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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60화 (160/470)

제160화

160화

한편 선이남은 황제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편안해지고 있었다.

궁의 누구도 황제를 선이남처럼 편하게 대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황제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 그런 식으로 자신을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상당히 의지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물린다고 해도 밀영들까지 물리기는 어려웠는데 선이남은 기막을 두르는 것이 가능해서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기막을 두르고 말을 했다.

기막을 두르는 것도 최근에야 가능해졌는데도 황제는 선이남을 독촉해서 좀 더 많은 무공을 익혀 보라고 했다.

황제가 생각하기에는 선이남이 더 많은 무공을 익힐 수 있으면 자기도 그만큼 많은 것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심법의 성취는 이만하면 빠른 것이냐. 선 의원.”

황제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나 선이남은 황제가 정해 놓은 답은 안중에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제가 아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폐하는 아주 느린 편입니다.”

“…….”

황제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제 슬슬 단전에 내공 쌓이는 재미를 느껴가고 있었는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잔혹한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폐하.”

“네가 아는 사람이 누구라는 말이냐!”

“아진이와 린린입니다.”

“…….”

황제는 자기가 왜 선이남을 곁에 두기로 한 것일까 하고 한숨을 쉬었다.

선이남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섬세한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을 고르는 게 좋지 않았을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이남이 아니면 안 되었다.

선이남이 한 거면 자기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처음에 선이남을 고른 거였기에 가끔 성질이 나도 꾹 참았다.

“어쨌거나 이만하면 잘하는 것이 아니냐.”

“꼭 마음에 든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막 배우기 시작한 단계이니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해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눈을 꾹 감으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신을 달랬다.

“그래도 이제 운기조식은 잘하고 있다.”

“그것은 어려울 것이 전혀 없으니 당연한 것입니다. 폐하. 아진이 가르쳐 드린 심법은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그 효과는 무시할 것이 안 됩니다만 일단 그걸 익히기만 하면 운기조식을 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

“닥쳐라, 네 이놈!”

결국 황제가 폭발했고 선이남은 눈이 동그래졌다.

“폐하. 혹시 소신이 잘못을 하였는지요.”

황제는 그러는 게 더 화가 났다.

선이남이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선이남을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되었다.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한두 번 그런 일이 반복되고 났더니 선이남이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고 말을 잘 하지 않게 되었고 황제는 앓느니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선이남과 얘기를 할 때는 그냥 자기가 참기로 했다.

아진에게 받은 일갑자의 내공을 잃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을 하고 매일매일 운기조식을 하면서 하루 치의 내공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다 보니 이제 뿌듯하기도 하고 그 정도면 자기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선이남은 그런 황제에게 슬슬 전음을 가르쳤다.

구결을 열심히 외운 황제는 선이남이 가르쳐 준 대로 전음을 해 보려고 했지만 그게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황제는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힘을 내고 싶어서 선이남에게 전음을 익히는 게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거냐고 물었고 선이남은 입을 꼭 다물었다.

왠지 지금 자신의 입안에 있는 말을 전부 다 하면 황제가 불같이 화를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폐하. 소신이 폐하의 황의인데 소신이 폐하를 자꾸 분노하시게 만들게 되니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기가 막혀서 선이남을 노려보았다.

자기가 봐 온 사람들은 다들 구결 한 번 듣고 바로 전음을 시작하더라는 말을 그렇게 하는 것 같아서 기가 막혔던 것이다.

“되었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런 소리를 한 것인지 모르겠다.”

황제의 말에 선이남은 나름대로 황제를 위로한답시고 말했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전음을 잘 못 하는 무인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폐하. 폐하만 그러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닥쳐라. 선 의원.”

선이남은 활짝 웃었고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시점에서 웃을 수가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열흘 안에 내가 그것을 할 수 있게 한다면 너에게 상을 내리겠다. 원한다면 황금으로 침을 만들어서 줄 수도 있다. 산본의가 의원 모두에게 그럴 수도 있다.”

“거기에 의학당 의원들도 더 하시면 어떨지요. 폐하?”

장원을 줘도, 경비 무사를 줘도 주는가 보다고 생각할 뿐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던 선이남이 의욕을 보였다.

“그것은 닷새 안에 하면 그러는 것으로 하자.”

선이남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날부터였다.

선이남은 수시로 기막을 둘렀다.

황제가 걱정돼서 기막을 이렇게 자주 두르면 밀영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냐고 할 정도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면 잠시 정신을 차리는 것 같던 선이남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또 그러고 있었다.

“구결은 다 외우셨습니까, 폐하?”

“구결은 진작 다 외웠다.”

“해 보십시오.”

