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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33화 (133/470)
  • 제133화

    133화

    수많은 사람이 표국에 모여 수레와 마차에 열을 지어 서서 짐을 싣고 있었다.

    표행을 마치고 돌아온 표사들은 오래 쉬지도 못하고 다시 표행을 나서야 했다.

    인근에 작은 규모의 표국들이 있었는데 일을 의뢰받는 것도 그렇고 표사를 계속 고용하는 문제에도 어려움을 겪어 속속 산본의가의 표국 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다른 표국이 가져갈 일거리까지 전부 독점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던 산본표국은 이제 한층 편해진 마음으로 일을 의뢰받아 표행을 나갔다.

    “이번 표물도 값나가는 물건이 상당히 많습니다. 표물 값이 자그마치 황금 열두 관치라 아마 본가의 표국이 아니었으면 표행을 맡지도 않았을 겁니다.”

    천이재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아진과 벽예월에게 말했다.

    “신기하기는 해요. 보통 표물을 맡길 때 이렇게 제값을 다 말하는 사람들이 없잖아요.”

    벽예월이 말하자 천이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본가가 워낙 까다롭게 구니까 잘못 하다가 나중에는 표행을 못 맡길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아닐까요?”

    “그렇기는 할 거예요. 가모님도, 국주님도 워낙 철두철미하시니까요.”

    벽예월이 말했지만 아진은 조금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황금 열두 관치 물건을 표국에 맡겨 운반을 의뢰한다는 거야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요즘 그런 물건이 유난히 많았다.

    아진이 그런 생각을 할 거라는 걸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천이재가 말했다.

    “내각대학사를 지내다 내려온 대인의 생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리 선물을 보내느라고 그런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자리에는 워낙 고가의 선물이 몰리다 보니 도적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물건을 노리는 일이 왕왕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일에 앞서 일찍 보내는 듯합니다.”

    “그러면 목적지가 모두 같습니까? 생일을 맞은 사람의 집으로 가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건 아니고 가는 길에 다른 곳에 내려놔야 할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것 하나만 가지고 표행을 의뢰하는 것은 아까웠겠지요.”

    “그렇군요.”

    그러면서도 뭔가 불편한 기분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는데 천이재가 다시 말을 이었다.

    “표물의 값이 상당한 만큼 표사도 넉넉히 붙이려고 합니다. 괜히 표사를 아끼려고 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라서요. 보통은 쟁자수 칠십 명에 표사가 서른 명씩 가던 것을 이번에는 표사의 수를 쉰 명까지 늘렸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나가는 표행이 많은데 그 수가 다 됩니까?”

    “무관에서 숙련된 문하생들을 차출하기도 했고 이번 일로 표사들을 충원했습니다. 기간이 촉박하기는 했습니다만 돈을 아끼지 않았더니 마흔 명 정도는 모였습니다.”

    “수익도 수익이지만 표사들이 다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진은 여전히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그 정도로 해 두었다.

    “예. 공자님. 가모님도 매번 그 점을 말씀하십니다. 저도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이번에 표행을 의뢰받아서 숨통이 많이 트였습니다. 시기가 정말 절묘해서 전장에서 돈을 빌리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고요. 표행비는 모두 선불로 받았습니다. 적지 않은 돈인데도 말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우선 선금을 주고 표행이 성공했을 때 완납하는데 운이 좋았지요.”

    “예. 국주님만 믿겠습니다.”

    “예. 공자님. 이번 일만 잘 성사되면 매년 비슷한 일을 의뢰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큽니다. 생일은 이맘때 매번 돌아올 테고 사람들이 그때마다 선물을 보내려고 한다면 말입니다. 그 대인이 황제 폐하의 총애만 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계속 비싼 선물을 보내려고 할 테니까요.”

    천이재는 이미 그런 것까지 생각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표사들만 가는 것도 아니고 산본의가에 남아 있던 북리세가의 무인들도 함께 떠나는 것이라 그 정도면 충분할 거라는 마음도 들었다.

    표행이 실패해서 표물을 약탈당하면 표물 값의 세 배에 달하는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약정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천이재가 그렇게까지 말을 했는데 다시 한번 그 말을 꺼내는 것도 무엇했다.

    준비가 끝난 쟁자수들이 표행에 나섰다.

    표사들이 말에 타고 긴 대열의 옆에 붙어서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곳곳에 산본표국의 깃발이 꽂혀 있었고 그것만 봐도 도적들이 미리 도망칠 거라던 천이재의 말이 떠올랐다.

    “벽 소저. 아무 문제 없겠지요?”

    아진이 묻자 벽예월이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은 제가 점성술사인 줄 아시는 모양입니다.”

    “아…….”

    아진은 자기가 봐도 유난스럽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먼저 출발한 표행을 뒤따르고 말았다.

    이렇게 불길한 기분이 들 때는 언제나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

    그가 따라붙은 곳은 천이재가 속한 표행이었다.

    산본의가에서 아진을 제외하고는 무위가 가장 강한 사람.

    그런 천이재였으니 그곳은 믿고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았을 몰랐다.

    그러나 천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노리는 자들이라면 얼마나 강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 발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표행에는 혈천방과 비룡채의 무리도 끼어 있었다.

    표국에 일거리가 몰리면서 그들도 일손을 거들겠다며 다시 수련을 해 오고 있었고 아진이 직접 그들을 도왔다.

