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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29화 (129/470)
  • 제129화

    129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구나. 그래서 내가 신의를 늘 존경하지. 나는 자주 그를 두려워한단다. 무림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다만 신의는 두렵다. 신의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렇지. 그를 적으로 돌리고 그의 약점을 찾는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는데 아무것도 없더구나.”

    가족이라면 그의 약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서종욱의 가족은 그를 잘 알고 서로를 깊이 이해해서 서로의 약점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진, 도종, 린린이 아직 어렸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뜻을 이루는데 완전한 조력자가 되어 있었다.

    사리사욕을 위해 그렇게 큰 욕심을 부리는 거였다면 이렇게 마음 깊이 응원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서종욱은 감히 개인과 한 가문으로는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을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어나가고 있었다.

    의학당을 통해 수많은 의원을 훌륭하게 배출해 낸 것은 그 일환이었고 그 후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원을 자신만큼 실력 있는 의원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신의가 살릴 수 있는 사람의 수.

    그게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노력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아진이 앞으로 펼쳐질 싸움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해 줄 일은 없느냐. 아진아.”

    “예. 스승님. 그저 지금처럼 그렇게 계속 지켜봐 주시면 족합니다.”

    “그렇구나. 그거라면 어렵지 않지.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을 해 주려무나.”

    “일을 쉽게 하려면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도 얻는 게 있을 것이니 그래서 더 기대가 됩니다. 스승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소청이 달려왔다.

    “사조니이임.”

    소청은 북리의천을 먼저 발견하고 달려왔다가 거의 눈앞에서야 아진을 발견한 것 같았다.

    소청은 스승님도 여기 계셨네? 하면서 놀란 것 같았고 아진은 그 모습을 보고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소청아. 너 지금. 나는 못 본 거지?”

    “……네?”

    소청은 차마 거짓말은 하지 못했고 눈동자가 허공에서 방황했다.

    북리의천이 웃으며 그런 소청에게 다가가 소청을 꼭 안아주었다.

    “그래도 된다. 소청아. 사조가 앞에 있는데 당연히 스승님은 보이지 않아야지. 아주 잘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스승과 제자 모두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게 미안했는데 그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고 잘 지내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정말 기쁩니다. 스승님.”

    아진은 그 마음을 축약해 그렇게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다른 일들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우선은 산본의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쓰도록 하여라. 아진아.”

    “예, 스승님.”

    북리의천은 소청을 내려놓고 아진에게 몸을 기울였다.

    “소청이 사용하던 마공은 이제 내가 바꿔 놓았다. 마기 대신 정순한 내공을 사용해서 펼칠 수 있는 무공으로 바꿨고 간혹 처음에 익힌 것이 나오기도 하는 것 같은데 소청이 내 사손이라는 것을 아는 한 아무도 소청에게 그 문제를 가지고 트집을 잡지 못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내 사손을 위해서 한 일인데 왜 네가 고마워한다는 말이냐.”

    북리의천이 말하고 웃음을 지었다.

    소청이 북리의천의 사손인 한 아무도 소청에게 그 문제로 트집을 잡지 못할 거라는 말은 큰 의미가 있었다.

    만약 소청이 아진이나 북리의천을 만나지 못하고 제 아버지가 남긴 무공을 익혔다면 힘들게 익힌 그 무공으로 인해 소청은 목숨을 위협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억울하게 무림공적이라고 몰린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다. 멸문당하고 숨어 사는 무인들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고 싶구나. 소청이 아니었다면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없었을 텐데 그동안 우리가 깊은 생각 없이 저질러 온 잘못이 많았던 듯하다. 정파와 천마신교는 서로 무공에 영향을 미쳤을 것인데 말이다.”

    “예. 스승님. 정의맹의 아래에서는 다수의 힘에 핍박당하고, 설 자리를 잃는 이들이 없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 그러마. 대신 언젠가는 네가 돌아와 내 후계가 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라.”

    “…….”

    후계.

    북리의천의 후계는 자신이 될 거라는 것은 당연했는데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자리를 탐냈지만 아진만이 홀로 그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아진을 위해 최고가 되겠다고 말했던 북리의천은 어느새 그 말을 이루어 냈던 것이다.

    “사도련주를 찾는 일은 정의맹에서 기필코 해낼 것이니 너는 너의 일에 정진하도록 해라. 네가 그리우면 소청이를 보면서 그리움을 달래마.”

    북리의천은 이제 아진을 놔줘야 한다고 생각한 듯 말했고 아진도 그에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아진의 앞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북궁마영과 묘하게 얼굴이 닮은 사람이었는데 나이는 그보다 조금 젊어 보였다.

    무사보다는 학사의 분위기를 풍기며 나뭇잎처럼 생긴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한눈에 봐도 기분이 나빠졌다.

