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115화
“늦지는 않았군.”
련주는 아이들의 혈을 짚어 눕히고 의식을 준비했다.
“각자 자기가 데려온 아이들 곁으로 가라.”
소월검수가 먼저 움직이고 흑묘화는 쭈뼛거리며 한 아이의 옆에 섰다.
무상도는 아이들의 옆에 서서 련주를 바라보았다.
“흑묘화는 하나뿐인가.”
“……죄송합니다. 련주님.”
“죄송할 게 있겠나. 먼저 시작하지. 빨리 끝나게 될 것 같으니 말이야.”
“……예?”
흑묘화가 물었지만 련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은 흑묘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가락에 강기를 덮고 흑묘화의 옆구리를 뜯어냈다.
“으윽!”
평소에는 스스로 할 수 있게 놔두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충독의 알을 찾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그의 손이 몸속을 함부로 헤집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흑묘화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듯했다.
련주는 알 두 개를 찾아내 흑묘화 앞에 보였다.
흑묘화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흑묘화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여기에 있는 두 개는.”
련주는 충독의 알을 쥔 채 손에서 그대로 터뜨려 버렸다.
“려, 련주님……!”
함께 있던 소월검수와 무상도가 경악하며 그를 불렀지만 이미 알은 철저하게 으깨져 버린 후였다.
“들어갈 몸을 찾아오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련주님…….”
무상도가 데려온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의 몸에 집어넣는다면 그 알들은 충독으로 자랄 수 있었을 것이다.
흑묘화는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다시 련주의 손이 옆구리를 파고들어 가 내장을 움켜쥐었다가 놓으며 고문에 가까운 가학적인 행동을 하자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련주는 마침내 알을 꺼냈다.
“이것은. 네가 겨우 한 아이만을 데려온 것에 대한 대가다.”
그 알마저 련주의 손에서 으깨졌다.
“뇌혈검과 마찬가지로 너도 충독을 가질 자격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됐다. 너 때문에 아까운 알을 세 개나 잃었으니 말이다.”
흑묘화는 점점 더 커지는 고통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련주의 손이 다시 한번 흑묘화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번에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충독이었다.
흑묘화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것이 충독을 뺏겨서인지 몸 안의 장기가 멋대로 헤집어져서인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무상도. 충독이 있을 곳을 마련하라.”
“예…… 련주님.”
무상도는 항아리를 준비했다.
그러자 련주가 그를 바라보았다.
“항아리만 있으면 충독이 살 수 있는가.”
“……예?”
무상도는 긴장했고 자꾸 그렇게 되묻기만 하는 것이 련주의 심기를 거스를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죄소…… 죄송합니다. 련주님.”
그러면서도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우물쭈물하고 있자 소월검수가 나섰다.
“련주님. 제가 해도 되겠는지요.”
“왜 네가 나선다는 말이냐. 소월검수. 너는 네 충독에 만족해라. 네가 데려온 아이들과 함께 말이다.”
무상도는 그제야 그게 무슨 말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흑묘화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지만 무상도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몸속을 긁어냈다.
“으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이 대기를 갈랐다.
아혈을 짚을 수도 있었겠지만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소월검수는 차라리 검기를 날려 목을 베서 충독이 있을 자리를 채워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상도는 살아 있는 흑묘화의 살을 안에서부터 발라내 항아리를 채웠다.
“여기 있습니다. 련주님.”
“그래. 잘하였다.”
련주는 흑묘화의 몸에서 나온 충독을 항아리에 넣었다.
이제는 주인을 잃은 충독이 두 개였고 충독을 이미 가진 대제도 둘이었다.
십삼대제가 있었을 때 무상도는 감히 소월검수의 적수가 되지 못했지만 지금 그는 최후의 이인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련주의 신임과 총애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벅찬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웃음을 흘렸다.
주인 없는 두 개의 충독을 전부 자기가 갖게 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아도 그중 적어도 하나는 가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도 절정의 경지에 이른 몸이 그때는 얼마나 더 강해질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몸이라고 하더라도 이형환위를 펼치던 서도진에 비해 자신의 무위가 한참이나 낮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그는 천하제일인이 자신을 위한 칭호가 될 거라고 꿈꾸고 있었다.
“소월검수는 나오라.”
련주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소월검수의 머릿속에는 후회가 가득 밀려왔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이들을 많이 데려와야 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은 특별한 상황이었다.
화선의 방파들이 무너졌고 아이들을 뺏겼으며 웬만해서는 패배감을 경험할 일이 없던 련주가 서도진을 만나 다시 한번 치욕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일을 너무 안이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련주는 그곳에 있는 누구도 자신이 분노한 것만큼 분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후회.
그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련주에게 다가가자 련주가 손가락을 구부린 채 소월검수의 살점을 뜯어냈다.
소월검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걱정하지 마라. 네 충독이 낳은 알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지 않을 테니.”
