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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23화 (123/470)
  • 제123화

    123화

    산본의가의 의원 선이남은 이제 갓 가정을 꾸린 남자였다.

    산본의가에서 만난 의녀와 뜻이 맞아 혼인했고 지금은 그녀의 뱃속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산본에 내려갈 수 있으면 스승님을 뵙고 오고 싶은데. 아이도 꼭 한번 보여드리고 싶고. 아이 이름을 스승님이 지어 주시면 정말 좋지 않을까?”

    잠시 환자가 없는 틈을 타서 그가 말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스승님 이야기를 워낙 많이 해서 나도 당신 스승님을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정말 존경할만한 분인 것 같아요. 당신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산본신의님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당신이 그분께 직접 배웠다는 게 나는 자랑스러워요.”

    “나도 그래. 그곳을 떠나올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환자가 많거나 생활이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자리를 비울 수 없도록 꼭 환자가 한 둘씩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우면 다른 의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기는 하겠지만 다른 의원들의 침술이나 약을 처방하는 것이 모두 마음에 차지 않아서 선이남은 이때까지 계속 의원을 지켰다.

    “그런데 여보. 약제를 바꾸라는 건 어떻게 할 거예요?”

    선이남의 아내는 북궁마영 패거리가 다녀간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을 몰아세우며 두 사람 때문에 다른 의원과 약방이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환자를 혼자 받으려고 탐욕을 부리는 것처럼 몰아세워서 그 말을 듣는 동안 선이남은 화가 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었다.

    “이건 스승님의 가르침이야. 약제를 바꾸면 일반 사람들은 몸이 다 낫기도 전에 무리해서 약을 끊을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다가는 병이 낫지 않을 수가 있고. 대체할 수 있는 좋은 약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의원과 약방의 수입을 위해서 사람들의 몸을 상하게 할 수는 없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그런데 그 패거리들이 워낙 독종이라고 말이 많아서 그렇잖아요.”

    선이남은 북궁마영 패거리에게 돈을 내지 않았다.

    북궁마영 패거리가 처음부터 돈을 요구하지 않아서였다.

    북궁마영 패거리는 모든 상점에 돈을 요구하는 대신, 자기들에게 돈을 내는 곳은 집중적으로 편의를 봐주었다.

    사소한 시비가 붙거나 이권 다툼이 생길 때 북궁마영 패거리가 나서서 그들을 도와주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발적으로 상납금을 바치는 자들이 생겼고 그로 인해 잡음이 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일로 벌써 몇 번 불만이 접수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북궁세가에서 북궁마영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텐데 지능적으로 머리를 쓴 셈이었다.

    “우리도 돈을 내면 어떨까요? 전에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이제는 아이도 생기고 그러니까 우리끼리 버티는 건 너무 힘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겁도 나고 그래요.”

    그 말에는 선이남도 바로 냉정하게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은 그도 요즘 들어 부쩍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의방에만 붙어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내만 놔둔 채 혼자 밖에 가서 볼일을 봐야 할 때도 있었다.

    약재를 사러 갈 때도 그렇고 진료를 보러 와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선이남은 다를 때보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곧 굳었다.

    “당신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산본으로 내려가 있어. 나도 이번에 치료하던 환자까지만 치료하고 새로 오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고 산본으로 갈게.”

    그의 아내도 더 이상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이남은 아내의 배에 손을 얹었다.

    “어어? 이 녀석이 내 손을 발로 차는데? 내가 이러는 게 싫은가? 이놈아. 내가 네 아비다. 나중에 나오면 두고 보자.”

    선이남이 웃으며 배를 쓰다듬자 그의 아내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있을 때 밖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이거 말이야! 약을 어떻게 썼기에 다리가 이 지경이 되는 거야? 이렇게 만들려고 비싼 돈 주고 여기에 와서 치료받고 약을 받아 간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면서 들어온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들어왔고 붕대로 감지도 않은 채 바지를 말아 올려 상처가 다 보이게 했는데 딱지가 앉은 것을 한 번에 잡아 뜯었는지 피가 흐르기는 했어도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와서 행패를 부리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진료를 본 환자라면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아도 상처는 기억이 나기 마련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 기억은 오래가서 몇 년 후에 찾아온 사람을 보고도 처음 의방에 왔을 때 상태가 어땠는지는 기억하기도 했다.

    “손님. 저희 의방에 와서 치료를 받으신 게 맞습니까?”

    선이남은 그가 무슨 꿍꿍이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상점마다 다니면서 그곳에서 사지 않은 물건에 흠이 있었다며 새 물건으로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는 자들이 있다는 말은 선이남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일인가 하고 짐작하며 조용히 타이르려고 하는데 선이남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남자의 목소리가 단번에 높아졌다.

    “네놈이 나를 뭐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여기에서 치료를 받은 적도 없으면서 소란을 일으켜 돈이라도 뜯어먹으려고 왔다고 여기는 거냐?”

    선이남은 대거리를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이놈 봐라? 사람이 말을 하는데 지금 그게 무슨 건방진 태도지? 어?”

    남자는 선이남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선이남은 남자를 향해 돌아서며 입에 물고 있던 침통을 불었다.

    휘리릭.

    민들레 홀씨처럼 가는 것이 순간적인 힘을 받아 남자의 얼굴에 있는 요혈에 날아가 꽂혔다.

