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134화
그곳을 떠나 천상제를 전개하며 다른 표행을 찾던 아진의 눈에, 한바탕 피바람이 부는 곳이 들어왔다.
“모두 멈추어라! 움직이는 자는 모두 그 자리에서 죽게 될 것이다!”
아진은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크게 외치고 그들 가운데로 내려섰다.
잘만 한다면 늦지 않고 모든 표사와 쟁자수들을 구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한 곳에서 시간이 너무 오래 지체되어서는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표두님!”
아진은 혈천방의 방주 송효원에게 다가갔다.
송효원은 아직도 놀라고 충격을 받은 듯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깊은 검상이 생겨나 있었고 하얀 뼈까지 드러난 상태였다.
“공자님!”
갑자기 공격을 당하고 이대로 다 끝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아진의 모습을 보자 그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진의 경고에 다른 이들은 검을 내렸는데 끝까지 검을 잡은 채 공격을 이어나가려는 자들이 있었다.
아진은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검기를 날렸고 그에게서 날아간 검기가 정확히 그들의 팔을 날려버렸다.
“으으으악!”
날카로운 비명이 귀를 파고들었다.
“왜 이러십니까. 저희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먼저 공격한 자들에게서 우리를 지키려고 그런 것뿐입니다!”
“저놈들이 하는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공자님. 저놈들이 느닷없이 검을 빼 들고 옆에서 저를 찔렀습니다.”
아진은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렸고 쓰러진 이들 중 부상이 심한 사람들을 치료하고 남은 이들은 약으로 치료하게 한 후 송효원을 바라보았다.
송효원은 더 이상 몸에서 피가 흐르지도 않고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이 신통한 솜씨로 사람들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끝까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국주님이 있는 곳도 당했습니다. 다른 곳에도 가 봐야 하니 이곳은 방주님이 책임지십시오. 누가 벌인 짓인지 다른 곳에서 저지를 계획은 뭔지도 알아보시고 지원할 수 있으면 지원해 주십시오.”
“예. 공자님.”
아진은 그런 식으로 다른 표행을 뒤쫓았지만 마지막 하나만큼은 시간이 지나도록 찾지 못했다.
그들이 원래의 진로를 벗어나 다른 길을 통해 가서 그런 거였는데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계곡의 물이 불어, 정해진 길을 벗어난 것이 화가 되었다.
천상제를 전개하고서는 그들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숲으로 들어간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계속 헤매면서도 전혀 찾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결국 아진은 밑으로 내려갔다.
“짝눈 아저씨이이이!”
짝눈이 이쪽으로 온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여러 곳이 동시에 표행을 나가다 보니 전력을 균일하게 정하기가 어려웠고 마지막까지 각각의 구성을 확인하다가 짝눈이 혈천방주 송효원이 있는 곳에서 떠밀려 이쪽으로 왔던 것이다.
이쪽이 구성이 조금 약하다고 해서 이동한 건데 그 일로 송효원이 잔소리를 듣게 생겼다.
그는 제발 송효원이 짝눈에게 잔소리를 듣게 되기를 바랐다.
짝눈이 아직 살아 있기를, 그들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아진은 짝눈을 몇 번이나 더 불렀다.
상승무공인 천상제를 너무 오래 전개해서인지 그도 힘이 들었다.
요즈음 이렇게 힘이 든 적은 없었던 듯했다.
‘흑주라도…….’
그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 말을 하려고 하다가 린린이 곁에 없는 것을 깨달았다.
린린은 그날 표행에서 돌아와 쉬는 중이었다.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적어도 하루라도 쉬라며 모두가 린린을 만류했었다.
‘별일이야 있겠어?’
아진은 불길한 기분이 들려고 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생각했다.
그러다가 섬뜩한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스걱-.
“……!”
그는 그대로 경공을 펼쳐 달려갔다.
천상제까지 펼치는 것은 이제 한계였다.
단전이 붕붕 소리를 냈고 공력이 생각만큼 모이지 않았다.
즈으윽-.
‘……!’
아진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살갗을 가르고 주욱 그어 내리는 소리.
아진은 단전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 펼쳐진 것을 보았다.
마차와 수레는 엉망으로 쓰러져 있었고 피투성이가 된 쟁자수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을 쫓아가려는 이들은 같은 산본표국의 표사들이었고 혈천방과 비룡채의 표사들이 그들을 한사코 붙잡았다.
표두로 봉해진 북리세가의 무인들은 보이지 않았는데 심장에 칼이 박힌 채 바닥에 쓰러진 모습이 나중에 눈에 들어왔다.
“놔, 이 개 같은 놈아!”
검집으로 다른 표사의 머리를 힘껏 내리치며, 아진이 얼굴을 모르는 표사가 소리쳤다.
이번 일로 급하게 충원된 표사이자……
간자였다.
“살다 살다 이렇게 질긴 놈들은 처음 봤네!”
다른 놈이 짜증스럽게 소리치며 짝눈의 가슴팍에 칼을 쑤셔 넣었고 그대로 칼을 돌렸다.
그런데도 짝눈은 놈의 팔을 붙잡은 채 놔 주지 않았다.
‘……아저씨!’
단전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아진은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놓으란 말이다, 이 진드기 같은 놈아!”
