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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46화 (146/470)
  • 제146화

    146화

    “그나마 산본의가 뒤에 여러 무가가 버티고 있으니까 그렇지, 안 그랬으면 산본의가에 있는 여자랑 젊은 사람들을 데려가서 팔아 버리려고 했을지도 몰라요. 얼마나 지독하게 굴었는지 몰라요. 우리는 그자들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다 알고 있는데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기고만장하게 굴잖아요? 얼마나 가증스러웠는지.”

    “그래도 다들 잘 참아 줬군요. 다행입니다.”

    “가주님도, 가모님도 참아야 한다고 하셨으니까요.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안 그랬으면 정말 걱정됐을 거예요.”

    아진은 벽예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슬슬 그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무령독화나 다른 영초를 캐서 그것을 담보로 제공하기로 했던 계획은 무산될 위기였지만 아진은 그 일을 그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가짜 표물을 맡기고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내게 한 것이 아닌가.

    처음에 의뢰비로 거기에 해당하는 돈을 냈다고는 하지만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아진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척가상방이라는 현판을 걸어둔 곳이었다.

    용사비등한 필체로 척가상방이라는 글씨가 현판에 새겨져 있었다.

    아진은 방주를 찾아왔다며 안으로 들어갔고 문지기는 아진을 잡을 틈도 없이 안에 소식을 전했다.

    척가상방의 방주는 아진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위약금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자기가 산본의가에 찾아가도 잘 만나 주려 하지도 않으며 회피만 하는 것 같더니 드디어 그곳에서 사람이 왔나보다 했던 것이다.

    그쪽에서 아무리 피해 봤자 그 시간 동안 높은 이자가 붙고 있으니 그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이율만 해도 일 년에 육 할에 달해서 그 이자를 불리는 것보다는 전장에서 돈을 빌려서 먼저 갚는 게 나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입만 다물고 있는 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산본의가 이공자입니다.”

    아진은 그의 앞에서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시오.”

    방주는 아진에 대해 이미 이야기를 들을 만큼 들은 상태라 신중을 기했다.

    “미리 와서 말씀을 드리고 기간이라도 유예를 받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돈을 알아보고 다니느라 그런 것이니 조금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가 뭐가 있겠소? 우리는 표물 운반 계약을 했고 표행이 실패할 경우 어떻게 할지에 대한 것도 세부적으로 계약이 다 되어 있었소. 위약금에는 일이 발생한 날부터 육 할의 이자가 붙고 있소. 과하다고는 하지 마시오. 일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되었을 것이오.”

    “그래도 조금만 사정을 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방주님. 위약금을 물어야 할 곳이 이곳만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아진은 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런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방주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알아서 책임을 지도록 하시오. 산본의가가 그동안 배출한 의원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돈을 내라고 하면 어느 정도는 되지 않겠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원금에는 턱도 없고 이자만 충당하다가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내 사정이 아니오.”

    방주는 아진이 와서 이러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동안 하월이 산본의가에서는 아직 아무 움직임이 없냐며 닦달을 해 왔었기에 초조해지던 참이었는데 이번에는 보고할 것이 생겨서 오랜만에 그를 찾아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주님. 제가 웬만해서는 이런 부탁을 드리지 않습니다.”

    “됐소. 북리세가에서 빌리건 어디서 빌리건 알아서 하시오. 그 대단한 스승님이 이런 일을 외면하지는 않으실 텐데. 세상에 제자밖에 없는 것처럼 굴던 건 전부 다 말뿐이었던가 보오. 도움이 필요할 때 입을 싹 씻는 것을 보면.”

    아진은 그런 말들을 듣자고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었다.

    제가 대단하다고 여기면 사람은 제 안에 있던 불순한 말들을 거침없이 꺼내놓곤 했다.

    아진은 척가상방에 엿을 먹일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생각한 계획이 너무 심하지는 않은가 해서 이런 촉진제가 조금 필요했던 것이다.

    아진은 짐짓 속이 상한 척하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스승님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삼가십시오. 제자가 불민하여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데 그렇다고 스승님까지 싸잡아서 욕을 하는 것은 참기가 힘듭니다.”

    “그러니 표행을 제대로 해야 했던 게 아닌가 이 말이오. 나라고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아시오?”

    방주가 말하자 아진이 어쩔 수 없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척가상방은 상방이니 이런 물건을 알아보실 수 있는 눈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먼저 여기로 왔습니다.”

    그러자 방주의 눈이 슬그머니 크게 떠졌다.

    “그게…… 무엇이오?”

    “실은 그동안 동생과 함께 돈을 마련하려고 영초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본가에서 마련할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고 빌리는 것도 그럴 것 같아서 말입니다. 돈을 빌린다고 해도 그 돈도 전부 다 다시 갚아야 하는데 돈을 빌리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요.”

    “영초…… 요?”

    방주는 그때까지 아진을 모욕하는 것에만 주력하고 있다가 그때부터 흥미가 동했다.

    좋은 영초가 있으면 그 쓰임새는 정말로 많았다.

    영초나 영약은 무가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용도를 달리해서 다른 곳에서도 쓰임새가 많았던 것이다.

    상방을 운영하려면 여기저기에 줄을 잘 서야 하고 편의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데 무가나 관부에 그런 것을 미리 챙겨 주면 어지간한 뇌물보다 효과가 더 좋았다.

