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138화
천문관은 절대 싫다고 하더니 북궁세가를 징치하기 위해서 금의위 도독은 될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린린이 아는 아진은 그런 자리에 묶여 있을 사람이 아니었고 그 일을 직접 맡지는 않고 황제와 거래를 하고 실무는 다른 사람에게 떠맡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린린은 아진이 다시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데 돈이 필요한 거면 곧바로 북궁세가에 가서 훔치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자들이 아무리 경계를 강화한다고 해도 우리가 가면 어쩌지 못할 거야.”
“그렇게 쉽게 할 생각 없어.”
“……응?”
“영초는 담보야. 미끼지. 서로 배신하게 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한 후에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처절하게 죽어 가게 할 거야. 영초는 배신할 수밖에 없게 하는 미끼고.”
린린은 그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아 아진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산본의가의 아이들이잖아. 우리가 다른 놈들이랑 똑같이 굴어야겠어?”
린린은 그제야 아진이 하는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담보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위약금의 지급을 유예해 달라고 하면서 영초를 구해다 준다면?’
린린은 그 생각을 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영초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상황에 맞는 영초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린린도 알고 있었다.
그런 영초를 구하는 일에 아진만큼 적격인 사람도 없었다.
약초도 잘 알고 무공도 잘 알고.
산본의가의 이공자라는 말과 북리의천의 제자라는 말이 그의 능력을 증명해 주는 거였다.
그런 아진이 자신의 이름으로 보증하며 영초를 건넨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영초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즉시 유혹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진과 아주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재미있겠네.”
린린은 아진의 말을 완전히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갈 건데, 오라버니?”
“바로 가자. 우선은…… 비룡채 아저씨들이랑 혈천방 아저씨들을 보고 나서.”
아직 그들을 보는 것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미룰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먼저 혈천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혈천방 사람들이 약초를 널고 사람들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공자님. 아가씨!”
그들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부방주였다.
아진은 그의 눈길을 받는 것이 미안하고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그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도 공자님이라는 말을 듣고 급하게 달려왔다.
그들도 사람들이 죽은 후에 아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할 수 없이 먹먹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들의 죽음이 그런 의미를 갖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오로지 자기들만 운이 없는 것 같고 아무도 자기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는 것 같아서 악에 받쳐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짝눈이 죽은 것은 슬펐지만 그들은, 만약 짝눈이 있던 자리에 자기들이 있었고 그래서 자기들이 대신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면 그다지 슬프지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게 취미이고 세상 모두를 넉넉히 발아래에 두는 아진이 그들의 죽음에 그렇게 책임을 느끼고 슬퍼하고, 죽은 후에도 오래오래 기억해 준다면 누가 그런 죽음을 허망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자님. 기운 내십시오. 그리고 너무 그렇게 찌그러진 주먹밥처럼 하고 계시지 마세요. 짝눈도 그걸 원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짝눈을 잘 압니다. 공자님. 짝눈이라면 공자님이 그러시는 거 전혀 안 고마워할 겁니다. 짝눈이 공자님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데 그러십니까?”
“맞습니다. 공자님. 짝눈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건 공자님하고 처음 만났을 때의 얘기를 했어요. 쪽팔리니까 그만 말하라고 했는데도 더럽게도 말을 안 들어 처먹었지요. 그러면서 시시덕거리면서 그때 공자님이 얼마나 당당했는지 모른다고 했었지요. 자기도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반쯤 따라잡은 것 같다고 해서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한두 사람이 모여들어 짝눈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들은 아진이 알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진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곁에 있던 막도가 말했다.
“공자님. 공자님은 참. 저희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만약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렇게 사는 게 옳다는 걸 알고도 이쪽으로 돌아오는 게 아주 어려웠을 거예요. 창피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공자님은 너무 강해서 고민 같은 걸 할 수가 없었잖아요. 말을 안 들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고민할 여지가 없었지요.”
막도의 말에 모두가 와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 그거야말로 가장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공자님은 저희보다 더 낫지도 않은 것 같고 악랄한 거로 따지면 더 하신 것 같아서 공자님처럼 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무인들은 위선적이잖아. 그런데 공자님은 내장까지 투명하게 다 드러나 보이잖아요.”
결국 아진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공자님. 웃으십시오. 짝눈도 좋아할 겁니다. 이제 저희가 짝눈 몫까지 살게요. 그러니까 더는 그 일로 괴로워하지 마세요. 저희는 공자님이 그 일을 잊지 않을 거라는 걸 압니다. 그러면 됐어요. 그러면 된 거예요.”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당분간 산본을 떠나 있을 겁니다. 영초를 찾으러 갈 거예요.”
“영초요? 약초제서에 있는 그 영초요?”
“네. 그게 시작이에요. 그걸로 복수할 거예요.”
