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114화
무가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곁에 있는 사람을 잃게 되는 운명은 언제든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지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북리소은의 걱정을 알아차린 듯 도종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고 아진이 그런 그들을 보았다.
오래 기다려 얻은 행복인데 그들의 행복이 흔들리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 * *
다가오는 구름에 어스름 달빛이 서서히 그 기운을 잃었고 그 아래에서 벽예월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근처에 아진과 린린이 모두 있었다.
그들 모두 하늘을 보고 있었다.
벽예월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흠칫 놀라며 그들을 발견했고 두 사람도 서로를 알아보았다.
기척이야 느꼈지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아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가 모두가 하늘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아진과 린린이 벽예월에게 다가왔다.
“어때요, 언니?”
린린이 묻자 벽예월이 아진을 쳐다보았다.
혹시 이상한 것을 알아보지 못했나 하는 듯했다.
“나는 천기를 못 읽어요. 그렇게 볼 것 없어요.”
“큰 피바람이 몰아칠 거예요, 의원님. 한동안 불지 않았던 큰 피바람이요.”
그러자 아진이 벽예월을 보고 물었다.
“그것도 바뀔 수 있는 거죠, 벽 소저?”
벽예월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아진을 보고 있자니 그 생각이 흔들렸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자기가 본 것에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꿀 수 없는 미래를 안다는 것은 저주와도 같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미리 알면 체념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아진을 보면서, 그리고 린린과 소청을 보면서 벽예월은 운명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바꿀 수 있을 거예요.”
벽예월은 자기가 그렇게 말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러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미리 화선에 가 있는 게 낫겠네요. 벽 소저의 얘기가 도움이 됐어요.”
“정말…… 그럴까요?”
누구보다 더 간절히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기에 벽예월은 그 말을 붙들었다.
부디 그 말이 사실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벽 소저. 우리는 이대로 화선으로 갈 테니까 아침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께 말씀드려주세요. 천 대주님에게도요. 그리고 우리가 올 때까지 아이들을 돌봐 주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부탁할게요.”
아진의 말에 벽예월은 믿어만 달라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린린은 그 전에 아진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게 없었지만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청이도 같이 가, 오라버니?”
“그래야지. 흑주도 챙겨라. 참. 벽 소저. 우리가 말을 타고 갔다고도 알려 주세요. 말이 없어졌다고 놀랄지 모르니까.”
“네. 걱정하지 마세요.”
아진을 보던 벽예월은 아진의 뒤로 보이는 하늘에서 별 하나가 사이한 기운을 발하는 것을 발견했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지만 벽예월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눈에 일렁이는 불안이 아진과 린린 모두에게 읽혀버린 후였다.
* * *
뇌혈검이 죽고, 충독을 갖고 살아남은 대제는 이제 셋뿐이었다.
소월검수와 흑묘화, 그리고 무상도.
흑묘화는 지금의 사도련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련주가 뇌혈검을 죽이고 그에게서 충독을 거둬들인 탓이었다.
뇌혈검에게서 나온 충독.
그 충독이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무림인은 없을 터였다.
충독을 갖지 못한 자는 이번에야말로 자기들이 충독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이미 충독을 가진 자는 충독을 한 마리 더 갖게 될 때 자기들이 얻게 될 힘을 상상했다.
련주는 뇌혈검의 충독을 이용해 방주들의 충성을 이끌어냈다.
화선에 있는 방파들이 괴멸해 버린 후 련주는 빠르게 조직을 정상화하기를 바랐고 그동안 특출난 재능을 보였던 이들이 조직에 지원하기로 했다.
방파가 사라진 자리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흑도 무리가 장악해나갔다.
련주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범이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 노릇한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각지에서 왕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여우들이 모여들었다.
련주는 여우들이 지역을 어느 정도 장악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범으로 만들어줄 의사가 있었다.
패월방과 같은 곳을 잃은 것은 뼈아팠지만 그런 곳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어느 날 련주는 삼대제를 불러들였다.
세 사람 사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혹시 련주가 충독을 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대감이 그들도 모르게 들었다.
그러나 련주는 생각지 않았던 말을 했다.
“아이들을 데려와라.”
련주의 말을 들었지만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볼 뿐 련주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련주님. 무슨…… 말씀이신지.”
무상도가 조심스럽게 묻자 련주가 대뜸 무형지기를 일으켰다.
무상도는 숨이 턱 막혀 발버둥을 쳤다.
련주는 놔 주지 않을 듯 한참이나 더 무상도를 괴롭히다가 갑자기 무형지기를 거둬 버렸고 무상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목뼈가 부러져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눈물이 핑 도는 눈을 하고 목을 만졌다.
“아이들을 데려오라 했다. 충독이 알을 낳을 때가 다가오고 있지 않으냐.”
련주는 분노를 참으려 애쓰며 말했다.
