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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24화 (124/470)

제124화

124화

“오라버니는 어떤 줄 아세요? 북궁마영 팔을 뽑아놓고 그냥 객잔을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돈도 안 내고요. 세상에 이런 뻔뻔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제가 잡아다가 객잔 주인 앞으로 끌어다 줬죠.”

선이남은 그 말에 웃느라고 눈물까지 흘렸다.

“아니. 정말 그건. 깜빡 잊어버린 거예요. 형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그런 계산 정말 철두철미한 거. 그런데 얘랑 어딜 같이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세 살짜리를 물가에 내놔도 저만큼 마음을 졸이지는 않을걸요?”

그러면서 아진은 선이남 아내의 배를 바라보았다.

“조카가 태어나면 벌모세수는 제가 해 드릴게요.”

그러자 선이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며 지금 그 말을 들었냐고 떠들어댔다.

“당신.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당신도 검신 대협을 알지? 이 녀석이 그분의 수제자거든.”

“네?”

그러자 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님. 지금까지 제 얘기를 안 하시고 뭘 한 거였어요?”

의방에는 그 후로도 내내 손님이 없었지만 오랜만에 떠들썩했고 네 사람의 웃음소리가 한동안 끊이질 않았다.

* * *

초췌한 얼굴의 두 남녀가 황궁 정문에서 안으로 들여보내 주기를 청하고 있었다.

아진은 전날 그곳에 찾은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피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진은 진심으로 이곳 사람의 주량은 절대 못 따라가겠다고 생각했다.

코끼리도 잠재워 버릴 수 있을 만한 술을 동이째로 내오는 선이남에게 그렇게 많이는 못 마신다고 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하고 아침까지 술독에 빠졌다가 겨우 나온 것이다.

무공으로 주정을 배출할 수는 있었지만 선이남은 그것도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해 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들과 기분 좋아서 마시는데 그걸 그런 식으로 배출해 버리면 섭섭하다는 말에 아진과 린린은 꼼짝없이 술에 취해 갔다.

소중한 동생들이 왔다가 특별히 주루에서 좋은 술을 사 온 선이남의 정성이 고마워서 기꺼이 취하도록 마시고 아진과 린린은 품에 있던 철전까지 탈탈 털어서 침통 아래에 숨겨두고 나왔다.

그래도 황제 앞에서 술 냄새를 풍길 수는 없다며 뒤늦게 주정을 배출했지만 초췌한 얼굴까지는 회복이 미처 다 되지 못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태감을 따라갔다.

아진은 걸음을 옮기다가 린린에게 주의 줄 말이 있어서 옆을 보았다가 자기가 아무래도 취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와. 이 녀석 얼굴이 이제는 이상하게 보이네.’

아진이 본다는 것을 알았는지 린린도 아진을 쳐다보았는데 처음 보는 얼굴처럼 보였던 것이다.

“크큭. 린린. 네 얼굴이 다르게 보여.”

“그러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정신 좀 차리고 들어가자.”

아진이 린린에게 말하고 태감에게 잠시만 있다 가면 안 되겠냐고 하자 태감도 거절하지 않았다.

아진의 상태가 오늘 영 좋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을 그도 느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 밤 객잔에서 북궁마영과 싸움이 났다는 얘기도 듣고 있어서 그는 그것이 북궁마영과의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황상을 알현하러 오면서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왔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후원에서 아진이 바람을 쐬며 린린을 보고 말했다.

이제는 린린의 얼굴이 정상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아까는 네 얼굴이 다르게 보이더라.”

“그랬어?”

린린은 웃으며 말했을 뿐 그 외에 별말이 없었다.

“이남이 형님을 여기에서 뵐 줄이야. 정말 너무 반가웠어. 형님도 어느새 혼인하시고. 와…… 그 아기도 귀엽겠지?”

“원래 아기들을 예뻐했어. 오라버니는?”

“응? 아니? 전혀 아닌데. 그러고 보니까 안 그랬는데 성격이 바뀌었나 봐.”

아진이 말하다가 도종을 떠올렸다.

“도종 형님의 아이는 얼마나 더 예쁠까? 아기가 예쁜 건 아이 자체로 예쁜 것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이남 형님의 아이가 기대되는 건 이남 형님이 우리에게 소중한 분이라서 그렇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도종 형님의 아기는 얼마나 더 예쁠까?”

그러자 린린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혼인 안 할 거야? 오라버니의 아기는 내가 엄청나게 예뻐해 줄 수 있어. 어려서부터 추궁과혈을 해 주는 건 물론이고 내가 동서고금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 줄게. 나는 어차피 혼인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 녀석은 나한테 맡겨.”

“됐어. 인마. 나는 내 아이까지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게 할 생각 없어.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자존감이 없어서 그런 거라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습관처럼 그런 말이 나왔다.

그러자 린린이 눈이 동그래진 채 그를 보았다.

“왜? 오라버니가 어디가 어때서? 오라버니 정도만 되면 다들 줄을 설 텐데?”

아진은 그 말을 듣고 흐뭇해져서 이유를 듣고 싶어졌고 왜냐고 물었다.

“오라버니는 산본신의의 아들이고 검신 대협의 제자고 이 서이린의 오라버니잖아.”

“…….”

어째 이유가 다 외부에만 있고 자기가 잘나서 그렇다는 얘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자 아진이 린린을 노려보았다.

“나한테는 이유가 없어?”

