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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35화 (135/470)
  • 제135화

    135화

    결과적으로 자기가 짝눈을 죽을 자리로 내밀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짝눈…… 이러라고 보낸 게 아닌데 왜…… 왜 이러고 있어. 인마. 왜…….”

    목구멍에 막혀서 제대로 나오지 않던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크게 터져 나왔다.

    “오라버니…….”

    린린은 아진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품에 있던 흑주만이 조용히 나와 아진의 몸에 마나를 불어넣어 줄 뿐이었다.

    아진은 자기가 이대로 회복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온 마나로 다시 짝눈과 표사들을 고치려고 해 봐도 그들의 생명은 다시 살릴 수가 없었다.

    “…….”

    생기를 잃은 듯 텅 빈 아진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그러다가 그가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오라버니.”

    린린이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님.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천이재가 아진의 곁으로 와서 표사들을 심문해 알게 된 사실을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떨렸다.

    수많은 살육이 벌어지는 한가운데서도 담대하게 검을 휘두르던 천이재였지만 자신의 오판으로 인해, 새로운 표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아진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 갔다.

    상실감은 생각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바닥이 없는 공간으로 자신의 몸이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꾹 감았다.

    제발 현실이 아니기를.

    눈을 뜨면 짝눈이 다시 웃으면서 말을 걸어 주기를 바랐지만 냉혹한 현실이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아……’

    처음에는 참아지던 비명이, 나중에는 손쓸 수도 없게 터져 나와 버렸다.

    “으아아아!!”

    온몸을 난도질당한 맹수처럼 그에게서 끔찍한 비명이 끝없이 터져 나왔다.

    * * *

    석실 안에 있던 다섯 명의 사내는 의식을 잃은 후에도 이리저리 몸이 내던져졌다.

    처음에는 맞을 때 퍽, 퍽 소리를 내던 몸이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온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짓이겨진 살 때문에 적, 적 거리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하월은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북궁마영은 자신의 동생이 한 번씩 이렇게 미쳐 날뛸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석실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북궁세가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임무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하월의 분풀이 상대가 되어 있었다.

    “그만해라, 하월. 그자들이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지 않으냐. 무슨 이유로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말이다.”

    북궁마영이 말했지만 하월은 그런 그를 보고 같잖다는 듯이 빙긋 웃을 뿐이었다.

    “형님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그렇지요. 형님은 모르십니다. 무슨 이유로 이러는지. 이 자들이 지금 왜 이런 일을 당하는 건지 모릅니다.”

    말을 하고 나니 더 우스워서 하월은 더 크게 웃었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하월. 네깟놈이 함부로 말할 만큼 우스워지지는 않았다.”

    “아직도 그렇게 멍청하니…… 아직도 상황 파악을 전혀 못 할 정도로 멍청하니 이렇게 된 것을 누굴 탓하겠습니까. 이렇게 멍청한 분이라는 걸 알았으면 아버님도 형님도 이제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고 형님을 그냥 처리하시는 게 옳았습니다. 구질구질한 인연 따위에는 눈을 감으시고 말입니다.”

    “이놈! 신분도 모르는 놈을 주워다가 키웠더니 어디서!”

    북궁마영의 말에도 하월은 코웃음을 칠 뿐 전혀 주눅 드는 표정이 아니었다.

    “잘난 형님이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만 않았으면 본가가 이런 짓을 하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형님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겁니다. 세상은 북궁세가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형님이 세상 사람들의 안줏거리가 되는 건 상관이 없지만 본가는 아닙니다.”

    하월은 차라리 북궁마영이 나가서 혼자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북궁마영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서 무시무시한 폭행을 당하고 있는 이들은 북궁마영을 죽이라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서 그 일을 겪고 있었다.

    하월 자신은 무공을 하지 못했지만 하월의 호위라면 얘기가 달랐다.

    형제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명령이 달라질까 해서 행동을 멈췄던 호위는 하월의 눈짓을 보고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무인들의 몸을 하나하나 들어 벽에 내던졌고 그때마다 그들의 뼈가 부서지며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운이 좋은 사람은 벽에 부딪히며 즉사했다.

    차라리 그것이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다른 이들은 죽을 때까지 그 지독한 고통을 계속해서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우야. 앞으로는 조심할 거다. 앞으로는 정말 웬만하면 밖으로 나가지도 않을 거고 집안에서 머물면서 근신할 거다. 그러니 이제 화를 좀 풀어라.”

    북궁마영은 계속 대립각을 세워 봤자 결국 불리한 건 자기라는 인식이 있었는지 다시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북궁마영은 하월이 자기를 불렀을 때 그저 차나 한잔 마시자는 뜻인 줄만 알았다.

    그를 부르러 온 하인이 한 말도 분명히 그거였다.

    그런데 석실로 데려오더니 하월은 그때부터 북궁세가의 무인들에게 계속해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북궁마영은 자기가 당하는 것만큼이나 소름이 끼쳤다.

    무슨 일이냐고 말해도, 사람을 불러놓고 왜 말이 없냐고 해도, 할 말이 없으면 그냥 나가겠다고 해도 하월은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하월은 아직 자신의 호위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때 석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에 있는 석실에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에 하월은 호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호위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석문 앞으로 다가갔다.

    “무어냐.”

