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154화 (154/470)

제154화

154화

“이게 누구입니까?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우리가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말입니다.”

“괜한 걸음을 하지 않게 해서 잘 됐군요.”

하월은 예의 그 부채를 든 채 웃었다.

“내가 왜 북궁세가에 가려고 했는지도 모르지는 않을 것 같소만. 혹시 그 돈을 가지고 왔다고 말을 하려고 하는 거라면…….”

“그건 아닙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폐하께서 판단을 내려주셔서 말입니다.”

하월의 말에 아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여기에 세워두려고 그러시는 건지. 이제 안으로 들어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월의 말에 아진은 별수 없다는 듯 그를 안으로 들였다.

북궁세가의 무인들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 뒤를 따랐다.

갑자기 상황이 변하자 아진의 일행을 배웅하려고 나왔던 이들도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된 것이오.”

아진이 재차 물었다.

하월은 아무리 서도진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는 애가 타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런 만족감이 드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말한 대로입니다. 폐하께 산본의가에서 벌인 짓을 말씀드렸더니 다행히 시비를 가려 주셨습니다. 산본표국이 표행을 맡았고 표물을 잃어버렸으니 위약금을 지불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 표물의 실질적인 주인은 나였으니 위약금은 나에게 지불해야 한다고 하셨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미 받은 위약금은 나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하월이 말하자 아진이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했고 북궁세가의 무인들이 비뚜름하게 웃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황제 폐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말을 한다는 것인가. 무엄하고 무례하다.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북궁세가의 무인들이 엄하게 소리를 지르자 아진은 의가의 사람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저를 찾아온 손님들입니다. 제가 맞이하도록 하지요.”

그때까지도 분을 참지 못하는 가솔들을 전부 해산시키고 아진은 린린에게만 눈짓을 했다.

린린이라면 그런 상황에 적임일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북궁세가의 무인들은 사람들을 그렇게 가게 놔둔 것이 아쉬운 듯했지만 아진이 그들을 재촉하자 별수 없다는 듯이 아진을 따라 접객당으로 향했다.

“다시 말을 해 보시오.”

아진이 하월에게 말하자 그는 자기가 했던 설명을 다시 해 주었다.

“표물이 가짜라는 것은 내가 증명할 수 있소.”

“그럴 수도 있겠지만 폐하의 판단은 다르셨소. 애초에 표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소. 그 표물의 가치를 정하는 것은 표행을 의뢰하는 사람의 몫이고 표행비를 거기에 맞게 산정을 했다면 표물이 진품이 아니라는 것과 상관없이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거라고 하셨소.”

아진이 멍한 표정을 짓자 하월은 그럴 만하다는 것처럼 아진의 앞에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아진의 눈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서 하월은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가.

아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하월은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도무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에서 방방 뛰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소!”

아진이 말하자 린린이 그의 손을 잡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것은 황상에 대한 죄가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처럼 린린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린린의 눈빛을 알아들은 듯 입을 다물었다.

하월은 아쉬울 따름이었다.

충격이 큰 만큼 얼마든지 그런 과오를 저지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입에 재갈을 물리며 감정을 조절하게 했다.

날뛰다가 죄를 짓게 만들 수 있다면 참혹한 꼴로 만들어 황도로 끌고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쉬웠던 것이다.

“폐하께서는 나를 위로하셨소. 폐하께서 소협을 아주 잘 아시더군. 소협에게 걸리면 빠져나가기 어려울 거라는 말씀도 하셨소. 그럴 때는 절대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면서 내 손을 잡아 주셨지.”

하월은 황제가 자기에게 준 황금패에 대해서도 자랑을 하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대접이 소홀한 것 같은데. 황명을 전하기 위해 쉬지 않고 왔더니 허기가 지는구려.”

하월이 말했지만 아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월에게 마실 물 한 모금도 내어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 사이에 주고받을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소협에게 확실히 알게 해 주려고 온 것이오. 그리고 소협의 상황에 대해서도 인식을 시켜 주려고 왔소.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날뛰는 것이 안타까워서 말이오.”

하월은 이곳에서의 좋은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처음 화를 낸 것을 제외하고 서도진에게서는 점차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린린이 절제를 시킨 후로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월이 몇 번 더 도발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자 하월도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었던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간 하월은 제선문주가 그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고 했다면 충분히 숨길 수 있었겠지만 제선문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과시하는 것처럼 하월을 바라보고 의방 쪽으로 향했다.

그의 뒤에는 산본의가의 의원들 여럿이 따르고 있었고 다시 그 뒤를 의생과 의녀들이 따랐는데 하루 이틀 함께한 것이 아닌 듯했다.

하월은 왜 저자가 여기에 있냐고 묻고 싶은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신의 측근을 바라보았지만 아는 것이 없는 측근은 하월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 봤자 상관은 없다만.’

