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149화
“내가 준 패는 사용을 안 했더군. 전장에 가서 그걸 보여 줬다면 돈을 빌리는 것 이상의 효과를 냈을 텐데 말이다. 처음부터 돈을 빌릴 생각은 없었던 것이구나.”
“예. 폐하. 나중에 돈을 빌리기는 할 것입니다. 안 갚을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때 제가 돈을 빌리는 곳은 만전이 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만전이라. 북궁세가에서 아진이 너 하나를 잘못 건드린 탓에 일이 계속 꼬이고 있구나. 혹시 내가 북궁세가에 해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있나?”
“폐하가 나서시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을 듣게 되실 테니 제가 해 보겠습니다. 폐하.”
“오해하고 있군. 아무도 짐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아진아. 짐이 아무리 공정하지 않게 굴어도 그렇지.”
아진은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누구를 걱정했다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실소가 나오기도 했다.
“알았다. 다음에도 다시 오도록 하라. 이 일이 그때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구나. 구문제독을 자주 불러 그의 얼굴색을 보면서 일이 어떻게 진행돼 가는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말이다.”
아진은 황제가 이만 가도 좋다고 말할 때까지 조금 더 있다가 황도를 떠났다.
이제부터는 그도 준비할 것이 꽤 많았다.
* * *
아진이 벌인 일을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 웃었다.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벌인 일이 짓궂은 장난 정도라고 생각해서 웃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아진이 세운 계획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그들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척가상방은 독수에게 무령독화를 넘기기로 하고 그것을 완수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독수는 물론 흑전문의 모든 사람이 이제 곧 독수가 독공에 대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가로막혀 있던 십성의 고비를 드디어 넘어서게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부담스러운 출혈을 감수하고 모두 십시일반 돈을 모았고 그것을 척가상방에 보냈는데, 척가상방에서 가져온 무령독화가 아무 효능이 없었다.
독수는 귀한 영약을 복용한다고 자신과 의형제를 맺은 당문의 장로까지 불러와서 진기도인을 부탁했는데 무령독화를 복용하고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당문 장로 혈루 역시 무령독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효능이 적은 영초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먹었는데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혈루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독수가 어디서 풀뿌리 하나를 황금 삼십 관에 샀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수도 그 사실을 느꼈고 혈루의 앞에서 창피해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형님.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시게.”
혈루는 독수의 속이 말이 아니겠다고 생각하며 그 길로 그곳을 떠났다.
독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단신으로 척가상방을 찾았다.
말을 타고 쉬지 않고 꼬박 달려 사흘은 족히 가야 하는 길을 반나절도 되지 않아 경공으로 주파한 그는 척가상방으로 찾아가 문을 부쉈다.
문지기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그 소란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그중에는 척가상방의 방주도 있었는데 그는 독수가 온 것을 보고 무슨 일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령독화가 슬슬 전해졌기에 곧 무령독화의 효능에 대해서 소식이 전해질 거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기다리고 있기는 했다.
효능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그래도 세상에 처음 나온 무령독화였기에 그것을 먹고 마음에 들어 고맙다는 인사를 별도로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대협…….”
그러나 그것은 방주가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네놈이…… 네놈이 나를 뭐로 보고. 네놈이 흑진문을 뭐로 보고 그따위 풀뿌리를 영초라고 속여서 팔았다는 말이냐! 네놈에게 내가 뭐로 보였으면 그런 짓을 하는 것이냐. 그런 짓을 했으면 도망이라도 쳤어야 할 터. 도대체 네놈이 나를 뭐로 봤으면!”
방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 독수는 화를 참지 못했고 그대로 방주의 얼굴을 쥐었다.
으드득 소리와 함께 얼굴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렸고 허공에 떠오른 방주가 몸부림을 쳤다.
“이런 짓을 하고도 감히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터! 죽음으로 갚아라. 네 이놈!”
그는 방주의 몸을 내동댕이쳤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있는 힘껏 내던진 탓에 방주는 죽으면서 뼈가 분질러졌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은 방주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의아하고 두려웠다.
잘못하다가 그 불똥이 자기들에게 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기 바빴다.
그러나 독수의 화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고 그는 전각을 향해 독장을 날려 그것들을 녹여 버렸다.
곳곳에서 폭음이 터지고 전각이 무너져내리는가 하면 불이 붙어 타올랐다.
그러고도 독수는 화가 가라앉지 않아 소리를 질렀고 당장 자기에게서 받아간 것과 손해배상조로 황금 서른다섯 관을 가져오지 않으면 기둥을 뽑아 모두의 머리를 쳐 죽이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총관은 영문도 모른 채 독수의 앞으로 나와서 꿇어 엎드렸고 독수는 총관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네놈들이 나를 바보로 알고 풀뿌리를 가져다 무령독화라고 속인 것을 내가 아직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느냐! 여러 말 할 것 없다!”
