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152화
하월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몇몇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들이 자기를 보는 시선조차도 문제아를 보는 것 같다고 여겼다.
자존감이 낮아서 그렇게 발버둥을 쳤던 건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어서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조금씩 인정을 받았던 건데 그게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낮게 떠서 빛나고 있었다.
별들은 아무 근심도 없이 빛을 내는 것 같아서 부럽기도 하고 짜증이 치밀기도 했다.
저만 고생을 하는 것 같아서.
제 삶만 이렇게 버거운 것 같아서.
처소로 돌아가면서 하월은 서도진에 대해 생각했다.
서도종의 혼례식장에서 봤던 그자의 모습을 떠올리자 주먹이 저절로 불끈 쥐어졌다.
‘왜 그자는 그런 것들을 당연한 듯 누리는 것인가. 왜!’
객관적으로 보자면 북궁세가의 삼공자라는 위치와 산본의가 이공자라는 위치는 처음부터 비교도 되지 않을 터였다.
누구라도 북궁세가 삼공자가 훨씬 더 부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도 서도진 본인이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으니 소용이 없었다.
‘그놈의 머릿속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아니. 그보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참을 수가 있었던 거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하월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부분이었다.
훨씬 더 쉽게 끝내 버리고 더 쉽게 상대를 욕보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서도진은 지금까지도 그 일의 배후에 북궁세가가, 그리고 하월 자신이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는 밝히지 않았잖은가.
하월은 알고 있었다.
가주의 눈빛을.
그리고 북궁천영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처음에는 기대하고 응원했으면서 이제는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고 멸시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들보다는 서도진이 더 믿을만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네.’
자조적으로 웃고 하월은 처소로 돌아갔다.
그곳의 문은 다음날 해가 떠오를 때까지 열리지 않다가 느지막이 열렸다.
일단 하월이 기침을 한 후에는 시비와 하인들이 부지런히 오가며 입궁 준비를 서둘렀다.
하월은 흠잡을 곳 없이 준비를 마친 후 궁에 들어갔다.
황제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북궁천영이 미리 말을 해 두어 태감 하나가 그를 안내했던 것이다.
북궁천영에게 은혜 입은 일이 있었는지 그는 하월이 주의해야 할 것들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사소한 것이지만 황제 앞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황상께서는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연신 헛기침을 한다거나 손가락을 움직이는 행동 같은 것, 입술을 자꾸 앙다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 건 사람을 자신 없어 보이게 만듭니다. 황상께서는 그런 자들을 경멸하십니다.”
경멸이라는 말이 가슴에 화인처럼 박히는 듯했다.
궁금한 게 있냐는 말에 하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월이 안내되어 간 곳은 황제가 공무를 보는 곳이 아니었다.
황제는 사적인 공간에 하월을 맞아들였고 태감과 궁녀들도 모두 물렸다.
“북궁세가의 삼공자를 이리 보는 것은 처음이군. 반갑구나.”
“북궁하월이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그동안 얘기는 많이 들었다. 귀여운 짓을 많이 했더군.”
하월은 그 말에 양심이 찔려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황제가 구문제독부의 일을 금의위로 배정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은 후라 이곳에서 말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뱀 앞의 개구리가 된 듯 잔뜩 움츠러들기만 하고 말이 나오질 않았다.
“화…… 황송하옵니다. 폐하.”
그래도 뭔가 대꾸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을 하자 황제가 차를 권했다.
“좋은 차네. 들어 보게.”
황제의 말에 차를 들기는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차 맛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이제 얘기를 시작해 보게. 내가 바깥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아서 말이야.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주는 이가 있는데 너무 바빠서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영 힘들어서 말이지.”
“이야기라면…….”
“그 아이가 해 주던 얘기를 해 주는 건 어떤가. 전에는 그 아이에게서 들었지만 하월에게서 듣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
하월은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황제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싶었지만 스스로 알아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건방지게 머리를 굴리려고 하지 말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고하거라. 왜 그런 생각을 품었는지도 빠뜨리지 말고. 다른 것은 네 죄를 이 자리에서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만 함부로 사실을 빠뜨린 것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예. 폐하.”
하월은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겠다고 생각하고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말했다.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가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랬군. 난감했겠어. 하필이면 그런 식으로.”
황제는 중간중간 폭소를 터뜨렸다.
하월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치부나 실책을 드러냈을 때마다 그런 반응이 나와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하월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군. 만약에 상대가 서도진이 아니었다면 성공했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그랬을 것입니다.”
“아쉬운가?”
“……예?”
“아쉽냐고 물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월은 황제의 의중을 알지 못한 채 물었다.
“그곳을 목표로 정하지 않았으면 그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겠지. 나는 그 계획이 상당히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싸움을 오래 지켜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한다네. 어떤가.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것은.”
