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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16화 (116/470)

제116화

116화

성주는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아진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고 아진은 그런 식으로 인근의 성주들을 괴롭히고 다녔다.

아직 북리세가와 독고세가에서는 사람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느려서 그런 게 아니라 아진의 일행이 너무 빠르게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녀서였다.

다음날이 되자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이 먼저 도착했다.

함께 온 무인들이 내공을 회복하며 장원 하나를 빌려 쉬는 동안 두 사람은 아진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아진의 일행과 마주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아진아.”

“스승님. 사고님.”

아진은 두 사람을 본 것만으로 울컥해질 거라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나올 거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주르륵 눈물이 나와 버렸다.

독고소영은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아진을 안아 다독여 주었다.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다. 아무리 빨리 움직였어도 모두의 희생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을 거다. 네가 아니었으면 희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거야. 너는 항상 그러지. 의연한 척하고 괜찮은 척하면서 상처란 상처는 혼자 다 받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크고도 그러는구나.”

독고소영의 말에 린린과 소청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사도련에서 아이들을 데려가며 아이들의 부모를 공격했고 그들 중 몇은 치료를 받던 도중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는데 사실은 전부 다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다가 사부와 사고의 앞에서 감정이 터진 것이다.

린린과 소청은 여태 아진의 곁에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진아. 네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버려라.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고 말이다. 네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건 너만이 가진 능력인 것과 동시에 어쩌면 저주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자기가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고 해서 자책하지 않는데 너는 다르지.”

북리의천까지 그렇게 말하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들을 봤다고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리는 바람에 아진 자신도 당황하면서 이게 대체 왜 이러는 건가 했는데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나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녀석.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면 연락도 안 할 셈이냐고 혼을 내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또 이렇게 넘어가 버리는구나.”

북리의천의 말에 아진도 겨우 웃을 수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정말로요.”

“아니다. 소식도 자주 듣고 얼굴도 자주 보려고 했으면 내가 그냥 적당한 녀석을 제자로 두었어야 하는 건데 다 내 잘못이지.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북리의천이 그렇게 말을 하자 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런데 이 녀석이 내 사손이냐. 아진아.”

“예, 스승님. 소청아. 어서 인사드려라.”

소청은 말로만 듣던 북리의천을 보고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산본의가에 있으면서 북리세가 무인들에게 그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던 터라 더욱 감격이 컸다.

“사조님. 사손이 인사드립니다.”

제자도 예뻤지만 제자의 제자라고 하니 소청은 그냥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래. 우리 소청이와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우선 그 일을 먼저 해결을 하고 천천히 알아가자꾸나.”

“예, 사조님.”

소청이 공손하게 대답을 했을 때 그들을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성주가 보낸 전령이었다.

* * *

처음에는 아진이 시키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면서 치욕감을 느끼며 보고서를 작성하던 성주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럴 게 아니라 아예 반박할 수 없는 성과를 내 버리자고 생각하고 그 일에 열의를 보였다.

그냥 한 놈을 제대로 족치면 여러 명을 데려다 취조를 할 필요도 없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대단한 것을 알아냈고 아진에게 관사로 찾아와주기를 부탁했다.

“뭔가 알아낸 모양입니다. 스승님.”

“그럼 가자꾸나.”

북리의천은 이제야말로 실마리가 풀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아진을 따라나섰다.

성주는 북리의천과 독고소영까지 함께 온 것을 보고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당대 최고라 불리는 무림 명숙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은 그로서도 미처 상상하지 못한 일이어서였다.

그러나 그런 그를 아진이 재촉했고 그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설명을 시작했다.

“혈강파의 방주를 잡아 들여 강도 높게 심문을 하던 중에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이 아마 아이들을 잡아 들인 이유인 것 같습니다.”

성주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잔혹성에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동안 그렇게나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아등바등하던 일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자들이 지금 머무는 곳이 어디라고 합니까!”

“련주가 머무는 장원이 여러 곳이고 아이들이 실종된 사건 때문에 이목이 집중돼서 아예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일단 관련된 장소에 대해서는 실토를 받아두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치는 것보다는 먼저 의논을 해 보고 결정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급히 청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일단은 그 장소들을 알려 주십시오.”

“여기에 있습니다.”

성주는 미리 준비해 두고 있던 종이를 넘겼다.

거기에는 스무 곳이 조금 안 되는 장소가 적혀 있었다.

그중 채영각이라는 곳에 린린이 손가락을 짚었다.

“여기? 왜? 네가 아는 곳이야?”

아진이 묻자 린린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여기로 가 봐. 그리고 거기에 없으면 다른 곳을 찾기로 해.”

“그러면 우리는 다른 곳을 나눠서 가는 게 어떻겠느냐. 아진아.”

북리의천이 말하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린린이 왜 채영각을 지목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그곳으로만 가서 중요한 시간을 날릴 수는 없어서였다.

“너는 소청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 린린.”

“응. 오라버니.”

린린도 자기가 왜 채영각을 짚은 건지 이유를 알지는 못했기에 아진의 말을 따랐다.

