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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36화 (136/470)

제136화

136화

“이, 이놈들아. 다가오지 말아라. 다가오지 말란 말이다. 네놈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 네놈들이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누가 알겠습니까. 공자님. 우리가 공자님을 죽인 것을요. 그리고 공자님이 죽어 버린 것을요.”

무인들의 얼굴에 비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그…… 그러지 말아라. 내가 모아둔 재산이 있다. 그걸 너희에게 주겠다. 화, 황금 여, 열 관씩. 각자에게 황금 열 관씩을 주겠다. 그거라면 너희에게도 적은 돈은 아니지 않으냐. 아우에게서 도망쳐라. 절대 너희를 쫓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은 아주 잊을 것이다.”

혹하는 제안이기는 했지만 그 말에 흔들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하월의 존재가 그들에게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던 탓이었다.

황금 열 관보다 목숨이 더 중요했다.

지금 황금 열 관에 혹해서 그것을 받아 숨어든다고 해도 하월이라면 자신의 수족들을 부려 어떻게든 그들을 찾아낼 것만 같았다.

바라서는 안 되는 것에는 처음부터 미련을 두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그들은 어느덧 깨닫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이가 북궁마영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돌려 버렸고 그의 목뼈가 부러졌다.

목이 그렇게 되고도 다리는 잠시 더 발버둥을 치며 움직였다.

끄, 으으윽……!

그 소리가 정말 들렸는지 환청이었는지 분명치는 않았다.

그리고 얼마후, 마침내 완전히 숨이 끊어진 북궁마영의 시신이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북궁세가 망나니가 죽고 세가의 괴물이 전면으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 * *

하월의 명령을 받고 표사로 잠입한 자들은 자결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산본표국에 끌려가 강도 높은 고신을 당했고 누가 무슨 이유로 시킨 일인지 전부 자백을 해야 했다.

표두와 표사들을 잃은 아진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런 아진이 직접 행하는 고신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신을 받는 자가 정신을 잃으면 다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은 어느 뇌옥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죽으면 살려내서까지 끊임없는 고통을 이어나가는 아진은 악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으아아악!”

“사, 살려……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발…… 으흐으으윽!!”

곳곳에서 참혹한 비명이 쉴 틈 없이 이어져 나왔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아진의 차가운 음성은 대기까지도 압도하며 뒤틀어 버리는 듯했다.

“고, 공자님…… 저희는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저희도 어쩔, 어쩔 수 없이…….”

“그러면 나를 이해할 수 있겠구나.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서 이러는 것이니 말이다.”

나중에는 정보를 아끼고자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고 아진은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긁어냈다.

“돈이더냐. 결국 돈이더냐. 그걸 위해서 그런 것이라는 말이냐.”

그럴 거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막상 그 말을 듣고 나니 훨씬 더 괴로웠다.

“차라리 다른 말을 하지 그랬느냐. 다른 이유로 그랬다고 하지. 왜 돈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냐. 그러면 그 사람들의 죽음이 뭐가 되냐는 말이다. 그깟 돈 때문에 죽은 거라면…… 그러면 나는 그들을 어떻게 봐야 하냐는 말이다.”

아진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거대하고 강한 산성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공자님. 부디 마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짝눈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러기를 바랄 것입니다. 부디 굳게 마음을 먹으십시오. 공자님이 이 일을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는지요. 이렇게 억울하게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 아닙니까.”

“짝눈이라면 기대할 것입니다. 공자님. 자기는 죽었지만 자기를 그렇게 만든 놈들의 삶이 훨씬 더 끔찍해질 거라는 생각에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저는 압니다. 저라도 그럴 테니까요. 그렇게 해 주십시오. 공자님. 복수해 주십시오.”

천이재와 송효원이 그의 곁을 지키며 한 말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아진은 얼마나 더 오래 깊은 나락에서 방황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모두…… 저를 지켜봐 주세요. 모두요…….”

흔들리던 목소리는 어느새 다시 굳건해졌다.

움켜쥔 주먹에는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 * *

소문은 왜곡되어 퍼져나갔다.

잔인한 고신 끝에 알아낸 진실을 아진은 적당히 각색하고 포장해서 소문을 퍼뜨렸다.

원래 표사들이 표물을 탈취해 북궁세가로 돌아가야 했지만 표물이 워낙 값나가는 것이라 그들이 북궁세가로 가지 않고 자기들끼리 그것을 처분하기 위해 다른 것으로 도망쳤다는 식이었다.

도망쳤다는 표사들이 사실은 산본표국의 모처에 갇혀서 혹독한 고신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사실을 아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수시로 그 진위가 바뀌어서 크게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살아난 사람이 다시 죽기도 했다.

아진에 의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고 목이 터지게 비명을 질렀다.

소망할 것이 이제 죽음뿐인 사람들에게, 죽음은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낱낱이 아는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한 동료들을 위해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불타올랐다.