    남자는 무언가가 날아와 묵직하게 꽂힌 것을 느꼈다.

    움직이려고 했는데 손가락 하나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오기 전에 그 말도 들었으면 좋았을 뻔했소. 나는 산본의가 의학당에서 수학을 한 자요. 산본신의께서 내 스승님이시오. 신의님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의방을 차릴 때를 대비해 이것들을 주셨소.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다오.”

    선이남은 그렇게 말하고 그때부터는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약방 안의 일을 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고 의방에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너무 오래 꽂아두지는 말고 때가 되면 뽑아 줘요. 전에는 너무 오래 꽂아놔서 안면마비가 한동안 안 풀렸잖아요. 여보.”

    “아. 맞아. 그랬지.”

    부부는 다정하게 대화를 나눴고 남자는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다시 문이 열렸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선이남이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그러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 해서였다.

    “여보……?”

    그러다가 그녀는 남편의 얼굴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 이게 누구냐. 아진이가 아니냐! 린린도 같이 오다니. 이게 다 무슨 일이냐? 혹시 나를 찾아온 거야?”

    “아아. 나는 누군가 했더니 이남 형님이셨잖아요? 이남 형님인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괜히 왔네.”

    “나도. 괜히 왔네.”

    아진과 린린이 툴툴거리며 다가왔고 선이남은 아진을 그대로 꽉 끌어안으며 눈으로는 린린을 구경했다.

    “요놈 봐라? 만두같이 생겼던 게 이제 얼굴에 균형이 좀 잡혔네?”

    “어. 이 사람은 우리 침을 얼굴에 꽂고 뭐 하는 거예요? 환자는 아닌 것 같고. 오라버니가 누군지 모르고 설치다가 당했나 보네요? 침은 제가 뽑을까요?”

    린린은 단번에 상황 파악을 하고 말했고 선이남은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아내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여보. 스승님의 두 골칫거리야. 아진이와 린린이지.”

    “아이고. 형님. 골칫거리라니요. 그보다, 형수님이셨군요. 이제야 인사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서도진입니다.”

    “서이린이에요. 언니. 잘 부탁드려요.”

    린린도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올렸다.

    선이남의 아내는 자기가 들은 이야기가 전부 다 뭔가 하면서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혹시 이이가 그렇게 믿음직한 거예요?”

    “형님요? 당연하죠. 본가를 지켜 주시는 무사분들이 형님을 데려가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이 났었는데요? 아. 형님. 그거 요즘에는 안 하죠? 그거 했다가 도망쳐 온 거잖아요.”

    선이남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다가 의방에 있던 불청객을 내쫓아 버렸다.

    그때까지 눈만 뒤룩뒤룩 굴리고 있던 자는 내쫓아 주는 것에 감격하며 몇 번이나 굽신거리고 도망쳤다.

    그가 나가자 선이남이 자랑스럽게 얘기를 시작했다.

    “그것도 다 아진이 꾐에 넘어가서 그런 거였어. 나라면 만천화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잖아? 나는 그게 당가 직계만 할 수 있는 거라는 걸 모르고 해 본 건데 되잖아? 그래서 당가에서 당장 추살조를 보낸다고 난리가 났었어. 자기들의 비급을 훔쳐갔다고 말이야.”

    “맞아요. 형님이 한 건 겨우 만천화우에 비할 게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아진도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지금도 무공 수련은 계속하고 계시죠. 형님?”

    “가르쳐 준 건 하고 있어.”

    “지금은 어느 정도예요?”

    “뭐. 그냥.”

    선이남은 말을 하더니 두 손을 천천히 뻗어 주위에 있는 것들을 허공으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그것을 내던지지는 못하고 다시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아진은 선이남이 얼마나 그것을 편안하게 해내고 있는지 알았다.

    의원이 되겠다고 찾아온 의생이 대단한 무재를 갖고 있었고, 아진이 아버지를 졸라 그에게는 특별히 무공을 같이 가르쳤다.

    천이재를 비롯해 북리세가의 무인들은 선이남을 일찍부터 탐내며 무인으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그는 끝내 그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

    일단 검을 잡게 되면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면서 의방의 물건들을 암기처럼 사용해 날리는 것만을 연습했는데 우연히 그 모습을 본 북리의천이 영약을 구해다 주며 기왕 하는 것 제대로 해 보라고 해서 이갑자의 내공으로 그것만 수련을 한 사람이었다.

    만천화우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결코 선이남이 자만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저 객관적으로 그 말이 사실이라서 그러는 것뿐이었다.

    “린린. 병이 나았다는 얘기 들었다. 당장 찾아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미안하다. 이리 와 봐라. 이 오라비가 좀 안아보자.”

    “안은 거로 해요.”

    린린은 그곳에서도 귀찮아했고 선이남의 아내는 그런 모습들을 전부 재미있어했다.

    자신의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해 왔는데 처음 보는 모습들을 여러 번 보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저녁은 아직이죠? 같이 먹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선이남의 아내가 서두르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못 먹습니다. 이 자식이…… 아오!”

    아진은 린린을 한 번 노려보더니 선이남 앞에서 린린의 흉을 보기 시작했고 선이남은 그 말을 들으면서 박장대소를 해댔다.

    천하의 북궁마영 패거리를 때려눕히고 과파육을 하나 더 시켜서 먹고 있더라는 말을 듣고 있자니 왠지 린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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