그러자 한두 사람이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자기들이 들었던 온갖 소문들을 말해 주었다.
약초꾼들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했다.
“독공을 하는 문파에 아주 효과가 좋다는 영초에 대해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나타났다는 말이 나돌아서 한동안 무인들이 연정산에 몰려든 적이 있었대요.”
독공을 하는 문파에 좋은 영초가 나타났다고 거기에 독공을 하는 문파만 모여드는 것은 아니었다.
영약이 문파에 들어가서 대성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고수의 출현으로 인해 문파가 강성해지면 다른 곳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게 되기에 직접 영약의 효능을 볼 수 없는 곳도 같이 움직이게 마련이었다.
영초의 출현.
그것만큼 강호를 잔인하게 뒤흔드는 일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웃기는 영초가 다 있더라고요? 사람 손이 닿으려고 하면 도망친대요.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그걸 못 찾았대요.”
그러자 갑자기 생각난 듯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저도 그런 걸 들은 적이 있었어요. 용운산에 이상한 너구리가 있는데 그 너구리 머리에 산삼 같은 게 세 줄기가 나 있대요. 그런데 그걸 구하려면 그 너구리를 잡아야 하는데 너구리가 생각보다 엄청 사납다고 하더군요? 그건 독도 있다고 하던데.”
“너구리는 원래 독이 있어.”
“웃기고 있네. 너구리가 무슨 독이 있어?”
“있다니까 그러네. 이런 무식한 놈이 있나. 야. 너. 독사한테 독 있어. 없어?”
“독사는 독사니까 독이 있는 게 당연하지만 너구리라니까?”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서 아진이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들이 말하는 영초에 대해 급하게 기록을 하려고 했다.
“오라버니. 뭐 하는 짓이야? 구음절맥 앓던 여동생을 옆에 놔두고 뭘 써? 내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안 적어도 돼.”
“무슨 소리야, 린린? 따로 다녀야지. 너는 너구리 산삼을 찾아. 오라버니는 연정산으로 갈게.”
아진은 다른 의미로 놀라며 말했다.
“공평하네요. 공자님. 그렇게 하시면 되겠어요. 아가씨도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잖아요.”
린린은 그 계획이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그 외에도 여러 영초가 있는 곳에 대해 얘기가 한참 동안 더 나왔다.
그런 얘기 중에는 믿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일단은 가서 확인해 보면 될 듯했다.
“참. 운남에도 가 보세요. 공자님. 거기에는 독기운이 너무 강해서 사람들이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데 거기에 온갖 좋은 것들이 다 산다고 하더라고요.”
“이놈아. 그러다가 공자님도 돌아가시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해? 그런 소리를 한 놈이 누구야? 운남의 독지에 발을 들였다가 죽었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해?”
“아니. 그래도 아진 공자님은 워낙 남다르시니까요. 혹시 어려울 것 같으면 사천당문에서 피독구를 빌려서 가 보세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좋은 게 있다는 것 아닐까요?”
여기저기서 수많은 사람이 많은 얘기를 했는데 아진에게는 모두 다 귀한 정보였다.
“아 참. 절강성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영초가 파처럼 자라는 섬이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아진과 린린이 그곳을 나서려 했을 때 송효원에게서 나왔다.
송효원은 갑자기 아진이 자신을 바라보자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이 입을 막았다.
그건 정말 믿기 어려운 얘기였고 자기 자신도 믿지 않았는데 괜히 그런 소리를 했다가 아진의 시간만 뺏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혹시 그 얘기 하시는 거예요. 방주님? 그 머리 희고 정신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하는 말요. 자기가 육지에서 백 리 떨어진 섬에서 배도 없이 왔다고 말하던 미친놈이 한 말을 정말 믿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
“어…… 아니. 나는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백 리 떨어진 섬에서 배가 없이 어떻게 왔다는 건데요?”
아진이 묻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손사래를 쳤다.
“그 사람은 그냥 미친 사람이에요. 공자님. 이 말에 귀 기울이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가세요. 괜한 시간 낭비예요.”
송효원조차 그렇게 말했지만 아진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얘기라도 해 달라고 말하고 그 미치광이가 나타난다는 곳까지 열심히 적어 갔다.
“찾아볼 곳이 많네.”
아진은 밖으로 나가면서 린린에게 말했고 린린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같이 다니자고 아진을 졸랐다.
린린도 평소 같으면 아진을 걱정하지 않았겠지만 표행 때는 아진 때문에 놀란 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내공과 마나까지 전부 떨어져서 위험에 처하는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다가 그런 일을 당하고 나자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럴 때는 흑주라도 옆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흑주를 아진에게 줘 버리자고 생각하면 자기도 좀 불안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흑주에 대한 믿음과 의존도가 커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