    영초가 없는지 미리 묻는 곳도 있는데 그럴 때 준비해 두었던 영초를 건네주면 탄탄대로로 뚫린 미래를 보장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윗사람들도 뇌물을 써야 하는데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킬만한 뇌물로 영초 만한 게 없었던 것이다.

    “영초라면 뭘 말하는 것이오?”

    방주는 자기가 너무 적극적으로 관심을 나타냈다는 것도 잊은 채 물었다.

    그러나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산본의가의 이공자가 아닌가.

    그라면 영초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 자가 가져온 영초라면 얼마나 대단할까 해서 벌써 몸이 동했다.

    “무령독화라고 합니다. 방주님께서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무령독화? 설마…… 독공을 대성하게 해 주고 내공을 증진해 준다는 그것 말이오?”

    “예. 방주님. 방주님도 알고 계시는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방의 방주다.

    그런 사람이라면 물건의 진위는 알아볼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그를 지금 그 자리에 올려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을 구했소?”

    방주는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예. 운이 좋았습니다.”

    아진의 말에 방주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란 얼굴을 했다.

    “설마……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이오?”

    “보시면 알지 않겠습니까. 척가상방의 방주님이시라면 무령독화를 알아보시는 눈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진은 그 자리에서 무령독화를 꺼냈다.

    “……!”

    방주는 아진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무령독화를 낚아채 두 손에 들고 그것을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말로만 듣던 무령독화를 이렇게 직접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무령독화에 대해 전해지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무령독화에 대한 내용도 알고 있었는데 그것과도 거의 맞아 떨어지는 듯했다.

    풍성하고 긴 뿌리까지도 모든 것이 절묘했다.

    “고…… 공자. 이걸 정말 산에서 구했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아진은 그의 손에서 무령독화를 회수했다.

    무령독화는 아니고 무령독화의 짝퉁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눈이 돌아간 방주에게는 그것을 구분할 눈이 없었다.

    “이걸…… 나에게 가져온 이유가 무엇이오?”

    방주는 지금부터 이야기를 아주 잘 풀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담보로 맡길까 해서입니다. 방주님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무령독화에는 대단한 효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령독화가 대단한 것은 효능 때문만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영약 하나가 한 사람에게 돌아가고 끝나지만 무령독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뿌리가 이렇게 길지 않습니까.”

    방주는 목이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역시 그 뿌리를 보고 있었고 무령독화에 대해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길이의 뿌리를 먹으면 30년 치의 내공을 증진할 수 있고 단전이 없는 사람이 먹으면 평생 무병장수할 수 있다고 하는 영초였다.

    지금까지 전해진 이야기는 많지만 무령독화를 발견했다는 사람은 없어서 누구도 그 효과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직접 무령독화를 보고 나니 이게 꿈인가 했다.

    “공자. 이걸 나에게 담보로 주시오. 그러면…….”

    무령독화다.

    무령독화였다.

    일단 그게 눈앞에 보이자 다른 생각은 제대로 들지도 않았다.

    북궁세가 삼공자가 한 말이 있기는 했지만 북궁세가와 손을 잡아서 얻는 것보다 무령독화를 잡아서 얻는 이익이 훨씬 더 클 것 같았다.

    담보라고 했다.

    돈을 갚지 못하면 그것은 그대로 자신의 것이 되는 거였다.

    방주는 이미 눈이 돌아가서 다른 생각은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는 탐욕에 찌든 눈으로 무령독화를 보고 또 보았다.

    ‘그래. 이게 무령독화가 아니면 뭐가 무령독화란 말인가.’

    방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진에게 말했다.

    “내가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겠소. 공자?”

    “얼마든지 그렇게 하십시오.”

    아진은 짝퉁 무령독화를 주면서 웃음을 지었다.

    제선문주와 함께 산본의가에 오고 나서 아진은 그를 비룡채와 혈천방의 약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자리에 앉게 하고 그들의 앞에서 무령독화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처음에는 왜 그 자리에 제선문주가 함께 있는 건지 거기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던 사람들에게 제선문주는 자기가 약을 만들면서 알게 된 세부적인 사항들을 설명했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본디 약초는 비슷한 것들이 아주 많소. 가지의 숫자가 차이가 나기도 하고 꽃잎이 차이가 나기도 하고 이파리 끝이 둥근지 뾰족한지, 위를 향해 말렸는지 아래를 향해 말렸는지. 그런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소.

    제선문주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며 무령독화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무령독화는 아니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댁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을 수도 있을 거요. 이파리 수 같은 것은 상관하지 마시오. 진짜 무령독화를 찾으라는 것은 아니니까.

    -무령독화와 닮은 것을 찾아오라는 말씀인가요?

    -맞소.

    -그걸 어디다 쓰는데요?

    그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아진의 몫이었다.

    -무령독화라고 하고 우리를 속인 놈들에게 줄 겁니다.

    -그런데 정말 속을까요?

    -속을 정도로 비슷한 걸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걸 본 적이 있는지.

    -비슷한 게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건 무 같은 건 안 달렸는데.

    그들은 서로 자기들이 떠올린 것에 대해 말을 했고 그때부터 각자 뿔뿔이 흩어져 무령독화와 닮은 것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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