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118화
아진은 그 어떤 때보다도 화가 났다.
고작 저희의 욕심을 채우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의 목숨을 이렇게 허투루 여기는 놈들을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그 분노가 어찌나 컸는지 아진의 몸에서 그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살기가 흘러나갔다.
무상도는 입에서 흐르는 피를 팔로 급히 닦아내고 다시 자세를 잡으려 했지만 똑바로 서기도 쉽지 않았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무림에서 당할 자가 없는 정도다. 고작 저런 놈에게 한 방 맞았다고 이런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무상도는 저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설상가상,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이다.”
아진이 다가왔다.
“네놈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것 같던가?”
걸음이 느리게 옮겨졌다.
무상도는 아진을 보며 자기가 먼저 공격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
“…….”
“너 같은 새끼가 무서웠겠냐고.”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덮쳐들었다.
팔이 길게 이어진 것처럼 뻗은 검이 무섭게 다가왔다.
상상도 하지 못한 강기의 폭풍이 무상도의 몸을 쓸고 지나가며 옷자락이며 살갗을 날카롭게 베어냈다.
단 한 순간, 단 한 번 지나간 것이지만 그가 느끼기에는 수백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살을 저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희한한 것은 무상도의 몸에 난 상처 역시 그랬다는 것이다.
얇게 포를 뜬 것 같은 상처가 수십, 수백 번이나 반복되어 생겨나 있었다.
아진은 검을 다시 한번 세차게 휘둘렀다.
무상도는 뭐가 잘못된 건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잘못됐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대체 뭐가.
어디서 뭐가 잘못됐기에 이러는 건가 하면서 무상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이유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익숙한 초식을 펼치려고 기수식을 잡고 칼을 들어 올렸다.
그런 무상도에게 아진의 모습이 보였다.
“이상하지? 그런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
무상도는 혹시 그 답을 알 수 있을까 하면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나는 원래 이러지 않았어. 그런데 너무 화가 나서 평소보다 훨씬 빨리 움직이고 있는 거야. 훨씬 더 많이 두들겨 대고 있는 거고. 아마 그래서 그러는 게 맞을 거야.”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는 듯이 말하며 아진이 검을 들어 올렸다가 허공으로 내리쳤다.
대기가 갈라지는 것이 무상도의 눈에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의 몸이 갈라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
아진은 갈라진 무상도의 몸에서 벌레가 튀어나오는 것을 봤고 그것을 놓치지 않은 채 수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검막이 생겨났다가 벌레가 수백 조각으로 갈라진 채 바닥에 떨어졌다.
아진은 벌레를 밟아 으깨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쇠사슬이 풀린 아이를 빼고는 모두 아직 침상에 누워 있었다.
아진은 어디에서 누가 또 나타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풀어 주었다.
“괜찮지? 다친 데는 없지?”
아진이 묻자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기들은 답을 잘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배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괜찮은 것 같아요.”
청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아이가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배가 찢어지는 것 같았거든요. 안에 박쥐 같은 게 들어 있다가 밖으로 나오려고 그러는 것 같았어요. 발톱으로 막 찢으려고요. 그런데…… 이제는 안 그러지?”
아이들은 서로를 보며 말했고 다른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호응했다.
“그래. 잘했다. 잘 참았어. 나는 여기에서 몇 사람이랑 더 싸워야 할 것 같으니까 너희는 조금만 더 조심하고 있어. 알았지?”
“네. 은공님.”
아이들은 서로 모여 있었고 아진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쏟아져 들어오는 검기를 느꼈다.
그런 검기는 다발로 쏟아진다고 해도 베어내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진이 검기를 베어 내려 했을 때 이미 그 검기가 아진의 옷자락을 베고 살갗까지 찢어 버리며 파고들었다.
‘이런 속도가 가능하다고?’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그것이 마지막 공격이라고 단언할 수가 없었기에 그는 곧 자세를 바로 했다.
자기가 무너지면 뒤에 있는 아이들이 희생된다는 생각에 검을 들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확실히 전보다 강해졌어. 그 사이에 뭔가 변화가 다시 한번 일어난 모양이야.’
아진은 눈으로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 것도 어려워서 소매를 찢어 상처를 대충 싸맸다.
그렇게 해도 금방 천을 적시고 피가 흐를 것 같았지만 우선은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 했다.
잠깐 그러고 있는 틈에 연달아 공격이 들어왔고 가슴께에 깊은 상처가 났다.
“아. 이제 맞는 역할은 그만해야겠네. 애들이 보고 놀랄 것 같아서.”
아진은 중얼거리고 노도와 같은 강기를 쏟아부었다.
