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128화
“응? 모르고 있었냐? 어머니가 그사이에 무관도 내셨어. 나 진짜 어머니 때문에 죽겠다. 하긴.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셨으면 산본의가를 운영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르지만.”
도종이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어대며 말했다.
“그게 다 너랑 린린이 때문인 건 알고 있냐?”
도종은 장난스럽게 아진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린데. 형님?”
아진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너희가 북궁세가를 건드렸다던데? 그리고 북궁세가를 건드리고 정상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는 표국이나 상단은 없다는 것 같았고.”
“설마…… 본가가 그것 때문에 피해를 봤어. 형님?”
“응. 표국을 운영하려면 돈이 묶이잖아. 돈이 묶여 있는 동안은 전장에서 돈을 빌릴 수밖에 없고. 특히나 본가는 자금에 여유가 있는 상태로 시작을 한 게 아니라서 돈이 더 많이 필요하고.”
“북궁세가가 운영하는 전장 말고 다른 곳에서 빌리면 되잖아.”
“말은 쉽지. 그런데 북궁세가의 입김이 워낙 세야 말이지. 이미 다른 전장들에 말을 해놨나 보더라고.”
“그러면 돈을 못 빌렸어?”
“힘들었지. 기존에 빌리던 곳에서 못 빌리고 다른 업자들한테 돈을 빌렸는데 거기는 이자가 많이 셌어.”
“북궁세가가 그랬단 말이지? 자기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그렇게 나와?”
“그것만 좀 해결이 돼도 숨통이 좀 트일 것 같기는 해. 그리고 이번에 북리세가 무인들이 돌아가면서 무리해서 돈을 해 주셨잖아. 그것 때문에 당분간 재정 상황이 안 좋기는 할 거야.”
“지금은 어떻게 버티는 중이야?”
“이자가 비싸도 우리한테 돈을 빌려주는 곳에서 빌려서 쓰고 있지. 그런데 그건 우리가 해서 드리기는 해야 했잖아. 우리가 힘들더라도. 다들 감격하면서 가시는데 나도 가슴이 벅차더라. 웅장한 느낌이었어. 앞이 막막할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와서 도와주신 분들이잖아.”
“그렇지. 정말 잘하신 거야.”
아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가문의 사업들을 어떻게 해 나갈지 궁리했다.
“표국은 어때?”
“그럭저럭 잘 되는 편이야. 무관도 그렇고. 의학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하나 따져보면 잘 돼. 일을 워낙 크게 벌여놔서 그렇지.”
말을 해 놓고 자기도 웃겼는지 도종이 웃어 버렸다.
“일단은 벽 소저한테 가봐야겠네. 다음 달 중에 길일을 잡아달라고 하고 형님은 다음 달에 혼례를 올리는 거야. 내가 소은 누님이었으면 형님 같은 사람은 당장 버렸을 거야.”
“내가 소은이라고 해도 그럴 것 같아. 정말 고마운 사람이지. 나한테 과분한 사람이고.”
“그래. 그러니까 잘 해.”
아진은 말을 마치고 벽예월을 찾아 나섰다.
그녀를 찾기도 쉽지가 않았다.
금방 저기에 있다고 해서 가 보면 그사이에 사라지고 다른 곳에 있다고 해서 가 보면 또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를 찾은 곳은 무관 앞이었다.
“벽 소저.”
“공자님!”
벽예월은 아진을 보고 반가워하며 달려오다가 치맛자락을 밟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고 아진은 순식간에 보법을 밟아 그녀에게 다가가 벽예월을 안았다.
“와아……!”
벽예월은 정말 넘어질 뻔했는지 놀란 얼굴로 웃었다.
“조심하세요.”
“네. 그러게요. 요즘에 자꾸 덤벙대는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오셨다는 얘기 듣고 빨리 뵙고 싶어서 더 서둘렀어요. 일이 끝이 없네요.”
“벽 소저가 많이 바빴다고 들었어요.”
“네. 요즘에는 할 일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 할 일이 많아져서 좋아요. 이제야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 같아서요.”
사람이 얼마나 밝아졌는지는 그 얼굴과 활달해진 목소리를 통해서도 전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면사를 쓰지 않고 있네요?”
“네. 어차피 이제 사람들도 제 얼굴을 많이 보기도 했고 점점 질려가는 모양이에요. 면사를 쓰면 답답하다고 좀 치우래요.”
산본의가 사람들이 아니면 그런 소리를 하지도 못할 텐데 정말 엄청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어요? 혹시 하실 얘기가 있어요?”
“네? 아. 네. 길일 좀 잡아 달라고요. 형님이 소은 누님에게 아직 청혼을 안 한 것 같아서요. 집안에 자꾸 일이 생기다 보니까 본인들 혼례를 올리겠다는 말을 하기가 그랬던가 봐요.”
“아아. 그럴 수도 있겠어요. 오늘 바로는 안 되고 내일까지는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시작된 일이었다.
* * *
도종과 북리소은의 혼례 날짜가 잡히고 산본의가에는 일찍부터 흥분감이 감돌았다.
산본의 관습에 따라 혼례는 남자와 여자의 집에서 한 번씩 치르고 다시 산본에 와서 살게 됐는데 북리소은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 드디어 이루어지게 돼서 행복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진은 북리소은이 처음 그곳으로 온 것을 생각하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서도종과 북리소은의 혼례.