황제는 자기가 그 나이가 되고 구결 외운 것을 검사받게 될 거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선이남의 앞에서 그러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이남의 입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폐하. 그 부분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제가 몇 번이나 주의를 드렸는데 그렇게 하십니다. 구결은 단순히 발음과 뜻에만 신경을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음도 각자 전해지는 방법이 다르고 폐하께서 익히신 심법으로 할 수 있는 전음은 다른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 구결 사이 사이의 간격도 전부 다 중요합니다.”

“……그래. 그런데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선이남은 황제가 잘못한 것을 알려주었고 황제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학을 시작했다.

“구결도 제대로 못 외워 놓고서 지금까지 전음이 안 된다고 그러고 있었으니.”

나중에는 눈치없는 선이남이 나서서 황제를 다독여 줘야 했을 정도였다.

닷새가 다가오는 시점에 선이남은 애가 닳아서 늘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황제가 정무를 보는 동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을 보는 선이남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고 결국 열흘 안에 그것을 할 수 있게 되면 의학당에 있는 의원들에게도 황금 침을 상으로 내리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선이남의 압박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았는데 그래 봤자 얼마 가지도 않았다.

겨우 닷새를 더 벌어둔 것뿐이라 어차피 그 시간이 금방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여드레가 되는 날.

기적적으로 황제가 전음에 성공했다.

내공을 사용해 선이남에게 전음을 보내는 맹연습에 돌입했던 황제는 선이남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오늘도 안 되나보다고 생각하며 반쯤은 포기를 한 상태였다.

선이남도 황제만큼이나 빨리 황제가 전음을 하는 것에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제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예, 폐하.”

선이남이 말하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제히 선이남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뭐래? 왜 갑자기 혼잣말을 해? 내가 부른 것도 아닌데.

황제는 혼자 중얼거리듯 전음을 했고 선이남은 그제야 무슨 일인지 제대로 깨닫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제도 처음에는 멍하니 있다가 다음 순간에 자기가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황제는 선이남보다 판단력이 뛰어났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유연하게 대처했다.

“황의가 그동안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군. 눈을 뜨고 졸았던 모양이야.”

선이남도 황제가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깨닫고 맞장구를 쳤다.

“송구합니다. 폐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네. 황의가 밤낮없이 고생한 것을 누가 모르는가.”

황제는 그러면서 자기가 정말 전음을 보내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이제 황의는 여기에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먼저 나가 보게.”

“예. 폐하.”

황제는 선이남을 밖으로 보내놓고 자기도 조금 후에 밖으로 나갔다.

-정말 내 말이 들리는가. 뒤를 돌아보지 말고 말하라.

-예. 폐하. 드디어 성공하신 듯합니다.

황제는 선이남이 보낸 전음을 듣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느라 무진 애를 썼다.

-이제 황금 침을 주셔야 합니다. 폐하.

-그래. 알았다. 내가 뭐라던가. 나한테 재능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누가 이렇게 빨리 전음을 깨쳤겠는가.

-그것은…… 예. 폐하. 역시 폐하이십니다.

그렇게 삶의 지혜를 깨닫는 선이남이었다.

그때부터 황제는 신이 나서 선이남에게 전음을 보내는 걸 연습했고 선이남은 황제가 밤낮없이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죽을 것 같았다.

황제만 아니면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말이라도 해 볼 수 있을 텐데 황제가 누구던가.

자기에게 잘해준다뿐이지 남의 목숨 거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선이남은 그 생각을 하면서 꾹 참았지만 빨리 황제가 전음 보내는 일에 싫증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황제가 쓰러졌다.

전음을 보내는 일에 공력이 소모된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에게 있던 공력을 전부 다 사용해 버려서 그런 거였는데 선이남은 그것이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폐하. 이렇게 아무 때나 전음을 사용하시다 보면 선천진기까지 다 사용하시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법입니다. 대개는 내공이 소진되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가는데 폐하께서는 그런 과정을 건너뛴 채 아진에게서 내공을 받으신 것이라 그런 것을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렇…….

그 말도 전음으로 하려다가 황제는 전음을 멈추었다.

그것을 하는 동안에도 내공이 소모되고 지금 자기가 선천진기를 사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전음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열흘은 넉넉히 그렇게 하시고 그 후에 내공이 다시 돌아오고 나서도 전음을 사용하시는 것은 하루에 이각이 넘지 않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각이라고 할까 하다가 그러면 황제가 너무 풀이 죽을 것 같아서 통 크게 이각이라고 해 주었다.

선이남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한 시진 정도는 전음을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 황제가 정말 한 시진을 꼬박 쓸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전음도 전음이지만 선이남은 원래 남이랑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런 성격이 황궁에 들어왔다고 갑자기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좀 혼자 있고 싶은데 전음에 재미가 들린 황제 때문에 개인 생활을 전부 포기하고 있던 선이남으로서는 황제가 쓰러진 게 너무 기뻤다.

그래도 선이남의 노고와 황제의 열정으로 황제는 적어도 전음 하나는 확실하게 할 수 있게 됐고 황궁에는 은밀하게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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