그렇게 잘할 거면서 그때까지는 왜 그러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진은 몇 번 맞으면서 상대의 속도를 이제 따라잡을 수 있었다.
거기에 적응되기 전까지 처음 몇 번은 맞아주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제법이다만 거기까지다.”
소월검수가 짜증스러운 소리로 말하며 아진이 있던 곳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피할 틈 없이 검강의 덩어리가 아진을 덮쳤다.
소월검수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아진의 몸에 검을 찔러넣었다.
이제 도망갈 곳은 없다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오해였다.
검이 들어간 곳에 걸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공만 가른 것을 알고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끝이다.”
검끝을 날카롭게 겨누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아진이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악!”
소월검수는 득달같이 떨어지는 검을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피할 곳이 없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아이들은 아진의 검이 소월검수의 몸을 위에서부터 가르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련주만 찾아내면 되는 건가?’
아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아진이 막 그곳을 떠나 련주를 찾아 나가려 했을 때였다.
“으…… 은고…… 은공님…….”
뒤에서 한 아이의 음성이 기괴하게 들렸다.
뒤를 돌아본 아진은 아이의 몸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작은 괴물 같은 것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아아악!”
다른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놀라며 비명을 지르더니 자기들의 복부 역시 그렇게 소리도 없이 열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은공님……!”
아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황에 놀라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포기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너희 모두. 포기만 하지 마. 고통스러워도 참아. 무서워도 참고. 그것만 해 줘.”
아이들은 덜덜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우욱-.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동안 이루어졌지만 나중에는 그런 소리가 전부 생생하게 들렸다.
모든 아이의 몸에서 그 아이들 덩치의 절반 정도 되는 괴물이 튀어나와 아진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벌레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왜 그런 거냐는 질문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우선은 살려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아진은 검을 들었다.
“너희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는데.”
아진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 왜 그러냐면 나는.”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특별하거든.”
린린이 옆에 있었다면 그게 뭐냐며 타박을 했겠지만 그곳에서는 그럴 사람이 없었다.
괴물이 배를 가르고 나간 후 아이들은 핏기를 잃고 주저앉았다.
쿠당 소리를 내며 쓰러진 아이도 여럿이었다.
‘나는 딜러였고 힐러였다. 내 딜은 힐과 다르지 않았어. 내 마나가 때로는 치료했고 때로는 공격을 했던 거고. 어느 때는 약이 독이 되고 독이 약이 되는 것처럼 그건 결국 같은 거야.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뿐이야.’
아진은 허공을 옆으로 갈랐다.
그 후에는 세로로.
그 후에는 사선으로 허공을 그었고 그사이의 빈틈을 촘촘하게 채워나갔다.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그 일이 이루어졌다.
그의 눈앞에 검막이 생겨났고 그것이 작은 괴물들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크아아아아-!!
짐승의 포효처럼 끔찍한 소리가 괴물들에게서 터져 나오고 살점과 피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러나 검막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아갔고 그 형체가 변했다.
마나의 집결.
그것이 아이들을 향해 날아가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마치 햇살이 쏟아지는 것처럼 응축된 마나가 아이들의 몸을 덮쳤다.
누군가는 눈이 부신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나 아프지 않은 것을 깨달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만 찢어진 옷에는 그대로 흔적이 남았다.
“아진아!”
북리의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련주를 놓쳤어요.”
아진이 외치자 북리의천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만약 그가 오지 않았다고 해도 아진은 련주를 포기하고 아이들의 곁에 머물렀을 것이다.
아이들은 바닥에 있는 괴물의 시신을 보면서 얼굴을 구겼다.
자기들의 몸에서 그런 것이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벌레에서 진화됐다. 빨리 막지 않으면 앞으로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아진은 괴물의 사체를 살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싸우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처음에 발견된 벌레와 비교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변화였다.
‘설마…….’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고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동안 독고소영이 먼저 나타났고 북리의천을 따라갔다.
그 후에는 린린과 소청이 왔는데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가는 대신 같이 아이들을 돌봤다.
흑주는 그곳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평소 때라면 진기를 흡수하기 위해 날뛰었을 텐데 그곳에서는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아진은 흑주가 그러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흑주에는 벌레뿐만 아니라 벌레에게 먹힌 아이의 원념도 같이 담겨있을 거라는 것을 아진은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련주를 두려워하며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린린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 흑주를 안에 감춰두었다.
아진은 아이들에게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심하게 치료해 주었다.
아이들은 모든 일이 지나간 후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막상 일이 닥칠 때는 의연한 것 같다가 일이 끝난 후에 충격을 받게 되기도 하는데 아이들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린린이 묻자 아진은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련주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린린의 말에 아진도 동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