“오라버니 같은 흠은 그냥 참고 살아야지. 우리가 너무 압도적으로 대단한 이유잖아. 정작 남편이 좀 모자라기는 하지만 뭐. 혼인해서 산다고 남편만 보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정작 중요한 건 그 집안이잖아.”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가자.”

린린의 말을 듣고 있던 태감은 어느새 자기도 웃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도록 엄격한 훈련을 받아왔던 것을 생각하자면 태감이 그랬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진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이 만두가 황제의 눈에 들면 안 되는데 이렇게 귀엽게 입을 털고 나면 황제가 린린에게 홀딱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린린. 폐하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으면 그 말은 해도 그것도 두 문장을 넘기지 마.

아진이 전음으로 말하자 린린은 그가 왜 그러는 건지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황제의 앞으로 안내되었다.

황제는 대신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편안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오더니 아예 처음부터 후원에 있는 정자로 데려갔다.

“지금쯤 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네. 섬서에서 좋은 차가 들어왔다네.”

그러는 황제는 린린을 향해 몇 번 시선을 주었다.

그때마다 아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린린이 아무리 예뻐도 황제의 취향이 아닐 수는 있는 것이라서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알 수가 없어 더 긴장됐다.

만약 황제가 린린을 마음에 들어 하고 수작을 부린다면 이 자리에서 그를 위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아진이었다.

“그래. 어제 객잔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정자로 올라가자 수많은 궁녀와 태감들이 시중을 들었고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이 눈을 즐겁게 했다.

“우선은 간단히 입가심이나 하게. 점심에는 함께 식사하도록 하지.”

황제의 스케일은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하면서 아진은 북궁마영에 대한 얘기를 간단히 해 주었다.

북궁마영 패거리가 하고 다니는 짓이 일반 서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아진은 북궁마영을 두둔해 줄 생각이 없었다.

황제는 눈짓으로 태감들을 모두 내려보냈다.

태감들은 정자에서 내려가고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황제는 그들을 조금 더 멀리 가도록 했다.

“저들은 내가 하는 말을 항상 듣지. 그리고 북궁세가와 긴밀한 관계에 있네.”

“예. 폐하.”

아진도 그럴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궁녀들을 시켜 정자의 사방에 천을 내리게 했다.

그러자 외부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모두 내려가 있거라.”

황제의 명령에 궁녀들도 내려갔지만 그를 은밀히 지키는 두 사람의 밀영만큼은 여전히 몸을 숨긴 채 정자의 지붕에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진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은 채 차를 들었다.

“북궁세가는 북궁마영을 골칫덩어리로 여기고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그래도 북궁마영이 누구에게 당하는 것은 그냥 보고 넘어가지 않는다. 북궁세가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직접 북궁마영에게 손을 쓰기는 어렵겠지. 그들은 그것을 이유로 댄다.”

“예. 폐하.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문을 유지하자고 수많은 백성이 불편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문제가 큰가. 아진.”

“예. 폐하. 보름 동안 쓸 약재가 은자 한 냥이냐, 다섯 냥이냐 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거기에서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면 다른 것을 더 사서 보신을 할 수 있고 그러면 빨리 회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본의가에서는 그런 이유로 값싼 약재를 찾는데 시간을 많이 들여왔는데 그자들은 그것을 트집 잡은 것입니다.”

황제는 아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북궁마영 패거리들이 산본의가 의학당 출신의 의원에게 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황제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진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구문제독이 북궁세가 사람인 것은 알고 있겠지.”

“예. 폐하.”

“황도에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닐 테고 네가 돌아가면 산본의가 의원은 북궁세가를 단신으로 상대해야 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느냐. 북궁세가가 아니라 북궁마영 패거리를 상대하는 것도 문제일 텐데 말이다.”

“예. 폐하.”

“그것도 알고 있으면서 그랬다는 것이냐.”

아진은 황제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일은 그냥 대충 하고 넘어가면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천당문이 은원관계를 확실히 해서 이름을 떨친 것처럼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북궁세가를 상대로 그럴 생각이라는 말이냐. 아진.”

“물론입니다. 북궁세가를 상대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저희 산본의가를 건드리는 자들에게는 모두 같은 취급을 할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던 아진은 황제가 린린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진에게는 좋은 징조로 느껴졌다.

그러다 황제가 북궁마영에 대한 얘기를 마치고 다시 린린을 바라보았다.

“서이린이라 했느냐.”

“예. 폐하.”

“황제를 기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있느냐.”

“…….”

아진은 놀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서 린린을 보고 그는 기함했다.

‘이런 미친!’

술에 취해서 린린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 것이 아니었다.

서이린은 뻔뻔하게 황제의 앞에서 역용을 펼치고 있었고 황제가 그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으으으……!’

아진은 이것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린린을 보았다.

그러나 린린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폐하. 폐하를 기망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더 변명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라버니와는 아직 상의가 끝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폐하를 계속 속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가문에서도 이 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진은 린린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인지 말을 해 보거라. 무슨 이유라고 하더라도 짐의 앞에서 함부로 역용술을 전개한 것에 대해서는 쉽게 용서받지 못할 거라는 것만 명심하라.”

“예. 폐하.”

아진은 린린이 전혀 떨지도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새삼스럽게 놀라움을 느꼈다.

도대체 얼마나 강심장이기에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제 본 모습은.”

아진은 차마 린린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저 아주 조심스럽게 황제의 얼굴만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황제가 크게 놀라는 것을 보면서 일이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 만두의 매력이 통해 버렸나 봐.’

아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린린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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