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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51화 (151/470)

제151화

151화

북궁천영이 말하자 황제가 급히 손을 저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게. 기껏 모습을 숨기고 나왔는데 그 말 때문에 들키겠네.”

“…….”

북궁천영은 황제가 자신과 북궁세가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불러내는 것을 보며 자기는 영원히 황제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항간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 그래서 짐만 재미없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와 봤지.”

“그러셨습니까.”

“북궁세가의 이공자가 보이지 않는다던데. 구문제독이라면 알고 있을 것 같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집에서도 보이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건방지게 두 번 말을 하게 하는군. 이공자가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를 물은 게 아닌 것을 알 텐데?”

구문제독은 황제가 작정하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궁세가의 절대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황제는 황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황제가 거리를 두려는 것이 명백히 보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대충 알 것 같아. 나는 북궁세가의 사람들을 두루두루 깊이 잘 안다고 생각한다.”

“…….”

황제가 하월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북궁천영은 주저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팔다리 하나는 내놔야 할 상황이고 북궁세가를 구하기 위해서 하월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기꺼이 그를 내놓을 수 있었다.

“국법은 엄히 지켜져야 하니 그 아이를 내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내가 나서기 전에 진작 그리했으면 좋지 않았느냐. 들켜서 내놓는 주제에 국법을 지키기 위해 그런다는 둥 말을 하는 것은 너무 가증스럽지 않은가.”

황제는 북궁천영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말했다.

저의 얼굴을 그렇게 빤히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상대는 황제였다.

누군가를 그렇게 빤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시선을 들키고 나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것.

그거야말로 그가 진짜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하면서 북궁천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해 주지. 구문제독.”

“예. 폐하. 감사히 듣겠습니다.”

“나는 구문제독을 싫어하지 않네. 북궁세가도 마찬가지야. 자네들이 나를 황위에 올렸다고 생각하겠지. 그건 틀린 말이 아니네. 사실인데 그것을 부정해서 뭘 하겠는가. 안 그런가?”

“…….”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 나는 자네들이 좋네. 적당히 꿇어 앉히고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는다고 해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지. 주제를 알고 그냥 조아릴 줄을 안단 말이야.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었고 새로운 개를 길들이는 건 지쳤네. 좀 더 젊었을 때라면 몰라도 말이야.”

북궁천영은 황제가 하려는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자기들에게 좋은 말이라는 것은 알았다.

이번에 북궁세가에서 벌인 일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흠을 눈감아 주기로 했다는 말인 듯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 감사하면 감사한 줄 알고, 잘못한 게 있으면 잘못한 줄 알고. 그러면 되는 것이네.”

황제는 찻잔을 비웠다.

“차 맛이 좋군. 황실로 올리라고 해야겠어. 가끔은 이렇게 싸고 질 나쁜 차 맛이 더 끌리는 때가 있는 법이지.”

“……예. 폐하.”

“가 보도록. 그리고 내일 하월을 들여보내도록 해. 그자에게서 얘기를 들어봐야겠다.”

“예. 폐하.”

“동생에게 뭐라고 충고를 해 줄 텐가.”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북궁천영은 잠시 할 말을 골랐다.

“폐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니 감히 속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좋군. 그렇게 하도록 해. 그렇게 해야 할 거야. 자네도. 하월도.”

“예. 폐하.”

황제가 이제 정말 가 보라는 듯 구문제독을 향해 손짓했고 북궁천영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한 후 조용히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 * *

산본표국에 돈이 들어왔다.

북궁세가의 하월에게 들어갔던 돈과 같은 액수였다.

황금 이백 관은 웬만한 문파를 얼마간 넉넉히 운영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진은 가주와 가모에게 그 돈을 내놓았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믿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진아. 네 마음고생이 가장 컸다는 걸 우리가 모르겠느냐.”

가주가 말하자 가모도 옆에서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아진이 사용한 계책을 알아차리고 혀를 내둘렀다.

자기들이 낳은 자식인데 도대체 그 속을 모르겠다고 하며 얼마나 감탄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몰랐다.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해도 자랑스러웠을 텐데 기대할 수 없던 일을 해낸 것이다.

“이 돈은 어떻게 쓰고 싶으냐. 아진아.”

가모가 묻자 아진은 미리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말했다.

“표행을 하다 죽은 표사의 유족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고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서 일정한 금액은 미리 마련해 두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했다만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네가 더 챙겨 주도록 하여라. 사실 돈을 줬는데 그 사람들이 전부 다시 가져왔지. 표국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데 자기들이 그 돈을 받을 수는 없다면서 말이다. 이제는 일이 모두 해결되었으니 네가 찾아가서 다시 준다면 모두 좋아할 거다.”

“예. 어머니.”

아진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가주와 가모는 돈을 써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남은 돈은 어찌하고 싶으냐. 급하게 쓸 곳이 없으면 이 어미에게 빌려주면 좋겠다만.”

가모는 산본무관과 상단, 표국과 의가에 생긴 적자의 규모를 말하고 미안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잘난 아들 두셨다 어디다 쓰려고 그러십니까. 어머니. 잘 쓰시니까 버는 보람도 있습니다.”

