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121화
“그래도 네가 일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사용하거라. 다만 너로 인해서 내가 상당히 난처해질 수도 있다는 것만 알아두어라.”
‘그렇게 말을 하면 미안해서 못 쓸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상관없는데.’
아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 황제가 웃었다.
“부패한 관료들을 처단하는 것도 좋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 한다. 그런 자들은 이미 태감들과 연이 닿아 있다. 그런 시도를 하려고 한 사람들이 지금껏 한 둘이 아니었지만 대개는 실패한 체 그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너를 오래 보고 싶구나.”
“지금은…… 부패한 관료보다는 사도련주를 잡아서 그 일을 멈추게 하는 것에 주력을 다 하려고 합니다. 폐하.”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라. 일단 이 일을 해내는 것을 보면 너의 역량을 알아볼 수 있겠지. 그런데 이것은 주의하거라.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위로 올라가면 악한 자의 눈에도 띄게 마련이다. 너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적에게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황제는 일이 재미있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아진의 편도 아니고 완전히 아진에게 물을 먹이려는 것도 아니었다.
이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진에게 무구를 건네주고 사자와 싸워 보라며 경기장에 들여보내는 사람.
아진에게 황제는 딱 그렇게 보였다.
“네가 말한 것은 준비해 두도록 하겠다. 내일 다시 오너라. 그것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제의 말에 아진은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황제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황도에는 네 동생과 함께 왔다고 들었다. 내일은 네 동생과 함께 오도록 해라.”
“…….”
아진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새로 들인 후궁의 나이가 린린의 나이보다 많지 않았다.
황제는 무치라 했고 색욕을 밝히는 것이 황제에게는 흠이 되지 않았다.
황제는 역대급으로 많은 후궁을 들였고 누가 자신의 후궁인지 기억도 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는 한 번 눈에 들어온 사람은 가져야만 했고 그것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아진은 그 자리에서 확실히 말을 할까 했지만 자칫하다가 황제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꼴이 될까 해서 우선 다음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린린을 보고서도 후궁으로 들이겠다는 말을 한다면 그때는 아진도 그냥 좋게좋게 하겠다는 계획에 전면적으로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 * *
황도의 객잔은 하룻밤 묵는데 들어가는 돈도 비쌌다.
하루 이틀 더 묵는 것은 상관없지만 만약 황제가 더 붙잡는다면 그때부터는 돈이 궁해질 수도 있었다.
전장에 가서 돈을 빌려야 하나 생각을 하며 아진은 객잔으로 돌아갔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객잔에서 환자를 진찰해 줄 수는 있겠지만 사도련주의 문제가 급해서 우선은 다른 문제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객잔에 가자 사람들이 떠들썩했다.
‘설마 린린은 아니겠지?’
왜 좋지 않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사람들 틈을 해치고 들어가자 린린이 탁자 앞에 앉아 혼자 여유만만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른 탁자들이 나뒹굴고 있고 탁자와 함께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돼 있는데 혼자만 그렇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이상했다.
“여기 과파육 하나 더 가져다주세요. 숙수가 요리 솜씨가 아주 좋군요.”
린린이 태연하게 하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느 사문의 아가씨인지 배짱 하나는 두둑하네. 지금 자기가 어느 집안사람을 건드린 건지 알고 있는 건가?”
“처음부터 말을 했으니 모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북궁세가를 건드리다니.”
북궁세가?
북궁세가라면…….
동창과 함께 황궁의 최고 실세라는 구문제독부가 대부분 북궁세가 사람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는 것 같던데?
구문제독이 북궁세가의 요인이고…….
아마 세가주와 가까운 사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린린 저 녀석은 하고많은 사람 중에 어떻게 그런 사람을 콕 집어서 싸움이 붙은 건지.
아진은 할 말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요리를 주문하는 린린을 보다가 아진은 자기가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파육? 과파육이 얼마짜린데 저게!’
아진은 그때부터 북궁세가니 구문제독이니 하는 것은 다 뒷전이 되었고 린린의 식탐을 잠재우지 않으면 거지가 되겠다는 생각에 린린에게 다가갔다.
“아. 오라버니 왔어? 나한테 잔소리할 생각하지 마. 먼저 시비를 건 놈들은 저놈들이라고.”
“네가 지금 정신이 있어? 혼자 먹으면서 과파육을 시켜? 게다가 하나를 더 시켜?”
“…….”
린린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지금 과파육 가지고 화내는 거야?”
“그럼 화 안 내게 생겼냐? 여기에서 며칠을 더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돈을 지 맘대로 쓰고 있어!”
“와. 세상에. 병나았다고 이제 막 대하네. 전에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아무거나 다 말하라고 하더니.”
“말하라고 했지. 주문해서 먹으라고 했냐? 와. 진짜 웃기는 애네?”
그러는 동안 점소이가 과파육을 내왔고 아진은 소심한 목소리로 린린이 먹은 게 모두 얼마어치인지를 물었다.
“은자 여섯 냥인데요. 손님.”
“에엑? 아니. 딱 봐도 정신 이상하게 생긴 애가 시키면 돈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줬어야지 호구 잡았다고 생각한 겁니까?”