“……예?”
반문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을 태감에게 들었지만 그때는 자기가 반문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황제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 다시 시도해 보아라. 너는 너무 멍청해서 혼자만 싸우라고 놔두면 서도진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서도진이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걸 보고 싶단 말이지. 재미있을 것 같아.”
하월은 다시 한번 반문 할 뻔한 것을 참았다.
황제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싶었는데 정말이냐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약금을 넉넉히 낼 수 있는 표국으로 고르거라. 아주 큰 가문에서 운영하는 곳이 좋겠지. 한 번의 표행 실패로 황금 이삼 백 관은 족히 낼 수 있는 곳으로. 돈이 부족하면 내가 빌려줄 수도 있다.”
황제는 재미있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월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네가 서도진의 상대가 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내가 특별히 힘을 써서 도와주는 만큼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실망하게 한다면 짐이 아주 많이 화가 날 것 같은데.”
하월은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안 되지. 고작 성심을 다하겠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네 목숨을 바쳐야 할 거야.”
“그러겠습니다.”
“좋아. 가 보도록 해라. 사나흘에 한 번씩은 짐을 찾아오도록. 되어 가는 상황을 매번 보고해라. 서도진을 보는 것이 부담되겠지만 자주 찾아가 보도록 해. 너를 보면 서도진도 기분이 나쁘지 않겠느냐. 아. 산본까지 오고 가려면 시간이 걸리겠군. 거기에 다녀오는 일 때문이라면 짐을 보러 오지 못해도 된다.”
하월은 그가 진지하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에게 특별히 선물을 주지.”
황제는 아까부터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황금패를 하월에게 밀었다.
“이것이…… 무엇인지요. 폐하.”
“보거라. 쓰여 있으니.”
패의 뒤쪽에는, 전장에 제시할 때 금자 삼백 냥까지 인출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관병도 동원할 수 있게 할까 했다만 네가 그런 것까지 영민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아 그것은 뺐다. 앞으로 하는 것을 봐서 그것도 넣어 주도록 하지. 북궁천영이 구문제독부를 차지하고 있으니 너에게는 동창의 일을 조금 떼서 맡기는 것은 어떨까. 그렇지 않아도 동창이 하는 일이 너무 많기는 한데.”
하월은 그의 말을 듣고 숨이 막히는 듯했다.
“폐…… 폐하.”
“네 능력을 보여라.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나도 판을 키워 보도록 하지. 너무 빨리 나라를 안정시켜 버렸더니 요즘에는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 말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하월의 눈이 드디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자기가 결코 서도진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네 아비와 구문제독에게 그 패를 보여 주도록 해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도 말을 하도록 해라. 내 특사가 그런 놈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내가 모욕당하는 것처럼 기분이 나쁘니 말이다. 알겠느냐.”
“예. 폐하.”
“네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갖게 해 주겠다. 단, 이번 일을 잘 성사시켜야 한다. 서도진이 네 앞에 무릎을 꿇도록 만들어라. 살려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그 일을 성공시키면 북궁세가를 너에게 주마. 그리고 그때는 다른 것도 주마. 너에게 아무것도 아끼지 않을 테니 나에게서 그것을 전부 다 가져가 보아라.”
“예. 폐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믿어 주신 것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광소를 터뜨렸다.
“우스운 소리를 다 하는구나.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내가 너 따위를 믿겠느냐. 네놈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네놈이 죽는다고 해도 애처롭지는 않을 것이다.”
하월은 황제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만남일 뿐이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그를 놀라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서도진을 무릎 꿇게 만들어라.’
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들끓게 했다.
* * *
오랜만에 산본의가의 내실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날은 북리의천이 그곳을 찾은 날이었고 소청도 함께 있었다.
“사고님도 함께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진이 아쉬워하며 말하자 북리의천이 웃었다.
“이 녀석아. 우리가 너를 찾아오기 전에 네가 우리를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북리의천은 아진의 밝아진 모습을 보며 마음을 놓았다.
세상만사에 무심한 것 같은 제자가 비룡채와 혈천방의 사람들을 잃은 후에 오래 상심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프던 참이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어느 정도 단단해진 듯해서 안심이 되었다.
“대견하구나. 잘 견뎌서 고맙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다시는 스승님을 걱정하시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소영도 함께 오고 싶어 했다만 독고세가에 큰 행사가 있어서 그곳에 가야 했다. 나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나는 너를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꾀병을 부렸다. 그래서 소영이 돌아오기 전에 돌아가 있어야 한다.”
설마 그게 정말인가 했는데 소청과 북리의천이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보면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청이 너도 비밀을 지켜야 한다.”
“예. 사조님.”
친할아버지와 친손자 같은 두 사람을 보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