그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지는 않았지만 의학당 출신의 의원들을 꾸준히 배출해서 전국적으로 뻗어 나간 산본의가와, 바야흐로 정파 무림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정의맹의 수장인 북리의천의 가문이 결합한 것이다.
그 두 가문이야 이전부터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지만 이제는 혼인으로 인해 훨씬 더 강해졌고 사람들은 두 가문의 뒤에 각각 북리세가와 산본의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두 사람의 혼례를 축하하며 황제가 선물을 보내왔다.
황금 스무 관과 비단 쉰 필, 거기에 영초까지 있었는데 그것을 금의위사들이 호위해서 산본의가로 가져온 것이다.
황제가 보낸 선물은 그 의미가 컸다.
황제가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그리고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자들은 황제를 상대해야 할 거라는 의미가 어느 정도는 내포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황제까지 선물을 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 소문이 들릴 때까지 간을 보던 이들이 냉큼 혼인을 축하하러 왔다.
축하연은 사흘 동안 열렸는데 그 기간에도 사람이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한 사람의 유명인만 있어도 눈도장을 찍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들 수밖에 없을 텐데 그곳에는 무림의 영웅들과 신의라 칭송되는 자들이 수도 없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스승님. 드디어 소은 누님이 형수님이 되었습니다.”
아진은 일찍부터 북리의천을 찾아가 그의 옆자리에 머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구나. 도종이 내 조카사위라니. 산본의가의 두 공자 중 하나는 조카사위고 하나는 제자구나.”
아진은 스승의 곁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늘 미안하게 여겼기에 혼례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내내 그의 곁에 머물렀다.
산본성주와 의개성주 뿐만 아니라 인근의 성주들은 전부 다 참석했고 거리가 먼 곳에서도 여러 성주가 두 사람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왔으며, 구파 일방의 수장과 명문 무가의 세가주들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자리를 찾았다.
이미 정의맹으로 옮긴 사람들은 당연했지만 무림맹에 남아 대립축을 세운 이들도 이런 일에는 자기들이 빠지면 안 되는 것 아니면서 찾아왔다.
그들의 방문이 딱히 고맙거나 반가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쫓을 수 있는 명분은 없었기에 소 닭 보듯 어색하게 맞아들이고 있었다.
불청객은 그들만이 아니었고 황성의 유명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는데 그중에는 북궁세가의 세가주와 가문의 요인들까지 끼어 있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신랑 신부의 새 출발을 축하해 줘야 할 자리가 어쩌다가…….”
아진이 말하자 북리의천이 웃었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찾아오면 혼주인 서종욱이 당황하지는 않을까 하며 조금 걱정이 되었었다.
그래서 곁에서 보고 있다가 서종욱이 불편해하면 가서 도와주려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산본의가의 가주 자리를 저절로 얻은 것이 아닌 듯, 처신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알 수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누추한 곳에 찾아와 주셔서 얼마나 감사하고 큰 영광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의를 지키지만 자신을 아주 낮추지도 않으며 당당하게 손님들을 맞는 서종욱을 보며 북리의천은 자부심을 느꼈다.
자기가 사람 하나는 잘 봤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자기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제자도 제 발로 찾아온 것이고 그 제자가 찾아온 것이 소은 때문이라 그들 인연의 일등공신은 소은이 되는 듯했다.
북리의천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스승님. 사고님과는 계속 혼인을 하지 않은 채 곁에서만 머무실 생각이신지요?”
자기 자신도 이미 나이가 찼고, 그러면서도 여자가 없었기에 스승의 애정사에 관여할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심한 스승 때문에 사고가 외롭지는 않을까 해서 한 번 물어본 거였다.
“그게 소영의 뜻이다. 소영은 이렇게라도 자기가 독고세가에 소속되어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구나. 나는 이미 여러 번 소영에게 내 아내가 돼 달라고 말했는데 소영이 나에게 부탁을 했다. 지금의 상태가 싫은 게 아니라면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면 안 되겠냐고 말이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독고소영이 부탁해서 그렇게 된 거라면 아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가문을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독고소영도 그렇고, 사랑하는 연인의 부탁을 아무런 조건 없이 들어 주기로 한 스승도 대단했다.
혼인과 함께 아이도 갖지 않기로 포기한 건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아진이라고 해도 그것까지 묻기는 어려웠다.
“그래. 이제 앞으로는 어쩔 셈이냐. 아진아.”
몰려드는 하객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으면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북리의천은 아진에게 말을 걸었다.
아진도 그가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음을 아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계속 스승의 곁에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본가의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어머님과 아버님의 뜻이 워낙 커서 그 일을 지원하려면 앞으로 힘을 좀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진의 말에 북리의천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진아. 산본의가에 내가 모르는 일이 있다는 말이냐. 그렇지 않아도 산본의가에 머물던 본가의 무인들이 대거 돌아와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만.”
“아닙니다. 스승님.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물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있겠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지요. 이곳에 계셨던 분들은 오랜 시간 동안 충성을 다 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늘 북리세가를 향했고 그리웠을 것입니다.”
북리의천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어머님과 아버님의 뜻이 워낙 커서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 드리는 게 조금 힘겹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더 즐겁습니다.”
북리의천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