“거참. 너무하시네.”
보다 못한 린린이 말하고 아진을 노려보았다.
“오라버니가 진료 좀 해 주면 되지. 힘쓰고 나서 내가 뭘 제대로 먹기를 했느냔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소청이나 따라가는 거였는데 그랬어.”
“가지 그랬냐?”
아진은 화가 난 건 화가 난 거고 일단 자기도 배가 고파서 과파육 접시를 끌어다가 먹어대기 시작했다.
“황궁에 가서 아무것도 못 얻어먹고 왔어?”
“차는 주시더라.”
린린은 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안 궁금해서 안 묻는 건지, 알아서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안 물어봐? 무슨 일이냐고?”
“응? 아아. 맞다. 무슨 일이야?”
린린은 빨리도 묻는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어댔다.
“오라버니 없을 때는 함부로 싸우지 마. 누군지 모르잖아. 이런 곳은 힘보다는 연줄이라고. 내가 오기 전에 끌려갔으면 어쩌려고 했냐?”
“어쩌긴 뭘 어째? 내가 누군지 밝히면 되지.”
“그러면 풀려날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러기까지 내가 너를 찾아다닐 생각은 안 하냐고.”
아진이 말하며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지금쯤이면 벌써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은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노리고 그러는 건 아닌 듯하고 린린에게 너무 맞아서 그런 거라는 걸 알고 한숨을 푹 내쉬고 고쳐 주러 가려는데 린린이 아진의 팔을 잡았다.
“놔둬. 본가 욕을 했어.”
“본가? 산본의가를? 왜?”
“여기에 본가 사람이 있나 봐. 값싼 약을 처방해서 약방이랑 다른 의료원에서 불만이 많다나 봐. 저자들이 상인들한테 몰래 돈을 챙기는 모양인데 본가 의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평하니까 본가 의원을 혼내 주겠다고 하잖아?”
“값이 싸다고 효과가 떨어지는 약을 처방한 것도 아닐 텐데 지들 배 불리자고 그런 거야?”
아진은 생각지도 않은 이유를 듣고 혀를 찼다.
보통 객잔에서 일이 생겼다면 의례 여자의 얼굴을 보고 수작질을 걸다가 드잡이질이 일어나는 거였겠지만 린린은 달랐다.
얼굴이야 헉 소리 나게 예뻤지만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풍겨서 감히 입을 놀리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상관도 없는 산본의가 얘기를 꺼냈다가 갑자기 식탁이 눈앞으로 맹렬히 달려와 부딪치는 경험을 하고 그곳에 있던 자들이 난리가 났다.
황도의 일부분을 차지하면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그들은 수뇌부가 북궁세가의 방계라는 이유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북궁세가의 이름을 열심히 팔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힘으로 해 보려고 하다가 상대가 무시무시한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구문제독과 북궁세가를 들먹였는데 상대는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듯이 끝까지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맞으면서도 계집이 오지랖만 넓다고 생각했지 설마하니 그 자리에 산본의가의 직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딜 어떻게 만져놓은 건지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닥에 붙은 채 누가 도와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쓰러질 때 누군가 조용히 밖으로 나가는 것 같기는 했다.
아마 대사형이 지금쯤 기루에서 놀고 있을 테니 곧 이리로 올 거라고 생각하며 흑도 방파 설진방의 패거리들은 좀 더 누워 있기로 했다.
대사형 북궁마영이 객잔에 들어온 것은 아진과 린린이 막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기세가 흉흉했고 북궁마영의 주위에는 인상이 사나운 자들이 여럿 있었다.
황제가 있는 곳이라 황도에서 무인들이 소란을 벌이는 것은 엄격히 다스려졌지만 구문제독부나 동창을 등에 업은 흑도들 중에는 가끔 이렇게 선을 넘는 자들도 있었다.
북궁마영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기함했다.
바닥에 부하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치욕감과 함께 분노가 치솟았다.
오는 동안 대충 전해 들은 바로는 산본의가와 관계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왜 하필 그런 귀찮은 일에 휘말린 건가 했다.
“무슨 일이냐!”
북궁마영이 들어가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북궁마영이야 개차반이지만 그의 뒤에 있는 가문은 결코 그렇지 않은 탓이었다.
북궁마영은 다른 이들에게 물으면서 시선은 린린과 아진에게 가 있었다.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유유자적 식사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문제의 산본의가 패거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북궁마영이다. 내 동생들을 건드린 게 네놈이냐.”
북궁마영은 즉각 아진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해하셨소. 이 애가 그랬소.”
아진은 린린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북궁마영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북궁마영은 기가 찼다.
자기를 보았으니 겁이 나는 건 당연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행을 그렇게 쉽게 넘긴다는 건가 해서였다.
린린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제 오라버니를 노려보았다.
“황도에는 처음인 모양이구나. 내 동생들을 건드리다니. 아니면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걸 수도 있겠어. 그런 놈들에게는 확실히 매가 약이지.”
“무섭겠다.”
아진은 여전히 전혀 진지하지 않은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저자들이 먼저 본가를 욕보였소.”
린린이 말하자 북궁마영이 기가 차서 헛웃음을 치고 린린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