일단 아진이 그곳으로 가 주기만 한다면 어차피 다른 곳은 위험하지도 않을 거고 일은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은 각자 자기들이 살펴볼 곳을 나눴고 다른 이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한 후 먼저 그곳을 떠났다.

“린린. 소청이를 잘 챙겨.”

“응. 걱정하지 마. 건드리는 놈들은 전부 다 흑주에게 밥으로 줄 거니까.”

린린이 말하고 소청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소청도 바람을 일으키며 경공을 펼쳤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곳에서 성주는 멍한 얼굴로 텅 빈 곳을 바라보았다.

생전 그런 경공은 본 적이 없었다.

성주가 아진을 보려 했을 때 그는 좀 전에 일어난 광풍이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아진이 서 있던 자리에서 먼지가 일어났다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 * *

“잘나신 분이 이런 취급을 받고 있으려니 힘들겠어? 그런데 왜 버티지? 나 같으면 그냥 포기해 버릴 것 같은데. 포기하면 편하지 않나?”

무상도는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동안 소월검수를 향해 가지고 있던 열등감을 표출하면서 그는 계속 소월검수를 자극했다.

그러나 소월검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련주가 보인 뜻은 명백했다.

이번에 소월검수는 잘못했고 무상도는 련주를 만족시켰다.

다음에는 그 반대가 되면 된다.

앞으로 다시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번의 실책은 뼈아팠지만 만회할 기회는 언제든지 온다.

소월검수는 그런 생각으로 버텼다.

“으으으…….”

한 아이가 배가 아픈 듯 웅크렸다.

쇠로 된 침상에 손과 발이 묶여 있어서 배를 안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아이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시간이 갈수록 더해 갔다.

“슬슬 신호가 오는 건가? 이제 알에서 나올 때가 되기는 했지?”

무상도는 소월검수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이런 것에서 무상도와 소월검수의 차이가 나타났다.

무상도는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는 편이었다.

소월검수가 자신의 판단을 믿는 것과는 반대였다.

소월검수는 무상도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려 주지는 않았다.

시간의 차이가 조금은 날 수 있겠지만 앞으로 반 시진 안에 벌레가 알을 깨고 나와 아이들의 몸을 먹기 시작할 터였다.

“소월검수. 자네라면 벌레를 누구에게 사용하겠나. 역시 살수에게 쓰는 게 좋을까?”

무상도는 그것에 대해서 소월검수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소월검수가 순순히 자기 생각을 말해 주지는 않을 것 같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자기 머리는 믿을 수가 없었고 혼자서 생각을 하다 보면 좋은 기회를 날릴 것만 같았다.

소월검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상도가 뭔가 제시를 한다면 모르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 방법을 알려줄 이유는 없었다.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소월검수 자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올지 몰랐다.

소월검수에게는 아직 충독이 있고 그 충독은 계속 알을 낳을 터였다.

련주가 허락하기만 하면 그도 벌레를 독자적으로 사용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될지 몰랐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약 두 시진에서 세 시진 동안 나만을 위해서 싸울 수 있는 괴물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 힘을 어디에 사용할지.

어떻게 쓸지.

살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련주와 같은 사파 천하의 꿈은 갖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방파를 키우기 위해 벌레를 사용해야 한다면 그는 정파 무림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곳을 이용할 것이다.

예를 들면 세가지연과 같은 곳.

별 것 아닌 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소용이 없다.

혈통이 좋은 자들.

그리고 기재여야 한다.

그들에게 벌레를 집어넣고 날뛰게 하고 그러다가 결국 죽게 한다면 그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게 될 것이다.

정파의 전력을 축내는 것과 동시에 그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월검수는 기분이 좋아졌다.

‘북리세가. 거기도 좋겠지. 그래. 그거야말로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우연히 하게 된 생각이었는데 소월검수의 동공이 움직임을 멈출 만큼 그는 그 순간에 그 생각에 꽂혔다.

‘재미있겠는데? 독고소영에게 벌레를 집어넣을 수 있다면. 독고소영이 벌레 때문에 날뛰면 북리의천은 어떻게 할까? 응? 그때는 아무리 북리의천이라도 독고소영을 쉽게 당하지 못할 텐데.’

소월검수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걸렸다.

“뭔가 생각난 거군. 그렇지? 응?”

무상도가 그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소월검수는 무상도를 힐끔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단순히 정파 무림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하는 거라면 아깝게 자신의 벌레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내가 이걸 말하면 너는 뭘 해 줄 거지?”

무상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말을 할 정도면 대단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뜻일 터였다.

“뭐지? 일단 말을 해 봐.”

“내가 바본가?”

소월검수가 무심하게 말하자 무상도는 애가 닳았다.

“황금 두 관을 주지. 그럴듯한 생각일 경우에 말이야. 내가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계획일 때.”

소월검수는 잘만 하면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독고소영은 쉬운 여협이 아니니 벌레를 넣는 과정에서 무상도가 다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겠다고 생각하며 소월검수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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