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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66화 (166/470)

제166화

166화

그래도 린린과 나눈 대화는 아진에게 큰 도움이 됐다.

사도련주의 능력이 완전히 엉뚱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충독에 대비하거나 충독보다 더 강한 벌레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꽉 막힌 것 같은 생각은 점점 사라졌다.

* * *

커다란 원형 탁자의 주위에 다섯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라고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모두 몸 안에 충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만하면 소문이 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련주님.”

염사가 말하자 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몸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련주를 대하는 대제들의 표정은 지극히 공손했다.

련주가 그때까지 한 일 중에 가장 중점을 둔 것 중 하나는 대제들이 자신을 함부로 여기지 못하게 하는 것에 있었다.

다섯 명의 대제를 두기까지 그는 그들이 숱한 사람들을 죽이게 했다.

제서에 숨어든 련주는 조그만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작은 흑도 방파 하나에 숨어들어 갔다.

그리고 점차 그곳을 장악해나갔고 인근의 흑도 방파들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웠다.

흑도 방파는 그러고 나서야 아진이 처음 만났을 때의 혈천방 정도가 될 수 있었다.

아직은 남들의 눈에 띄는 것도, 입으로 전해지는 것도 고맙지 않아서 이름도 만들지 않았는데 그곳에 재주를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다.

사도련의 잔당도 나타나 그 아래로 들어왔고 그 외로는 정파 무림인으로 활동하다가 파문당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의 사이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들이 속속 련주의 아래로 들어왔고 련주는 그들에게 새로 만든 충독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로 한동안 그 거대한 제서 지역이 고독을 가둔 항아리가 되었다.

그 속에서 대제들은 서로 싸우며 충독을 뺏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련주는 그것을 묵인했다.

가장 강한 자가 충독을 갖게 될 거라는 원칙에 따라 사람들은 싸우고 또 싸웠다.

충정만 사라지지 않으면 되었다.

충정이 사라지면 련주는 가차 없이 그자를 베었다.

새로운 충독을 만들면서 련주가 주의를 기울인 것 중 하나는 자기가 대제들보다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는 대제들을 시켜 영약을 구해오게 했고 대제들은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앞다투어 그에게 영약을 구해다 주었다.

문파나 무가마다 고작 한두 개 정도밖에 보유하지 않고 있는 무가지보를 훔쳐다 주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소문나지 않은 것은 그 귀한 영약을 도난당했다는 말이 전해질 때의 파급효가 더 커서였다.

영약을 도난당했다는 소문이 나면 금방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 같아 그 일을 당한 곳마다 함구령을 내렸다.

그다음은 무공비급이었다.

련주는 영약과 무공비급으로 서서히 자신을 단련해 나갔다.

그를 알고 있던 사람이 다시 련주를 본다고 해도 련주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외모부터 기세까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명을 내리시면 목숨을 바쳐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련주님.”

그게 문제였다.

그가 명을 내리지 않으면 그들은 스스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도록 지금껏 훈련하게 한 것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순간에는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적어도 소월검수 정도의 사람만 있어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관군들이 사파의 씨를 말려 버리려고 하는데 관군들에게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주면 어떨지요. 련주님?”

그 말을 한 것은 화산파의 제자로 강간을 일삼다가 파문당한 환락현자였다.

화산파 장문인까지 통틀어 화산파에서 가장 강한 열네 명의 검객으로 구성된 매화 십사 수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던 그였지만 음적으로 몰리며 화산파에서 쫓겨났다.

그를 쫓아내면서 단전을 부수지도 않고 사지근맥을 절단하지도 않은 것은 화산파의 본의가 아니었다.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어서 놓아준 것뿐이었다.

그 후로도 화산파에서는 수십 명의 추살조를 보내 그를 죽이려 했지만 그때마다 귀한 인재들만 잃었다.

“할 수 있겠는가.”

“예. 련주님.”

환락현자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충독에게서 나온 벌레를 몇 마리 더 얻고 싶었다.

그것만 몇 마리 더 있다면 충분히 현청들을 괴멸하고 다닐 수 있을 듯했다.

련주도 그의 뜻을 짐작했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숨을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요란하게 싸움을 걸어 주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성주의 관저를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주의 아들에게 정혼자가 있다는데 정혼자가 무가의 여식이라고 하더군요. 그 여자에게 벌레를 집어넣으면 손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내부에서 공격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좋은 계획이군. 좋은 생각이네.”

련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서로를 견제하듯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공적을 세우지 않으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런 공적도 없으면 충성심이 약하다며 련주가 충독을 거두어갈 수도 있었다.

지금껏 그런 일은 수도 없이 봐 왔다.

충독을 뺏긴 자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 * *

제서의 정의맹 분타에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아진은 짱돌을 비롯한 향화문의 정보원들 몇을 데리고 혈겁이 일어난 창가 철방을 보고 돌아온 길이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도착하는 가운데 유독 북리의천과 소청만은 늦어지고 있었는데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하고 그들에게서 협조를 얻어 내겠다고 하더니 그 일이 순탄치가 않은 듯했다.

