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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32화 (132/470)

제132화

132화

지금은 구문제독부를 등에 업은 북궁세가가 거대해 보일지 모르지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북궁세가라고 했나? 그곳도 오래가지는 못하겠군.’

제선문주는 산본의가를 적대하는 것이 겨우 북궁세가라는 것이 아쉬웠다.

그보다 조금만 더 크고 더 견고한 세력이었다면 자기도 그 손을 잡고 산본의가를 제대로 눌러볼 생각을 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도 북궁세가에서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며 제선문주는 속으로 혀를 찼었다.

‘서도진이 애송이는 애송이인 모양이군. 황도에 갔다가 북궁마영을 만나 싸우고 나서 북궁세가가 치고 들어올 것이 겁났던 모양이지. 겁을 먹어서 나무 그림자도 맹수의 움직임처럼 보였던 거군. 그래서 나한테 지급까지 보낸 것이고.’

그리고 서서히 그 일에 대해 잊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제자가 소식을 가지고 들어왔던 것이다.

제선문주의 마음속은 복잡했다.

어떻게 할지는 이미 정해 놨으니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정작 어려울 것이 없었는데 애송이에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짜증이 치밀었다.

북궁마영과 부딪혔다고 북궁세가에서 자기를 찾아내 사람을 보낼 거라고 예상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행동을 전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접객당으로 모셔라.”

“예, 문주님.”

제자에게서는 과도한 기대감이 읽혔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갈 것이고 사람들은 제선문이 드디어 활동을 재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 몰랐다.

북궁세가에서 내민 손이 죽음으로 이끄는 손이라는 것을 아마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북궁세가에서 누구를 보낸 것인지는 문주도 궁금했다.

장로 정도를 보냈다고 해도 크게 신경을 쓴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가 접객당에 갔을 때 그곳에서 문주를 기다리던 사람은 장로 정도가 아니었다.

“북궁세가의 삼공자 하월이 문주님을 뵙습니다.”

* * *

접객당은 구색을 다 갖추고 있었다.

숨어서 몸을 엎드리라고 했지 궁색하게 살라고 한 것은 아니어서 그런 거였을까.

하월은 접객당 내부를 돌아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어 문주가 들어왔다.

문주는 세월의 풍파를 직격으로 받은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를 보자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고생 많으셨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하월은 예의를 갖추었다.

하월은 자기가 누구인지 말했다.

이곳에 찾아온 이유도 알려주었고 앞으로 북궁세가가 돕겠다는 뜻도 밝혔다.

하월은 자기가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상대가 어떤 반응을 할지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북궁세가에서 손을 내밀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문제독인 형님의 명성이 자자하고 세가의 이름 역시 높아서 언제나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이렇게 누추한 곳에 찾아와 주셔서 영광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주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찾아오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하월이 말을 하게 놔두다가 문주가 꺼낸 말이었다.

“그거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월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할 사람인가 하면서 준비해 온 말을 했다.

북궁세가라는 이름만 흘려도 알아듣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런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 북궁세가에서는…….”

하월은 문주의 얼굴이 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한 말을 이해하기는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제선문도 과거의 영화를 되찾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가에서는 이번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고 제선문과 손을 잡고 싶습니다. 제선문에서는 고급 인력을 갖고 계시니 그것을 제공해 주시지요. 나머지는 모두 본가에서 할 것입니다.”

“그렇군요.”

문주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 모른다는 것인가 해서 하월은 당황했다.

당황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표정 관리를 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런 경험들이 모두 하월에게는 새로웠다.

승리하고 축하받는 일에만 익숙해져서 그런 상황에서의 반응은 이골이 나도록 보았지만 이럴 때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건지 경험해 본 기억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

하월은 혹시 자기가 실수를 한 게 있나 해서 자기가 한 말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그런 건 없었다.

그는 문주가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제선문이 북궁세가와 손을 잡았을 때의 이점에 대해 말을 해 주었다.

“제선문은 주요 도시마다 지부를 내게 될 것이고 거기에 의원들을 파견만 하면 됩니다. 의생이나 의녀들은 각 지역에서 뽑으면 될 겁니다. 의원도 꼭 제선문의 사람일 필요는 없을 거고 제선문의 동일성과 상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면 됩니다.”

“예.”

