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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64화 (164/470)
  • 제164화

    164화

    -이 일은 특별히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으니 이남 형님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폐하.

    -짐은 준비가 되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어두운 신형이 황제의 침전을 떠났다.

    * * *

    제서.

    “소…… 소소야. 네가 왜…… 네가 왜 그러는 것이냐. 할애비다. 할애비를 못 알아보는 것이냐……!”

    “장주님. 명을 내려주십시오. 죽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살려둔 채로 싸우는 것은 한계입니다. 이러다가는 저희가 전부 죽습니다. 장로님!”

    “안 되네. 절대 소소를 죽이면 안 되네. 소소가 누구인지 알지 않는가. 소소는 내 손녀네. 내 아들도, 며느리도 전부 죽었어. 나한테 남은 건 이제 소소뿐이라는 말이네.”

    “하지만 장주님. 저희는 소소 아가씨를 살린 채로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소소는 검을 휘둘렀다.

    고작 열네 살짜리 아이가 휘두르는 검은 제 할아버지의 방에 얌전히 모셔져 있던 애검이었다.

    그것을, 그동안 한 번도 검술을 배워 본 적이 없는 평범한 여자아이가 휘둘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되는대로 휘두르는 검이었지만 강하고 빨랐다.

    아이의 힘으로 휘두르는 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에 허공에 검의 잔상이 생겨나는데 하나하나가 전부 다 실초였다.

    그 검격에 맞아 쓰러진 이가 벌써 열 명이 넘었다.

    장원을 지키는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두 죽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은 것 같은데 장주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소소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원래 쌀쌀맞은 인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날은 얼굴에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말을 하지도 않았다.

    장주가 아무리 목놓아 외치며 왜 그러는 거냐고 해도 그저 검을 휘둘러 사람들을 베어 나갈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주님!”

    다른 이들은 이제 장주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대주를 공략하기로 한 것 같았다.

    대주는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늘 사리 분별이 뛰어났던 장주였지만 그 순간에는 자기들을 위해 바른 판단을 내려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죽여라.”

    “예!”

    대원들은 그때부터 소소를 노렸다.

    그 말을 들은 장주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소소를 죽이면 안 되네! 내 명이다! 너희는 누구의 명령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알지 않으냐! 이 자리에서 소소를 죽이는 놈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장주가 소리쳤지만 그 말을 들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어서였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데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검을 들고 소소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소소 역시 마주 달려왔다.

    그들이 가진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장주님의 명령을 듣지는 못하겠지만 소소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그들 중 대부분은 그래도 일단 자기들이 합격을 가해서 소소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기만 한다면 소소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오해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소소.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

    그러나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 다가온 건지 모를 검이 살을 가르고 내장을 베어내며 뼈에 닿았다.

    뼈를 긋는 검의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베어진 옷자락에서 펄럭이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휘청이며 한 바퀴를 돈 신형은 어느새 생명이 떠나간 몸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소소의 검을 보며 도대체 저게 뭔가 했다.

    저런 초식이 있었던가?

    소소가 어디에서 그런 것을 배웠다는 것인가.

    그저 믿기지 않는 안력으로 모든 공격을 미리 보고 그것을 막으며 비어 있는 공간을 찾아 그곳으로 공격을 해 나가고 있는 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절대 그들의 상식선에서 통하지 않는 이야기라서 그랬을 것이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몇몇 사람은 몸이 벌벌 떨려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죽이지 않으려고 해서, 그동안 소소를 봐 주려고 해서 못 죽인 것이 아니라 소소를 상대할 힘이 자기들에게 없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얼굴에서 떨어진 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군가는 피를 쏟았다.

    주변의 모든 것이 비정상으로 흘렀다.

    소소가 볼 수 없던 곳에 있던 사람이 기습을 감행했다.

    기척을 느끼지 않았다면 소소는 그 공격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소소라면 기척을 느끼지 못해야 옳았다.

    소소가 들고 있던 검은 앞에 있던 사람을 향해 뻗어 가고 있었고 그 검을 다시 회수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짧더라도 시간이 걸리기는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시간이라면 어쩌면 공격이 성공할 수도 있었다.

    모두가 거기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부우웅-!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발로 차서 허공으로 떠올린 소소가 그 손잡이를 때려 옆으로 날렸다.

    옆을 보지도 않고 날린 것이 정확히 대원의 몸에 날아가 꽂혔고 그에게서 단말마의 비명이 나왔다.

    이제는 비명을 지를 여력도 남지 않은 듯 사람들은 장원에서 도망치기 위해 서로 달렸다.

    몇 개의 검이 같은 방식으로 허공을 날아서 짓쳐들었다.

    슈욱-.

    검이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갑자기 멈췄을 때 그 소리는 살을 가르는 소리로 변해 있었다.

    “으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몇 개나 겹치며 허공을 가득 채웠다.

    “아니야. 안 돼. 오지 마. 오지마아아아아!”

    의미 없는 소리가 흩어졌지만 그 소리는 어차피 곧 사라졌다.

    소소에게는 이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아이를 더 이상 소소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이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사람은 이제 다섯을 조금 넘었다.