    “삼공자님께 급한 소식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답이 들려왔다.

    호위가 하월을 바라보자 먼저 그를 보고 있던 하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주어라.”

    석실의 문이 열리고 밖에 있던 무인이 급히 하월에게 다가왔다.

    “성공입니다. 공자님. 표물을 훔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하월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역시 이렇게 되는 것이 맞았다.

    그가 계획을 세우면 그대로 되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선문주가 반항을 하면서 심사가 뒤틀렸는데 새로 세운 계획이 적중한 듯했다.

    “모든 표물을 다 탈취했다더냐.”

    감정의 통제가 능숙한 하월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기쁜 마음이 얼굴과 목소리에 솔직하게 드러났다.

    “그것이…… 하나는 산본의가의 이공자에게 들켜서 표사로 위장한 자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뭐. 상관은 없겠지. 하나 정도라면. 멍청하게 들키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다른 성공이 워낙 커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것까지 성공했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는 퍽 자비로워졌다.

    “예. 공자님. 모두 자결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잡혀서 이 일을 발설하면 남아 있는 가족들이 모두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모두 처음부터 이에 극독을 붙이고 나갔습니다. 붙잡히기 전에 터뜨려 죽었을 것이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랬을 거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네놈의 추측을 듣자고 물은 것이 아니야.”

    하월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예. 공자님. 죄송합니다.”

    “하나가 실패하고 다섯이 성공했다. 평균적으로 표물의 가치가 황금 열 관은 될 것이고.”

    “그렇습니다. 공자님.”

    “위약금이 세 배지?”

    “그렇습니다. 황금 백 오십 관을 준비하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무리일 것입니다. 전장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때 돈을 빌려주고 막대한 이자를 물리면 산본의가도 얼마 안 가 무너질 것입니다.”

    “표물의 값이 정확히 얼마더냐.”

    “송구합니다만 그것까지는 잘…….”

    하월은 혀를 찼다.

    저라면 그것도 전부 기억을 해 두었을 것이다.

    황금 한 관의 차이가 얼마인데 그걸 어림짐작으로 계산을 하게 만드는 것인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북궁마영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게 다 무슨 이야기인가 했다.

    그러나 동생에게 무슨 말이냐고 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는 구문제독인 형님보다 오히려 동생이 더 무서웠다.

    지금만 해도 그는 하월의 눈치를 보느라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석실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이렇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하월은 한결 기분이 나아진 듯하더니 제 호위를 바라보았다.

    “나가자. 기분이 좋으니 저놈들은 살려두도록 하지. 저놈들도 분풀이할 상대가 필요할 것 같은데 무기는 놔주고 가자.”

    분풀이라고 말하며 하월이 북궁마영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예. 공자님.”

    하월의 호위는 그가 뜻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품에 있던 비수며 암기들을 풀어 놓았다.

    북궁마영은 그때까지도 그들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쭈뼛거리며 하월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월이 석실을 떠나니 자기도 같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하월의 호위가 북궁마영의 걸음을 저지했다.

    “이공자님은 여기에 계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일이 끝날 때까지 이공자님은 여기에 계시는 것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이공자님이 만든 문제를 수습하시려고 저희 공자님이 이렇게 애를 쓰시는데 밖으로 나와서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그…… 그게 무슨…… 아니. 나는…… 정말 앞으로는…….”

    북궁마영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매달렸다.

    “이, 이러지 마시게. 나를 데려가 주시게나. 아우야. 나를 데려가거라. 내 처소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정말이다. 사람을 붙여 두고 감시를 하면 되지 않느냐.”

    “내가 왜 그래야 한다는 말입니까. 형님. 북궁세가의 무인들이 얼마나 고급 인력인데 그런 자들에게 고작 형님을 지키는 일이나 시켜야 하겠습니까.”

    하월이 싸늘한 얼굴로 북궁마영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었다.

    “살아계시면 언젠가는 또 볼 날이 있겠지요. 하지만 너무 살려고 애를 쓰지는 마십시오. 스스로 끝을 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다행히 본가에는 기꺼이 그런 일을 해 줄 자들이 있으니 다행이 아닙니까.”

    하월은 북궁마영을 바라보며 말을 마치고 석실에 남겨진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하월이 원하는 것을 알아들은 듯 포권을 취해 보였다.

    첫 번째 임무는 실패했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었다.

    죽여야 할 상대와 함께 석실에 남겨지게 됐으니 여기에서도 북궁마영을 죽이지 못한다면 다시는 살아남기를 기대해서는 안 될 터였다.

    “내일 아침에는 문을 열어 주도록 하겠다. 그때까지는 나올 수 있도록 하여라.”

    하월이 의미 모를 말을 했다.

    “예, 공자님. 감사합니다!”

    무인들의 대답을 들으며 북궁마영은 서서히 현실을 깨달았다.

    “아우야. 아우야……! 이러지 말아라. 내 다시는 함부로 살지 않을 것이다. 네가 시키는 것은 뭐든 할 것이다. 네 눈앞에서 아주 사라지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나를 용서하거라. 한 번만…… 한 번만 나를 살려다오……!”

    “좋군요. 형님. 제 눈앞에서 사라지십시오. 그러면 되겠습니다.”

    하월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갔고 석실에 남은 이들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북궁마영은 저를 향해 다가오는 자들을 보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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