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158화
“진각을 밟을 것입니다. 바닥이 울리고 땅이 흔들릴 것이니 저를 붙잡으시지요. 폐하.”
선이남의 말에 황제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선이남을 붙잡았다.
아진은 황제와 선이남이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한 듯 그 순간 진각을 밟았다.
우르르르르-!
요란한 굉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리고 흙더미가 솟구치더니 그것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조금 전에 만들어진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흙더미가 왜 유독 아진의 명에 복종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황제는 멍하니 선이남을 바라보았다.
“선이남. 너도 저렇게 할 수 있느냐.”
“절대로 못 합니다. 폐하. 하지만 저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무림의 누구도 저렇게 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입니다.”
“검신 대협도 하지 못하는 것이냐.”
“예. 폐하. 비슷하게는 하시겠지만 저렇게까지는 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검신 대협이 저 구덩이를 다 메우려고 했으면 아마 진각을 여덟 번에서 열 번은 밟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검신 대협이 그 정도이고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라고 해도 서른 번은 넘어야 할 것입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앞의 상대는 함부로 경쟁상대로 삼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황제가 선이남을 바라보았다.
“정확한 비교를 위해 너의 솜씨도 보고 싶구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만 저는 이미 내공이 거의 소진 돼서 거의 하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 그래도 해 보라고 하신다면 해 보기는 하겠지만 그러면 저는 경공을 펼칠 힘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렇구나. 알겠다.”
황제는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짐에게도 그걸 가르쳐 주도록 하여라. 선이남. 아무래도 짐은 전음만 익히기에는 재주가 넘치는 것 같다.”
황제의 말에 선이남이 웃으며 그러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알려주는 것은 어렵지도 않고, 얼마 안 돼서 황제가 스스로 나가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돌아가시겠는지요. 폐하.”
아진이 와서 묻자 황제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서 가자꾸나. 가서 해야 할 이야기가 정말 많다.”
선이남의 의방으로 돌아간 세 사람은 그곳에서 오래오래 얘기를 나눴다.
황제는 선이남이 자신의 황의가 될 경우에 일어나게 될 여러 반발에 대해서 말했다.
“내 앞에서는 말을 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선이남을 중용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자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는 그렇게 말을 하고 선이남을 해치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할 자들이 그들이니 말이다.”
황제가 말했지만 선이남은 크게 겁을 먹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는 왜 아진이 선이남에게 자기를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원래 눈에 보이는 것을 보면서 더 크게 겁을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땅히 겁에 질려 떨어야 할 때도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이남은 확실히 후자에 속하는 것 같았다.
선이남이 의원이라는 것도 한몫하는 듯했다.
긴박한 상황에 있는 환자들을 고치는 것이 선이남이 해 오던 일이었고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남들보다 배포가 커진 것일 수도 있었다.
“선이남. 나는 아진이 참 마음에 든다만 아진은 짐의 곁에 있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니 너는 짐의 옆에 오래 머물도록 하라. 너를 해하려고 하는 자들에게서 살아남아라. 그렇게 되도록 너를 돕겠지만 내가 매 순간 너를 지키지는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짐이 지키지 못하는 순간에도 살아남아라. 너에게 내리는 유일한 명령이다.”
“예. 폐하. 그 명을 받들겠습니다.”
선이남은 황제가 대수롭지 않게 흘리듯이 한 그 말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황제의 주변에는 심중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드러내 놓을 수 있는 상대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며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 황제를 보면서 앞으로 황제의 곁에서 황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기로 했다.
* * *
아진은 바로 산본에 돌아가는 대신 선이남이 황궁에서 자리를 잡을 동안 함께 하기로 했다.
황궁에 선이남만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고 해도 앞으로 사도련주를 쫓는 일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황제는 구문제독부도, 동창도, 그리고 금의위도 완전히 믿지 않고 있었고 지금 상태로는 그나마 금의위를 가장 신뢰했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이 차악을 선택한 것뿐이지 마음이 열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랬던 차에 선이남은 황제에게 대안으로 떠올랐다.
산본의가 출신의 의원 선이남을 황의로 천거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만을 품었지만 거기에 대해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황궁에서 지금까지 버텨 왔기에 황제의 눈 밖에 나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서서 그렇게 말을 해 준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괜히 자기들이 나서서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선이남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부랴부랴 선이남에 대해 조사를 했고 그가 산본의가 의학당 출신의 의원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아냈다.
그것만으로는 황의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동안 의문으로 이름을 날리던 제선문과 천응문이 어느 순간부터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힘을 잃으면서 이제 산본의가의 아성을 넘어서는 의문이 없었고 산본의가 출신이라는 것은 선이남에게 충분히 날개를 달아 주었다.