    사람을 조롱하는 웃음이 아니었는데도 북궁마영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드디어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서 소협.”

    “누구십니까.”

    “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북궁세가의 삼공자입니다.”

    “구문제독의…….”

    “동생입니다. 가문의 문제아인 마영 형님의 동생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딱 그 순서이지요. 그나마 제가 나오고 끝났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다음에는 다시 마영 형님과 같은 망나니가 나올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아버님께서 선견지명을 가지셨던 것 같습니다.”

    “선견지명을 가지셨다면 하나만 낳으시는 것이 좋았을 텐데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그랬으면 저는 태어나지도 못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구문제독을 낳은 것도 잘한 거라고 할 수 없으니 처음부터 아무도 낳지 않는 게 좋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자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웃었다.

    북궁세가의 종자를 본 것만으로도 아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을 보는 게 상당히 재미있는 듯했다.

    “하월이라 합니다. 제 친구들은 저를 그렇게 부르지요. 서 소협도 그렇게 불러주면 좋겠군요.”

    “나는 공자의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북궁세가에서 본가에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도 않을 텐데 이런 얼굴을 하고 나타나다니 참 뻔뻔스럽군요. 하객으로 왔으면 그냥 눈도장이나 찍고 인사나 몇 마디 형식적으로 나누고 지나가면 될 일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오래간만에 싸움이 될 상대를 만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데 말입니다.”

    하월은 그렇게 말하고 아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본가가 준비한 선물은 사실 따로 있답니다. 본가가 준비한 게 아니고 제가 준비한 거지만 말입니다.”

    “선물이야 부모님과 형님이 받으실 것이니 그분들께 말씀하시면 될 일입니다.”

    “안 됩니다. 그러면 화를 내실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저는 착한 사람들이 화내는 걸 보면 무섭더군요.”

    기이하게 신경을 긁는 얼굴을 보면서 아진은 이런 싸움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무림에 완전히 적응돼 버려서 무인이 아닌 사람하고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도 잊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짐작하시겠지만 본가에서는 많은 사업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구문제독부가 워낙 많은 일을 관장하고 있다 보니 돈 들어갈 일이 많고 그 돈의 출처를 일일이 밝히기 어려울 때가 많죠. 그 때문에 본가는 많은 특혜를 받은 채 사업을 일구어 나가고 있습니다.”

    “전장 사업에 대해서 말을 하려는 모양이군요.”

    그런 말을 제 입으로 뻔뻔하게 잘도 한다고 생각하며 말하자 그가 웃었다.

    “전장 사업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우선 지금 당장은 본가의 전장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본가가 작정하고 나면 산본의가는 아주 사소한 일도 하지 못하고 손이 묶일 겁니다. 손이 묶이기만 할지 잘려나가기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진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대신 북궁세가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하늘이 내린 재주로 치료를 하려 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약재가 필요했다.

    ‘약재를 매점매석해서 공급을 못 하게 하려는 건가?’

    그러나 그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산본의가에 약초를 공급하는 곳은 수도 없이 많았던 것이다.

    비룡채만 하더라도 북궁세가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냉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새로 시작하신 사업들이 많아서 그것들이 타격을 입을 수도 있겠군.’

    떠오르는 생각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꼼짝없이 당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자 하월이 웃었다.

    “겁을 줬는데 눈앞에 뭐가 나타난 건지 몰라서 겁을 먹지도 않는 것 같군요. 이렇게 재미가 없어서야.”

    그때 린린이 나타났다.

    “제 오라버니가 원래 재미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시려거든 저하고 하지 그러십니까.”

    여간해서는 치장을 하는 일도 없고 늘 땀으로 얼룩진 무복을 입고 돌아다니더니 그래도 그날은 도종의 혼례라고 아주 힘을 주고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것 같다는 말을 여러 번 듣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하월은 린린에게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린린은 반대였다.

    하월 공자에게 아주 관심이 많다는 듯 실실 웃어 가면서 말을 걸었던 것이다.

    “나는 서 소협과 지금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이야기를 끝내고 싶습니다.”

    하월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하자 린린이 웃었다.

    “이거 왜 이러시나요? 그건 공정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북궁세가에는 하늘이 내린 무재와 하늘이 내린 망나니, 그리고 하늘이 내린 머리가 있다지요. 하늘이 그 집안에만 뭘 그렇게 자꾸 내리신 건지 모르겠지만 공자가 북궁세가의 자랑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 본가에 와서 대화 상대를 고르신다면 수준이 맞는 사람으로 고르셔야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진을 놀리고 깎아내리는 말이었지만 아진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그는 하월과의 대화가 지루해져 가던 참이었기에 적당한 시점에 린린이 나타나 준 게 고마웠고, 잘하면 이 껌딱지 같은 인간을 떼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린린을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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