아진이 소리치자 표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고, 공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무슨 상관이야? 다 죽여 버리면 되지! 다른 데서 싸우고 왔나 본데. 우리가 이길 수 있어!”
놈들이 서로 소리를 질러댔다.
단전은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내공이 부족할 때마다 그 자리를 채워 내달리던 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아진도 알지 못했다.
몇 번은 휘적거리며 앞으로 쓰러질 뻔했다.
“짝눈 아저씨……!”
쟁자수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애쓰고 있다는 것이 아진에게는 믿기지 않았다.
그 긴 시간을 통해 혈천방과 비룡채의 사람들이 변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기들의 목숨은 지킬 줄 알았다.
설마하니 쟁자수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끝까지 버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다면 전혀 어렵지 않게 그곳을 떠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아저씨!”
아진이 부르짖는 소리에 짝눈이 아진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는 것만 해도 너무 힘이 드는 듯, 시간이 한참이 걸렸다.
그렇게 돌려진 얼굴에 기쁨이나 기대의 표정은 지어지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미 힘을 너무 많이 쏟아버린 듯 가쁜 숨을 토했고 그럴 때마다 피가 한 웅큼씩 토해졌다.
“아저씨…… 제가…… 왔다고요…….”
얼굴 위로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그 빗방울이 쉬지 않고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눈물이 흘렀다.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그것뿐이었다.
생전 이런 무력감을 느낀 적이 또 있었던가.
적어도 무림 세계에 오고 나서는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절대로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해일처럼 그를 덮쳤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도 새로 흐르는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렸다.
짝눈의 입이 벌어지고 거기에서 무슨 말인가가 흘러나왔고 몸에서 경련이 일었다.
짝눈이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는지 아진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자기가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던 것이 내공 때문이었다는 것을 아진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내공이 바닥을 드러낸 지금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손을 들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단전이 깨질 것 같은 것을 무시하며 아진은 몸을 날렸다.
표사들은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누구 하나 아진에게 먼저 덤벼들지 못했다.
아진에 대해서는 이미 질릴 정도로 이야기를 많이 들어 두려움에 잠식되어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진은 짝눈의 심장에 칼을 쑤셔 박은 자의 목을 뜯어냈다.
순전히 손의 괴력만을 사용해 목을 비틀어 죽이고 몸을 내던진 아진은 짝눈의 몸에 마나를 불어 넣으려 했다.
그러나 마나는 아진의 명령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실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듯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하나, 둘 그의 모습을 보며 뒤로 물러섰다.
표물을 훔치는 것까지가 그들이 맡은 임무였다.
공자를 죽일 필요는 없었고 괜한 일에 나섰다가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의뢰받은 물건이 든 상자를 들고 네 명의 표사가 한꺼번에 움직였다.
“서둘러!”
그들은 그때까지도 자기들이 성공적으로 그곳을 도망쳐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공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해서였다.
아진은 기력이 거의 소진된 몸으로 침통을 꺼냈다.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네 개의 장침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날아갔다.
벌에 쏘인 것처럼 따끔한 감각을 느낀 이들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며 장침을 뽑아냈다.
“뭐야. 산본의가의 공자라고 이런 것까지 하는 건가?”
표사들은 짜증스러움이 가득 묻은 얼굴로 아진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이곳의 일을 확실하게 끝내 버리겠다는 의지가 그들에게서 묻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로 끝이 났다.
극독인 패혈산이 묻어 있던 장침은 그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 갔다.
장침에 독을 미리 발라두면 막상 그것을 사용할 때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기에 평소에는 웬만해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부분 자신의 힘으로 모두 해치울 자신이 있었기에 그것을 준비할 필요성이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아진을 뒤흔들지 않았다면 아마 패혈산을 묻힌 장침도 준비하지 않았을 터였다.
‘…….’
아진은 바닥에 쓰러진 자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녹아내리는 고통에 어찌나 몸부림을 쳤는지 그들의 주변에 있던 흙이 파여 나갔고 그들이 내리친 힘으로 손등이 까지고 뼈가 부러졌다.
손톱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빠졌고 손가락에는 살이 벗겨져 뼈가 드러났다.
아진은 짝눈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짝눈의 몸에 마나를 밀어 넣으려 했지만 반응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주위에는 혈천방과 비룡채의 사람들이 잔뜩 쓰러져 있었다.
마나가 통하지 않는 게 혹시나 짝눈의 문제 때문은 아닐까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마나를 불어넣으려 했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갑자기 이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잖아. 왜! 왜 갑자기!!’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그들을 구하고 싶은데 왜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 건지 너무 화가 나서 아랫입술을 짓씹자 피가 나왔다.
그러나 그것뿐 변하는 것은 없었다.
아진은 스스로 그 상황을 돌이키지 못했다.
도망치던 쟁자수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그들은 아진을 알아보고 그의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쏟아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아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렇게 돼버렸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는 자책이 밀려들었다.
“말을 타고 가서 다른 분들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공자님.”
시간이 지나고도 아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쟁자수 두 명이 함께 말을 하고 그곳을 떠났고 반 시진이 지났을 즈음 처참한 얼굴의 린린이 천이재와 함께 도착했다.
뒤늦게 혈천방의 방주인 송효원도 나타났다.
그들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
송효원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짝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