아진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고 감격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선이남은 아진이 그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산본의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곳이었는데 아진이 그걸 몰랐다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선이남이 황의가 되면서 그가 황제의 곁에 머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졌다.
황제는 선이남을 총애했고 자신이 몸에 불편을 느끼다가 선이남이 처방해 준 약을 먹고 몸이 나아졌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선이남에게 장원과 경비 무사를 내리기 위해 포석을 깐 거였는데 선이남이 작은 의방에서 지내게 해서는 그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서 내린 결단이었다.
하인도 네 명을 주었는데 선이남은 솔직히 그런 것이 전부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황제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서 일단 주는 것을 다 받기는 했다.
역설적이게도 선이남에게 장원이 생기고 선이남은 자객의 방문을 끊임없이 받았다.
황도에 있는 흑도 무리마다 살행의 의뢰를 받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선이남을 죽여 달라는 의뢰가 첩첩이 쌓여가는 중이었다.
아진은 황제의 전서구를 빌려 산본에 보내 린린을 오도록 했고 린린은 밤마다 선이남의 장원 지붕에 앉아 흑주를 배불리 먹였다.
선이남을 향한 황제의 총애가 커지는 것이 눈에 보이게 되자 하루라도 빨리 선이남을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증이 생긴 듯 점점 더 수준 높은 살수들이 장원을 찾아왔는데 일단 린린이 지키고 있는 한 특급 살수 열 명이 동시에 온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었다.
* * *
북궁세가의 가주집무실에 세 사람이 모였다.
세가주와 북궁천영, 그리고 하월이었다.
세 사람이 모이면 으레 나오는 구도가 있었고 저절로 형성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은 하월이 다른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면 이제는 그런 게 없어졌다.
황제가 하월을 총애하고 은밀한 명령을 내린 사실 때문이었는데 그날은 그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졌다.
황제가 갑자기 산본의가의 선이남을 황의로 지명하고 사람들은 황제의 저의를 알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움직인다고 해도 황제의 의중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기에 혹시 하월이 황제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해서 하월을 부른 것이다.
“하월아. 요 근래 폐하께서 너를 부르신 적이 있었느냐.”
가주가 묻자 하월이 웃음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아버님. 폐하께서는 사나흘에 한 번씩은 꼭 저를 부르십니다.”
가주와 북궁천영은 아직 황제가 북궁세가를 버리기로 한 것은 아닌가 보다고 생각하며 하월을 주시했다.
“뭐라고 하시더냐.”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하월은 그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지금 애가 닳는 것은 오직 그들뿐이었던 것이다.
가주와 북궁천영도 하월이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보력에서 열세인 만큼 우선은 하월의 기분을 맞춰줘야 했다.
“폐하께서 선이남을 황의로 두신 것에 대해서 별말씀이 없으시더냐? 폐하께서 왜 다시 산본의가 사람을 쓰신다는 말이냐.”
“그것은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버님. 선이남이 산본의가 출신의 의원이기는 하지만 폐하께서 그자를 황의로 두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순전히 선이남 개인의 능력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너에게 직접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는 말이냐.”
북궁천영이 확실히 하기 위해 묻자 하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 폐하께서는 제가 선이남의 문제로 신경을 쓸까 걱정하셨다며 직접 저를 불러 그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가주와 북궁천영은 설마 황제의 총애가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랬구나. 뭐라고 하시더냐.”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선이남을 황의에 앉히기 전에 저에게 미리 말씀해 주고 싶으셨는데 제가 황도에 없어서 뒤늦게 말씀을 하시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혹시 선이남의 일로 걱정을 했냐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는 두 사람 모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하월이 그런 말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선뜻 믿기도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면서 선이남이 산본의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그자를 황의로 앉히기 전에 고민을 많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선이남이 산본의가 출신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자가 산본의가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산본의가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선이남을 황의에 앉히셨다는 말씀인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아버님. 폐하께서는 선이남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합니다. 황도에 있는 어떤 의원도 선이남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가주나 북궁천영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이야 세가 내에 의방을 따로 두고 있고 그 의방에 있는 의원들에게서 진료를 받느라 선이남에 대해 들은 게 많지 않았지만 선이남이 황의가 된 후에 정보를 모으는 동안 그런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 폐하께서 산본의가에 다시 마음을 주기로 하셨다거나 본가에서 마음을 돌리신 건 아니라고 봐도 되는 것이냐.”
가주가 말하자 하월이 큰 소리로 웃었다.
기분이 상할 수도 있을 만한 웃음이었다.
“아버님.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폐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월은 그 말로, 자기가 황제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굴었고 한동안 황제를 개인적으로 알현할 일이 없었던 가주는 패배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