지금은 새로 시작하느라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단계라서 적자가 나는 것일 뿐이지 돈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산본의 곳곳에 제법 커다란 규모를 갖춘 사업장들이 위풍당당한 현판을 달고 영업을 해 나가고 있었고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알뜰하게 수익을 내고 있었다.

그 사업장들이 전부 가문의 소유였으니 가모가 얼마나 일을 크게 벌인 건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남는 것으로는 전장 사업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건 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장에서 사람들을 유치하려면 이율만 조절해 주면 되니까요. 높은 이율로 폭리를 취하는 자들 때문에 병폐가 심합니다. 이율을 일 할만 낮춰줘도 수익은 수익대로 나고 사람들은 숨통이 트일 겁니다.”

“그것은 뜻대로 하거라. 잠깐만 들어봐도 좋을 것 같구나.”

전장 사업이 돈이 된다는 것은 알아도 그 일을 시작할만한 자금력이 없어서 꿈도 꾸지 못하다가 마침내 산본의가의 사업 영역이 전장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계획 없이 들어온 돈이었기에 그 돈을 보고 눈팔이를 하다보면 사람들의 삶이 망가질 수도 있었는데 일단 전장을 만들어 거기에 전부 투입을 하고 나자 겉으로는 달라지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의 삶은 크게 나아졌다.

곳곳에서 고리대금업자들이 판을 치며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곤 했는데 산본전장이 나서서 낮은 이율로 돈을 빌려주자 이자의 부담에서 벗어난 이들이 보다 손쉽게 돈을 갚아 나갔던 것이다.

돈을 빌려 쓰고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때는 산본의가의 사업장에서 일을 시켰다.

담보도 제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돈을 갚는 것을 차라리 더 선호했다.

산본의가와 산본표국에는 일자리가 늘 부족했기에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산본표국의 쟁자수로 표행에 따라다니게 하기도 했다.

아진은 전장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수익을 극대화하려고 한 게 아니라 전장에 늘 돈이 있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곳에서 돈을 빌린 사람들이 빚을 다 갚고 돈을 맡겨 이자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면 결국 전장에 돈이 쌓이게 마련이었고 그 돈으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어서였다.

그것은 자금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빚에 허덕이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돈을 못 갚겠으면 딸이라도 내놔서 빚을 갚으라는 흔한 소리는 적어도 산본전장에서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돈을 갚지 못한다면 직접 자기 몸을 굴려서 표행을 해서 갚아도 되는 것이고 약초를 캐서 갚아도 되는 거였다.

산본전장은 다른 곳에 비할 수 없이 많은 이자를 주었고 그 때문에 돈이 많지 않은 사람도 돈을 불리는 재미를 붙여나갈 수가 있었다.

산본의가나 산본표국 사람들도 전장에 돈을 맡겼고 그렇게 조금씩 쌓여 나가던 돈이 나중에는 황금 오백 관까지 불어나 있었다.

산본전장에 돈이 많다는 사실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퍼졌고 무공을 이용해 도둑질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은 산본전장을 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도 산본전장의 사업 확장에 도움이 되었다.

일단 전장을 털려고 들어왔다가 잡힌 사람들은 뇌옥에 갇히는 것과 무급으로 일을 하는 것 중에 선택할 수가 있었는데 뇌옥에 갇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잡힌 사람들은 오히려 무관에서 무공을 탈탈 털렸고 그들을 잡으러 다니다 보니 산본 무관은 의도치 않게 점점 경공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 * *

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서 작은 촛불 여러 개가 일렁였다.

북궁천영의 말을 들은 하월의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세가주는 그리 놀란 얼굴도 아니었다.

아주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놀라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오래 품고 있는 것도 사치이니 빨리 생각을 하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황상의 분위기는 어떻더냐. 그냥 떠보시는 것 같더냐.”

“그건 아닌 듯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인 것 같았습니다.”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거겠지. 하월이 너는 어떠냐. 어떻거나 말거나 황상께서 부르셨으니 가서 뵙기는 해야 한다.”

“예…… 아버님.”

남들은 그보다 더 이른 나이에도 임관하는데 유독 하월에게는 가주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 그랬냐고 한다면 가주 자신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다.

하월의 쓰임새가 분명히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황상을 보필하게 하기보다는 그저 곁에 두고 그늘 속에서 써먹으려고 그랬던 건가 하는 생각을 뒤늦게 할 뿐이었다.

“하월은 황상을 한 번도 뵌 적이 없겠구나.”

“예. 아버님.”

“너와 의외로 잘 맞을지도 모른다. 겁낼 것 없다.”

“시인해야 하는지요.”

“그래. 그래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본가에는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월은 말을 하고 그들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하는 법이다. 네가 계획한 것이 아무리 그럴 듯했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가 자만했던 것은 사실이다. 서도진이라는 놈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본가가 세간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음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그 말로 넘어갈 수 있는 날은 아마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

북궁천영과도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싸늘하게 하월을 노려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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