 아진은 별로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걸 알았으면 알아서들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지 설마하니 멈춰 서서 그걸 구경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재미있는 게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더니 남들은 다쳐도 자기들은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싸움 구경도 정도 껏이지.
생사가 오가는 싸움을 넋 놓고 구경하고 있다가 당하다니 기가 막히고 동정도 생기지 않았는데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석화연린은 손날을 칼처럼 사용해 두 사람의 몸을 가르고 그대로 벌레를 집어넣었다.
린린에게 시도했다가 막힌 것을 그자들에게 사용한 것이다.
“젠장!”
린린은 구경꾼들 때문에 싸움이 복잡해지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진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진도 딱히 도와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어차피 벌레가 들어 있는 두 사람과 석화연린까지 해서 세 사람이 전부 절정에서 초절정의 무위를 갖게 된다고 하더라도 린린에게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진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진에게 의외로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