“……의원을 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경비를 당분간 본가에서 전부 부담할 것입니다. 제선문은 그저 거기에 편승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결국 하월은 문주에게 되물어야 했다.

“혹시 제가 하는 말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면 미흡하다고 생각하거나. 문주님의 생각을 들어 봤으면 합니다.”

“공자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제선문은 이제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선문은 지금 그럭저럭 옛 명성을 되찾았습니다. 옛 명성과는 다른 명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명은 벗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제선문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전처럼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오래 인내했습니다.”

하월은 멍한 시선으로 문주를 바라보았다.

패배감 때문인가?

너무 세게 얻어맞고 쓰러져서 다시 일어설 힘을 잃어버린 것인가?

그는 문주를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선문은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자격이 있습니다. 저희가 그렇게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문주님. 실패를 경험했다는 것이 치욕은 아닙니다. 그리고 문주님께는 문주님만 바라보는 수많은 문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문주님은 그들의 삶에 책임을 지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월은 자기가 할 필요가 없는 말까지 했다.

오히려 그것이 그를 조급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지만 하월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문주는 다시 빙긋 웃었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공자님. 그러는 편이 나을 겁니다. 나는 공자님의 말에 응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제 와서 뭘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나는 신비방파라는 지금의 이름도 그렇게 싫지 않군요.”

“……문주님께 매년 황금 다섯 관씩을 드리겠습니다. 제선문의 다른 활동과 별개로 말입니다.”

“5년만 일찍 그런 제안을 받았다면 좋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는 조용한 가운데 의술도 많이 깨쳤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즐거움과 사명도 발견했습니다. 나는 내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문주님의 그런 아집이 문도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문주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뜻이 다른 아이들은 파문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월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하월이 문주의 곁에 서 있던 제자와 눈이 마주쳤다.

문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자들을 준동해서 제선문의 이름으로 의방을 여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려는 일이 공자님이 의도했던 일이 맞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래도 꼭 그렇게 해야겠다면 나는 막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미 많은 과오를 저질렀고 여기에서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이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겠지요.”

하월은 문주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산본의가에 산본신의가 있어서 결집이 되는 것처럼 제선문에는 제선문주가 있어야 했다.

초고수 한 사람이 문파나 무가의 이름과 거의 동일시되며 전력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제선문의 문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월은 초조한 낯빛을 감추며 그곳에서 문주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문주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다는 말을 분명히 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릴까요? 공자님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

하월은 문주를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때로는 그냥 피하는 것이 이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내가 그때로 돌아갔다면 그랬을 겁니다. 산본지부를 내서 산본의가에 싸움을 걸지 않고 그냥 내 길을 갔다면 지금쯤 제선문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겠지요. 북궁세가에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입.”

하월이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말했다.

“다무시오!”

문주는 그런 하월을 보고 다시 웃음을 지었다.

“이야기는 즐거웠습니다. 좋은 제안도 고마웠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국화 뿌리를 달여서 만든 차를 아침저녁으로 마시면 몸에 좋을 겁니다. 지금은 큰 병이 아니지만 공자님의 성격과 결합해서 자칫 큰 병이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문주는 그대로 일어섰다.

하월은 그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애꿎은 부채만 흔들어댔다.

“공자님. 어찌하시겠습니까. 명령만 내리신다면 저자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함께 있던 호위가 말했다.

그 자리에는 아직 문주의 제자가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태도였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하월은 그 한마디를 한 후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거의 이 각이 지나고서야 그곳을 떠나 산에서 내려갔다.

그는 몇 번이나 산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일이 이상한 곳에서 꼬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른 것보다도, 하월이 막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보인 반응이 이상했다.

마땅히 놀라고 마땅히 계산하고 머리를 굴려야 할 시점에 문주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이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러는 게 말이나 된다는 건가 하면서 하월은 고개를 저었다.

“문주의 머리가 필요하시면.”

“닥쳐라. 서도진은 이미 내가 문주를 만나러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이럴 때 문주가 죽는다면 본가만 난처해진다.”

“그러면 어찌…….”

“문주의 제자를 만나봐라. 제선문에는 아직 인재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을 빼내서 새로운 의문을 만들 수 있을지 알아봐. 본가가 지원한다면 그들은 곧 산본의가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예. 공자님.”

호위는 빛살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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