련주의 말을 들으며 소월검수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련주님.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련주님을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할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련주가 말했지만 그 말의 의미가 다 이해되지는 않았다.
“아이를 데려와라. 무상도.”
“예, 련주님!”
무상도는 들떴다.
이제 곧 의식이 진행될 거라는 생각에 온몸에 흥분감이 감돌았다.
혈을 짚어 아이들의 의식을 잃게 만든 것이 아쉬웠다.
생생한 고통을 보게 하고 끔찍한 비명 속에서 알을 집어넣는다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단계에서는 그렇게 큰 고통이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몸속에 들어간 알이 커지면서 조금 불편하고 더부룩한 느낌이 들기는 하겠지만 벌레가 알을 깨고 나와서 장기를 뜯어먹기 시작하기까지는 버틸 만할 거였다.
아이들의 몸속으로 알이 들어갔다.
그리고 무상도가 지켜보는 동안 련주는 손수 아이들의 상처를 봉합했다.
“그곳에서 잘 자라거라.”
련주가 말하자 무상도는 이제 곧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깨닫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해 왔던 것처럼 옆구리를 갈라라.”
“예! 련주님.”
무상도는 련주가 내민 비수로 자신의 옆구리를 갈랐다.
소월검수만 해도 련주의 손에 아무렇게나 살점이 뜯겨나가 고생을 했는데 무상도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세 개지만.”
무상도의 몸에서 알을 찾아 꺼낸 련주가 말했다.
“다음에는 너에게서 얻는 알이 몇 개가 될지도 모르지. 그중 두 개는 너를 위해 쓸 수 있게 해 주겠다. 흑도 방파가 언제까지 설치게 놔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련주님…….”
무상도는 련주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충독의 알에서 나온 벌레를 사용해 무인을 각성시키고 그를 통해 대업을 달성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흑도 방파를 흡수해서 세력을 키우라는 말과 다른바 없는 얘기에 무상도는 가슴이 뛰었다.
소월검수가 견제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무상도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워 있던 아이들의 몸속에 알이 들어가고 련주가 한 아이의 상처를 봉합하더니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진 듯 손짓만으로 바느질을 끝내버렸다.
“그럼 이제 아이들을 잘 지키도록 하거라.”
“예! 련주님.”
무상도는 성심을 다하겠다는 듯이 허리를 깊이 숙였고 련주는 흑묘화의 충독이 든 항아리를 들고 그곳을 떠났다.
* * *
서둘렀지만 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아진은 뼈아프게 생각하며 먼저 성주를 찾아갔다.
아이들의 실종 사건에 사파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성주들이 모두 아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관과 무림이 불가침이라는 대명제 아래 무림의 문제를 관으로 끌고 오지 말라고 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는 아진이 북리세가의 제자라는 사실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했는데 아진은 그들과 그 문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천문관이오. 황상 폐하를 뵐 수 있는 자라는 뜻이오. 나와 대인 중 나만 황상 폐하를 뵐 수 있고 대인은 그러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나눈 대화는 내 입을 통해서만 전해질 것이오. 나는 공명정대한 사람이 아니고 내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무슨 짓이건 할 수 있는 사람이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서 잘 생각하기를 바라오.”
아진의 입에서 천문관이라는 말이 나오자 성주의 표정이 변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성주도 들은 바가 있었다.
천문관 악진혁이 파직된 후 참수에 처해지고 그 일에 서도진이 연관되었다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끝난 일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아진이 그 자리에서 갑자기 천문관이라는 말을 들먹거리자 성주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사파 놈들을 잡아 들이시오. 그중 누군가는 련주가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것이오.”
“…….”
그렇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런 일까지 떠맡게 되니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부탁하는 어조이더니 천문관이라고 신분을 밝힌 후부터 서도진은 아예 명령조였다.
“그 많은 자를 어디에 다 가두라는 것인지…… 알아내야 할 것이 있다면 차라리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서 그자를 심문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
성주는 결국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던 건가 하면서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진마다 한 번씩 보고서를 작성해 두시오. 누구를 심문하고 어떤 내용을 실토받았는지 말이오. 이 일은 황상 폐하께 자세히 고할 것이오. 어중이떠중이를 잡아다 취조하려 하지 말고 방주들을 잡아다가 가혹하게 다루시오. 내일까지 말미를 주겠소. 그때까지 알아내는 것이 없으면 이 자리를 내놔야 할 거요.”
성주는 치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천문관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권한은 없었다.
그러나 아진이 하는 말이 모두 맞았다.
둘 중 한 사람만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위치라면 그에 의해서 진실이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황상의 총애를 받는 서도진이라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욱 컸다.
아진은 상황에 따라, 그리고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야비해질 수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아진이 산본의가 사람이라서 그랬을 텐데 아진의 입장에서는 피곤한 일이었다.
괜히 가족들이 좋은 인품으로 이름을 떨치는 바람에 이곳저곳에서 아진까지 오해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사람은 인품이 좋은 사람을 호구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