그날 함께 표행에 나섰던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워낙 표물의 값이 비싸고 위약금의 액수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기에 소문은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산본의가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며 소식을 날랐지만 그들을 경쟁 관계로 여기며 몰락을 기대하는 이도 있었다.

그동안 너무 기고만장했다는 둥 자만했다는 둥 온갖 소리가 나왔다.

쓰러진 것도 서러운데 쓰러진 몸으로 돌이 날아와 박히는 것 같은 형국이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더욱 강하게 날아와 박혔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산본의가의 사람들은 무섭게 단합이 되었다.

이제 복수는 선택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였다.

* * *

하월은 표사들이 표물을 가지고 도망쳤다는 소문을 들었고 처음에는 불처럼 화를 냈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놔두어라. 그 정도는 용서해도 되겠지. 감히 내 것에 손을 댔다는 것은 화가 나지만 이 정도 잡음이 없이 일이 지나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나는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

그는 한없이 너그러운 듯 말했다.

도망친 표사들은 찾아내서 잡아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고 일단은 위약금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며 산본의가를 족칠 생각에 벌써 꿈에 부풀었다.

표행을 의뢰한 주체가 하월이나 북궁세가가 아니라 전면에 나서서 서도진을 추궁할 수 없다는 점이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그 건방진 인간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그것도 꽤 만족스러웠을 텐데.”

그래도 그의 위임을 받은 자들이 만족스럽게 움직여 주었다.

산본의가의 가모와 표국의 국주, 그리고 서도진까지 아주 꼼짝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월은 그 소식을 바로바로 보고를 받으려고 산본 가까운 곳에 장원을 얻고 그곳에서 지냈다.

그때부터 그를 대신해 표물 운반을 의뢰했던 이들이 번질나게 장원을 드나들며 진행 상황을 보고했고 하월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좋습니다. 대인들의 노고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구문제독부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데 지금 있는 사람 중에는 충성심이 의심되는 자들이 많지요. 여러분이 이번에 큰 충성심을 보여주었으니 앞으로 여러분을 믿고 함께 일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월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약속했고 그 동맹은 굳건해 보였다.

“장대인. 표물의 값이 얼마였습니까.”

“황금 열세 관이었습니다. 공자님.”

“그러면 위약금으로 받을 것이 황금 서른아홉 관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의뢰비가 비싸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큰 이문이 남았습니다.”

“의뢰비는 당장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공자님.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자님과 북궁세가를 위한 작은 성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 봤자 은자 천 냥이 조금 넘는 것을 가지고 생색을 내는 것이 가소로웠지만 하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서로가 신뢰를 보여주면서 관계를 돈독히 해 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모는 언제 만날 생각이오?”

“공자님과 상의한 후에 바로 보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좋소. 인근의 전장과 고리대금업자들이 절대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오. 대인들의 힘으로 어려울 것 같으면 본가가 나설 것이니 미리 말을 해 주세요.”

북궁세가가 나서서 돈줄을 틀어쥐었을 때 높은 이자를 받으며 어부지리를 얻은 고리대금업자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간과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나오면 과거의 잘못까지 물어서 뼈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개에게 주자고 죽을 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아무래도 공자님이 직접 나서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운 자들이라면 이자에 욕심을 내서 돈을 빌려주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이 북궁세가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월은 사람들을 시켜 인근의 업자들을 만나게 했다.

전장과 상단, 표국, 고리대금업자.

웬만큼 돈이 돈다 하는 곳은 전부 찾아가 산본의가에 돈을 빌려주지 못하도록 말을 해 두었다.

그러나 황금 한 관도 융통하기 어려운 곳은 그냥 놔두었다.

그런 곳은 괜히 소문만 퍼지고 실효성은 별로 없어서였는데 그렇게 하고도 하월은 산본의가가 결국 자기들이 운영하는 황도의 만전을 찾아올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물어야 할 위약금이 모두 황금 이백여 관에 달했다.

그것은 몇 달 치 황실의 운영비와도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액수였고 만전이 아니면 한 번에 그것을 다 융통해 줄 수도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월은 모든 것이 뜻대로 되어 간다는 생각에 환희를 감추지 못했다.

‘이 일이 성사되기만 하면 북궁세가의 가주는 내 차지가 될 수도 있음이다. 큰형님은 그동안 너무 안일했지. 아버님도 이 일이 되는 것을 보면 누구에게 세가를 맡겨야 할지 아시게 될 것이다.’

하월은 자꾸만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 * *

북궁세가주가 하월을 부른 것은 며칠 후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양자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처가 낳은 북궁마영이 영 시원치 않아 양자를 하나 들였는데 그것이 아주 요물이었다.

하월은 처음부터 그 이름이 하월이었다.

별호 같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북궁천영, 북궁마영, 북궁하월.

그의 아들들이 ‘영’자를 썼지만 하월에게는 ‘영’자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월은 그것을 저의 별호라고 말하며 자신이 양자임을 숨겼다.

그런 말로 눈가림이 될까 했는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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