    무관의 문하생들보다는 자기들이 낫지 않겠냐는 자부심이 대단했고 어느 정도는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수련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아진의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들은 빠르게 숙련됐고 덕분에 표두 역할은 넉넉하게 해내고 있었다.

    ‘괜한 노파심이었나?’

    산본을 떠나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보며 아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믿어. 믿어도 돼. 너는 너무 비관적이야. 서도진.’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아진이 막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네…… 가 왜……?”

    비명과 함께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혈천방의 막도였다.

    아진은 깜짝 놀라 돌아섰고 눈을 부릅뜬 채 상대를 바라보는 막도를 발견했다.

    막도는 그러다가 고개를 숙였고 자신의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막도의 가슴팍에 검을 휘두른 자의 곁에 있던 수십 명이 옆에 있던 표사들을 공격했다.

    “무슨 일이냐! 무슨 짓을 하는 것이야!”

    선두를 지휘하던 천이재가 뒤늦게 뒤쪽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차리고 달려왔지만 표사로 위장한 놈들은 말을 마차에서 풀어 날뛰게 만들었고 삽시간에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잡아라! 놈들을 놓치지 마라!”

    천이재가 소리쳤지만 외부에서 도적이 공격해 온 것이 아니라 표사들이 내부에서 벌인 짓이라서 적아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누구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인지, 누구를 공격하다가 묻은 피인지도 확실치 않은 검을 보며 누구 하나 손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막도는 벌컥벌컥 쏟아지는 피를 보며 상처를 손으로 눌렀다.

    아진은 타고 있던 말을 두고 허공을 달려 막도에게 이르렀다.

    “모두 무기를 내려라! 순응하지 않는 자는 간자로 간주하고 즉결 처형할 것이다!”

    아진이 외치자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검을 바닥에 내렸다.

    아진의 무위를 아는 자들은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빠르게 검을 내려놓았다.

    일단 아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두 번 경고할 것도 없이 정말 그렇게 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진은 막도의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표국에 새로 들어와 표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자들은 그 모습을 희한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심장을 난도질당해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막도에게 왜 신경을 쓰는가 하는 듯했다.

    그러나 막도는 헐떡거리며 숨을 쉬다가 자기가 더 이상 그렇게 숨을 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으세요? 막도 아저씨?”

    “……네. 공자님. 괜찮네요.”

    막도는 자기도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국주님. 여기를 맡으세요. 간자들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혈천방과 비룡채 분들은 믿으셔도 됩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받으시고 다른 사람들은 검을 들지 못하게 하시고 간자를 색출하세요. 무관의 문하생들도 3기까지는 믿으십시오.”

    그렇게 빼고 나면 사실상 남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색출을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아진은 천이재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몸을 날렸다.

    다른 곳에서도 이미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떠나가는 아진을 보며 천이재는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했다.

    황금 열두 관치의 표물.

    표행에 실패했을 경우 산본표국에서 물어내야 하는 것이 황금 서른여섯 관이었다.

    황금 서른여섯 관이라는 것만 해도 상상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번에 표행에 나선 것이 모두 여섯이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었지만 표물의 가치는 모두 엇비슷했다.

    모두 내각대학사를 지낸 대인에게 보낼 선물이라 해서 그 정도가 되는 것에 수긍했던 것이다.

    현직에 있는 것도 아니고 관직에서 물러나 내려온 사람에게 그렇게 비싼 물건을 선물로 줘야 하는 건가 하며 뇌물이 상상을 초월한다고만 생각을 했지 설마하니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공자님의 표정이 이상했었는데. 공자님은 진작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계셨던 것 같은데 내가 망친 거군. 북궁세가. 그놈들이 벌인 일이구나!’

    천이재는 뒤늦게 그 생각을 하며 표사들을 재촉했다.

    “놈들을 포박하라. 한 놈도 빠짐없이 잡아라. 자결하려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 그들이 극독을 입에 물고 있지 않은지 확인하라. 우선은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자는 모두 포박을 할 것이니 이 일과 관련이 없는 자는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기 바란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일을 꾸미는 놈 중에는 붙잡힐 때 바로 죽기 위해서 이에 미리 극독을 붙여 놓고 살행을 시작하는 이들도 있었다.

    천이재의 말에 혈천방과 비룡채 출신들이 먼저 빠르게 움직였다.

    특히나 비룡채 사람들은 한동안 쉬었다뿐이지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니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상황을 처리하고 있었다.

    엉겁결에 큰일을 목격한 신입 표사들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을 뿐 천이재의 말을 들으면서 화를 내지는 않았다.

    하마터면 내부에 숨어들어온 간자에 의해 전부 죽을 수도 있었는데 간신히 화를 면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간자들은 사정이 달랐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나는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이러는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곧 밝혀질 테니까 닥치고 있어.”

    천이재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쟁자수들은 힘은 없었지만 표행을 숱하게 따라다니면서 표행의 분위기를 기민하게 느꼈다.

    쟁자수들 중 몇 사람이 비룡채 출신의 표사에게 다가가 조용히 자기들이 느낀 바를 말했다.

    표행을 나선 이후 다른 표사들이 외부를 경계하는 것과 다르게 주위의 표사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 그들을 통해 나왔다.

    덕분에 일은 쉽게 풀렸고 몇 사람이 자결하려다가 천이재에게 가로막혔다.

    “빨리 이곳의 일을 해결하고 다른 곳을 돕는다!”

    천이재는 불안한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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