    소소는 커다란 검을 들고 다니는 것이 거치적거린다고 생각했는지 돌연 검을 던져버렸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한 채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쩌면 유일한 기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도망치던 것을 멈추고 다 함께 소소를 향해 달려갔다.

    검으로 싸우는 것을 포기한 것일 뿐 싸움 자체를 포기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대원의 얼굴에 그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허리를 젖혀 피하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날아온 주먹은 그의 얼굴을 그대로 부쉈다.

    고개가 있던 자리를 훨씬 지나서 소소의 주먹이 나왔다.

    믿을 수 없는 괴력을 발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의 피부이기는 한 건지 소소의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났다.

    허옇게 드러난 뼈 위에 핏물이 고였다.

    대원의 얼굴은 부서진 채 옆으로 기울었다.

    얼굴 살가죽이 찢어졌지만 완전히 찢어진 것은 아니라서 더욱 기이한 형체를 이룬 채 아래로 스르륵 쏟아졌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짓을……! 죽어. 죽어! 너는 사람도 아니야. 이 괴물아. 죽어. 죽어어어어어!!”

    소름 끼치는 비명이 허공을 겹겹이 덮었다.

    바람을 가르는 검의 소리는 소소의 움직임과 비교해 그렇게 느릴 수가 없었다.

    소소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더 움직였다.

    그녀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윽!”

    갑자기 소소의 팔이 기이하게 위로 툭 움직였다.

    공격하던 움직임과 일관성이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런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던 소소는 다시 공격을 이어나갔다.

    그 후로도 같은 일이 몇 번 더 일어났다.

    다음에는 팔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복부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려는 것처럼 앞으로 나오다 사라졌다.

    태아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툭. 투둑. 툭. 툭.

    한두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누군가는 채 쓰러지지도 못한 채 나무에 꽂힌 채로 죽었다.

    그의 몸에서 흐른 피가 웅덩이를 이루었고 몸에서 계속 떨어지는 핏방울이 웅덩이에 파문을 일으키며 소리를 내었다.

    똑-.

    똑-.

    소름 끼치는 소리에 몸이 떨릴 듯했지만 그런 소리에 반응할 수 있는 자는 장원에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소소는 자기가 죽여야 할 사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소소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앉아서 쉬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죽은 자들을 안타깝게 하는 마음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이미 소소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멍하니 서 있던 소소의 몸이 튕겨 나갔다.

    내부에서 격렬한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몸이 움찔거렸다.

    “크아아아!”

    그것은 입이 갑자기 크게 벌어지면서 난 소리였다.

    소소의 눈이 커지고 눈동자에 실핏줄이 터졌다.

    이지를 상실했다는 것이 그렇게 큰 행운이라는 것을 소소는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목뼈가 부러졌다.

    그곳을 관통하기에 너무 큰 것이 나오느라 그랬다.

    이어서 턱이 부서지고 얼굴 형체가 전부 다 너덜너덜해졌다.

    입술이 옆으로 길게 찢어지고 그곳에서 성인 남자의 허벅지만 한 벌레가 기어 나왔다.

    더 이상 소소를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봐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장원의 지붕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일어섰다.

    바람이 미친 듯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 흔들어댔다.

    길게 늘어뜨린 하얀 머리카락이 사방을 향해 마구 솟구쳤다.

    그는 소소의 몸이 완전히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직 장원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소소를 서둘러 죽일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소소의 몸에서 나온 벌레는 소소를 떠났다.

    이미 내장과 살을 전부 다 파먹고 나온 것이라서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은 듯했다.

    지붕 위의 남자는 그제야 몸을 날렸다.

    그가 수결을 맺자 벌레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거의 주먹만 하게 줄어든 벌레가,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항아리에 빨려 들어왔다.

    ‘차라리 그때 실패한 게 나았어. 안 그랬으면 그때 만들었던 벌레에 만족했을 텐데.’

    새로 만든 충독의 벌레는 특별히 공격을 당하지 않는 한 시간이 됐다고 죽어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 번의 전투로 학살을 마치고 나면 살상력이 더욱 늘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부터 거의 한 달을 쉬어야 하기는 하지만 서두를 것은 없었다.

    “수고했다. 이제 쉬고 있어.”

    남자는 항아리의 뚜껑을 닫기 전에 벌레를 쓰다듬어 주었다.

    남자, 사도련주의 신형이 그곳에서 사라졌고 그가 떠난 자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정확히 소소의 몸에서 솟아오른 불길은 소소의 몸만을 태워 버렸다.

    * * *

    장원에 벌어진 참극이 알려진 것은 그곳과 거래하던 사람이 장원을 찾아오면서였다.

    철방의 일을 맡아 하는 장원은 철광을 받아서 정해진 물건을 만들어 납품해야 했다.

    모두 세 개의 가문에서 분업을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들은 비싼 값에 각지로 팔려나갔다.

    만들어지는 물건들이 워낙 고가의 무기에 보검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도 간혹 나와서 그곳에서 만들어진 것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 장원에는 많은 무인이 상주하며 물건과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이, 이게……!”

    눈이 뒤집힐 정도로 놀란 이가 장원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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