당채운이 멀리서 다른 이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아진이 돌아온 것을 보고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본 린린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당 소협은 강아지 같아. 오라버니만 보면 좋아 죽겠나 봐. 그런데 다른 소협들도 다들 당 소협이랑 비슷해. 왜 오라버니의 멋짐을 알아보는 건 소협들밖에 없을까? 여협들은 왜 다가오질 못하는 거지? 멀리서만 바라보다 말고.”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려고 했는데 당채운이 달려오는 걸 보고 다른 사람들도 두리번거리다가 한꺼번에 아진에게 다가왔다.

“소협.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발목이 잡혔습니다.”

“소협이라면 응당 정의맹의 후기지수 모임에도 참석을 하셨어야 할 텐데 맹주님의 제자이신 소협을 이제야 처음 뵙게 되다니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습니다.”

아진은 다가와서 경쟁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조금 난감해졌다.

그들은 사도련주를 잡는 데 공을 세워 가문의 명성을 높이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을 뿐 사도련주가 얼마나 무서운 상대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이어지는 말을 들어 보면 그들이 어떤 생각인지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러 소협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번에 사도련주의 목을 베는 것은 이 사람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오늘을 위해서 반년간 폐관 수련을 불사했소.”

“본인은 이 일을 위해 영약을 먹고 내공을 증진했소. 이 자리에 있는 분 중에 이갑자의 내공을 가진 분은 없을 것으로 생각되오만.”

“나는 검강을 자유롭게 쓸 수 있소.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면 후기지수 중에 검강을 가장 빨리 깨친 이가 나라고 하셨소. 물론 산본의가의 소협과 소저는 제외해야 하는 거지만 말입니다.”

시장통에 온 것처럼 시끌벅적하게 이야기가 오고 가는 동안 당채운은 자기가 다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마치 레이드 경험도 얼마 없는 헌터들이 새 장비를 사고 장비 자랑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과도 비슷했다.

그런 이들은 악의가 없다고 해도 필시 문제를 만들곤 했다.

자기들이 죽어 넘어지는 건 상관없다.

죽어 넘어져서 발치에 걸려 아진의 진로를 방해한다는 게 문제였다.

“소협. 여기에 계시는 동안 제가 소협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하겠습니다. 저만 믿으시지요.”

“서 소협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도우라는 것이 가주님의 명이었습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명만 내리시지요.”

쓸데없이 내보이는 의욕들까지.

아진은 실소가 나오는 것을 참았다.

그러고 보면 그들은 상당히 오래 이어진 평화의 시대를 살았다.

평화가 오래간다는 것은 꼭 좋은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여러분이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공적을 쌓고 싶어서건 사문의 명성을 위해서건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상 나는 여러분이 모두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아진이 말하자 몇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고작 살아남는 거라는 말에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그들은 살아남으라는 말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명령인지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여러분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오.”

“그것은 아닙니다만…… 말씀을 좀 섭섭하게 하신 감은 있습니다.”

누군가 말하자 다른 이들도 그 말이 옳다며 불만을 표했다.

그러자 아진이 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여기에서 내 검격을 받고 반 각이 지나도록 버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내가 인정해 주겠습니다.”

반 각이 지나고도 버티기만 하면 인정을 해 주겠다니.

그런 무시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반박할 틈도 없이 아진이 날아올랐다.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검을 내려놓으시오. 검을 들고 있는 자는 해 볼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소.”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 중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간 사람은 몇 사람 되지도 않았다.

당채운은 검을 빼 들었다.

그동안 시간이 많이 흘렀고 자신도 그 자리에 안주해 있지는 않았다.

그는 아진이 말하는 것처럼 공적을 탐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진과 겨뤄 볼 수 있다면 그 기회를 놓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당채운을 보며 하나둘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으아아악!”

누군가는 손등에서 피가 솟구쳤고 그와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사람은 어깨에서 팔이 빠졌다.

언제, 그리고 무엇에 찔린 건지 알지도 못한 채 발등에서 피가 솟아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멍하니 서 있다가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에 넋을 놓고 있던 한 사람은 갑자기 아진이 다가와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듯이 잡고 내던지자 전각 벽에 몸이 박혀버렸다.

사람들은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퍼지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얘기를 나누던 사람의 기세가 순식간에 그렇게 변해 버리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억울하고 서럽기까지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실감각을 제대로 못 찾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아직도 자기들에게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진이 자기들을 봐줄 거라고 헛된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오해였고 아진은 검풍을 피워올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것이 그저 겁만 주고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맹렬한 검의 폭풍이 휘몰아쳤고 사람들의 옷과 함께 살갗이 찢어져 나갔다.

누구의 피인지 알지 못할 것들이 어우러지고 섞여 허공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그, 그만……!”

누군가 검을 던졌다.

싸울 생각이 없으면 그러라고 했던 것이 뒤늦게 떠오른 듯했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여기저기서 검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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