하월은 제선문주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돌아갔지만 배웅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다들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마침내 하월의 일행이 전부 떠나자 아진이 린린을 바라보았다.

“내 눈 주위 살들이 떨리는 거 봤냐?”

“응. 정말 감쪽같았어.”

“아…… 나는 이런 쪽에도 소질이 있는 것 같아.”

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자님. 저도 정말 감쪽같지 않았습니까? 아가씨. 아가씨도 북궁세가 무인들이 다 속아 넘어가는 거 보셨지요?”

여기저기서 자기들의 연기에 감탄한 사람들이 속출했다.

“나는 감정을 절제했는데. 놀라고 당황하면서도 가모로서 체통을 지키고 그 감정을 다 눌러 담는 걸 연기했는데 어떤 것 같았어, 아진아? 그렇게 보였어?”

가모까지 그러고 나오자 아진은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향화문 덕이 컸어요. 향화문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도착시간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아진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가 빨리 움직여 주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비열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착취했던 표국들이 이번에 정리가 될 거예요. 표사와 쟁자수들에게 밀린 돈을 주지 않으려고 산적의 습격을 가장해서 죽인 표국도 북궁세가의 목표가 될 거고요.”

“그래. 앞으로는 거기에 맞춰서 준비하도록 하겠다. 아진아.”

가모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아진을 보면서 정말 희한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에 이런 아이는 다시 없을 거라고 느꼈는데 황제가 아진과 똑같은 부류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느 날 황성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온 아진이 가주와 가모의 앞에서 말했다.

-폐하께서 그 일이 재미있어 보인다면서 폐하도 끼어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일이라는 게 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폐하께서는 구문제독부를 이번에 완전히 장악하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구문제독부와 동창이 너무 커져 버렸다고 생각하고 계시거든요. 폐하께서는 금의위를 통해서 그들을 적절히 견제하고 싶어 하시는데 금의위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북궁세가를 견제할 수 있다면 그 일이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십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황상의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됐지만 그래도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아진은 그런 두 사람에게 황상과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황상이 아진을 버리는 것처럼 하월을 불러들여 하월에게 몇 가지 제안을 하면 하월은 기세등등하게 이곳에 내려올 거라는 게 아진의 설명이었다.

-그 와중에 하월 공자를 통해 표국 몇 군데에 전과 같은 방식으로 위약금을 물게 할 텐데 그 대상이 될 표국은 제가 몇 군데를 추려서 폐하께 알려드렸습니다. 그동안 표사와 쟁자수들 사이에 악명이 높은 곳이 몇 곳 있습니다. 표행 도중에 표사와 쟁자수가 이상하리만치 많이 죽어간 곳들이 있어서 조사해 봤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모와 가주는 어안이벙벙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해서였다.

그러나 아진의 입에서 나온 말인 이상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와 아진의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적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진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말이 되기도 했고 그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그 사실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우리는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지. 아진아?

-네. 어머니. 북궁세가는 반드시 무너질 겁니다. 처음에 예정됐던 것보다 더 철저하게 무너지게 될 겁니다.

-그래. 우리 정도면 충분히 해 볼 수 있겠지.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황궁에 가 볼 거야. 오라버니?”

“가 보기는 해야 할 거야. 오라고 하신 기간이 지나기는 했거든.”

“나도 가 보고 싶은데.”

“안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 음양인이라는 말을 믿으신 건지 믿은 척해 주신 건지도 모르는데 네가 자꾸 폐하를 뵙는 건 별로야.”

“그래? 나는 감쪽같이 속인 줄 알았는데.”

린린이 아깝다는 듯이 말했고 아진은 린린의 머리를 헝클었다.

“집이나 잘 지키고 있어. 폐하께서 이남 형님을 보고 싶어 하시니까 아마 오늘은 거기로 가게 될 것 같아.”

“그래. 잘 다녀와.”

아진은 그 정도로 이야기를 마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따로 인사를 나누지 않은 채 몸을 날렸다.

이제 그의 경공에는 이름이 없었다.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도움이 되는 것들만 모아서 계속 변형을 시켜와서였다.

단점은 없애고 장점만 섞어서 그것을 극대화하다 보니 속도는 빨라졌는데 공력의 소모는 엄청났다.

만약 무령독화를 섭취하지 않았다면 자기도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경공을 펼쳤고 그러는 동안에도 다시 거기에 변형을 가했다.

‘아아. 이렇게 하니까 더 쉽네. 바보였나 봐. 린린한테도 알려줘야지.’

그래 봐야 린린은 하지 못할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알려 주기는 할 생각이었다.

* * *

황제의 침전.

그 조용하고 위엄있는 곳에서 촛불이 흔들렸다.

잠들지 않은 채 상소를 보고 있던 황제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왔느냐.”

“예. 폐하.”

아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