“대협.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는 무령독화를 산본의가의 서도진 공자에게서 직접 받았습니다. 서 공자가 무령독화를 잘못 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무공도 뛰어나고 약초에도 박식한 의원이 어떻게 그걸 잘못 알 수가 있단 말입니까. 대협. 제발 기다려 주십시오.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령독화를 대협께만 판 것도 아니니 어떻게 된 것인지 곧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총관의 입에서 서도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독수도 그때는 움찔했다.
척가상방에서 자기에게 물을 먹이려고 한 거라고 생각하고 방주를 죽였는데 정말 서도진이 무령독화를 판 거라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은 무령독화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증인도 있다. 내 의형이신 혈루 대협께서도 그 자리에 계셨다. 내가 무령독화의 공력을 흡수하는 것을 도와주시기 위해 그 자리에 직접 와 주셨다는 말이다.”
총관이야말로 난감했다.
독수의 얼굴을 봐서는 그가 무령독화만 꿀꺽하고 돈을 돌려받으려고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분통이 터지는 일을 당하고 화가 다스려지지 않아서 그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다. 이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어서 서 공자를 데리고 오너라. 서 공자에게서 직접 설명을 들어야겠다.”
독수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고 총관은 사람을 시켜 산본의가에서 서도진을 불러오게 했다.
소식을 들은 아진은 전혀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아진은 혼자 가려고 했지만 어느새 린린이 따라붙었고 그 둘이 가는 동안 혈천방과 비룡채 사람들도 무슨 일이냐며 은근슬쩍 따라붙었다.
척가상방 이야기와 독수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들으며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럴 때는 자기들이 한 손 거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따라나선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척가상방이 악당이었다.
그자들 때문에 동료들이 죽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천이재도 따라나서며 일행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그들이 척가상방에 도착했을 때 독수는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힌 상태였다.
그는 총관에게 이야기를 전부 들었고 자기가 잘못 생각한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며 그는 점점 더 생각이 많아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관부에서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흑진문의 문주라는 말로도 이 일을 피해 나가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런 생각으로 독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독수는 아진이 온 것을 알아차렸다.
총관은 단숨에 나가서 아진을 향해 호통을 쳤다.
“서 공자!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서 공자가 준 무령독화가 가짜라고 하시지 않소!”
총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아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벽예월은 산본의가의 공자가 그런 대우를 받는 걸 참을 수 없는 듯 총관을 향해 더 크게 소리쳤다.
“말씀을 가려서 하세요. 총관. 오는 동안 우리도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을 해 봤어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결론은 하나예요. 척가상방에서 무령독화를 빼돌리고 가짜를 팔아먹은 겁니다. 그러고는 이제 와서 그 일이 들통 나니까 산본의가에 떠넘겨요?”
벽예월이 독하게 마음을 먹고 사납게 쏘아붙이자 총관은 잠시 멍해졌다.
호감이라는 것.
첫인상이라는 것.
그게 중요한 것은, 자기도 모르게 형성된 그것에 사람들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가 호감을 품은 사람의 말을 더 믿으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벽예월은 그런 면에서 타고난 사람이었다.
벽예월이 하는 말은 독수에게 지금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게 해 주었다.
‘그래. 그거였군. 그렇게 된 거였어. 검신 대협의 제자라는 서 공자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독수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독수의 머릿속에서 흐르고 있을 만한 이야기가 벽예월의 입에서 다시 나왔다.
“이렇게 뻔한 일을 우리 서 공자님이 하실 거라고 생각을 했던 건가요?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그리고 우리는 당신들이 이런 짓을 한 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 증거도 갖고 있고 말입니다.”
벽예월이 말했을 때 총관은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총관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실이 하나도 믿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벽예월은 알 텐데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총관이 소리를 지르자 벽예월이 웃었다.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군요. 사는 게 편안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일을 함부로 잊을 정도였던 것을 보면 말이에요.”
“말을 가려서 하라고 했소!”
그러자 듣고 있던 독수가 나섰다.
“소저. 무슨 말인지 나도 들어 보고 싶구려. 그 이야기를 해 주시오. 나는 절대 무령독화를 두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소. 만약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면 그 큰돈을 만들려고 무리하지도 않고 그냥 뺏었을 거요. 그런데 나는 돈을 냈고 무령독화를 정당하게 얻었소.”
벽예월은 독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산본의가의 총관 벽예월이 독수 대협을 뵙습니다.”
독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표독스럽게 굴던 벽예월이 자신을 향해 예의를 갖춰주자 고마웠다.
“사실은 척가상방과 산본의가가 좋은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산본의가에서 표국 사업을 시작했는데 척가상방에서 값비싼 표물을 맡기고 표행을 의뢰했지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면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독수라면 백이면 백, 그렇게 했을 터였다.
그러나 벽예월은 호소력 짙은 얼굴로 지난 일을 말했고 독수는 척가상방 총관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사실인가. 총관.”
독수는 뭔가 있다고 직감하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