세 사람은 눈을 굴리며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충독이 알을 낳을 때가 다가왔다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련주님. 그만한 수의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지면 관부에서도 주목할 것입니다. 그동안 화선에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아이들을 조금씩 납치해서 가둬두고 있다가 올려보낸 것이라 그나마 문제가 없이 운영돼 왔던 것이지만……”
흑묘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련주는 그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관부에서 주목하고 쫓아오면 그자들을 죽여라. 누가 그런 것인지 그깟 놈들이 어찌 안다는 말이냐. 머리 좋다는 제갈세가 놈들도 지금껏 이 일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기껏해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수단을 정하고 무가를 정했는지만 알아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야 그놈들에게 알아내라고 우리가 먼저 흘린 것이니 알아내도 그만이었다.”
련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갈세가에서는 자기들이 마침내 그 일의 규칙성을 알아냈다고 생각하며 우쭐했지만 그것은 련주가 일부러 그려놓은 그림에 불과했다.
일정한 규모의 무가만을 피해 대상으로 삼은 것도, 특급 살수가 나온 살수단을 고른 것도 전부 다른 이들의 행동을 한 곳으로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련주가 그 규칙에 얽매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제갈세가를 통해 정보를 얻은 무림맹에서는 그 규칙에 맞는 살수단을 찾고 거기에 맞는 무가를 미리 알아낼 수 있다며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만들어진 규칙을 알아냈다는 사실에 열광하면서.
련주는 그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듯 흑묘화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관부에서 곧장 우리를 찾아낼 것 같으냐.”
흑묘화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말을 해 주면 좋겠지만 아무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가 않은 듯했다.
“아이들을 데려오너라. 일은 이번에도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다.”
련주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듯이 말했고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다는 듯 그들 모두를 내보냈다.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모처로 이동했다.
뇌혈검에게서 나온 충독에 욕심이 없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충독 한 마리만으로도 절대의 경지에 올랐는데 충독이 한 마리가 더 생긴다면 그때는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 중 련주가 자신의 몸에 충독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기에 그 이유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은 신중하게 움직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에는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욕망의 노예일 뿐이었다.
“소월검수. 어떻게 할 생각이지?”
무상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에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우리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을 찾아가 어린아이들을 진상하라고 먼저 말을 해 보는 게 어떻겠나. 괜히 잘못 건드려서 관부에 신고가 들어가게 하는 것보다는 그러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그자들이라고 신고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결국 위험은 어느 정도 감수를 해야 한다는 말인데.”
최소한 아홉 명은 데려가야 할 거라는 것에 세 사람은 의견의 합치를 보았다.
그러려면 각자 세 명은 데려가야 했고 그 세 사람을 어떻게 구할지는 각자가 알아서 하기로 한 채 자리를 떠났다.
흑묘화는 얼마쯤 달리다가 다른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벌써 시작인가?’
그녀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생각했다.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충독이 옆구리로 내려왔다.
그러다가 그곳에 알을 낳았는데 그때마다 충독의 숙주들은 옆구리를 갈라 알을 꺼냈다.
알은 새끼손톱보다도 더 작았다.
그 후에 알이 자랄 수 있는 곳에 알을 집어넣으면 알이 점점 커지다가 그곳에서 충독의 새끼가 나오는 것이다.
처음 신호가 온 후 늦어도 사흘 안에는 알을 꺼내야 한다.
‘시간이 없어.’
흑묘화는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 * *
며칠에 걸쳐 흉흉한 일이 벌어졌다.
세간에는 산적이 내려와서 부모를 죽이고 아이를 데려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벌써 그런 일이 벌어진 곳이 네 곳이었다.
관내에서 일이 벌어지자 현청이 발칵 뒤집혔다.
유력 인사들은 행여 자기들의 집에도 그런 일이 생길까 하며 집중적으로 순찰을 강화해 달라고 했고 인력은 그런 식으로 투입이 됐다.
소월검수는 세 명을, 흑묘화는 한 명을 구했는데 무상도는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서 오히려 더 일이 더뎠다.
일이 커지자 잘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고 아이들은 가운데에 두었으며 몇 사람씩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몇 곳을 다니는데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자 마음이 급해진 무상도가 분을 참지 못하고, 함께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검을 휘둘러 다치게 하여 그들이 쓰러진 틈을 타 아이들을 전부 데려가 버렸다.
충독에게서 신호가 온 후 사흘이 되어 가던 날이었다.
흑묘화는 한 명을 데려온 후 더 이상 성과 없이 끝을 냈고 소월검수도 처음에 데려온 세 명으로 끝이 났지만 무상도는 무려 열일곱 명의 아이들을 데려왔다.
이번에는 다 쓰지 못해도 가두었다가 다음에 쓸 수도 있을 거라 무상도는 어쩌면 뇌혈검의 충독이 제 차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흑묘화는 자신에게 불호령이 떨어질까 해서 무상도에게 다가가 두 명은 자기가 데려온 거로 해 주면 안 되냐고 했지만 무상도는 음습하게 웃고 단칼에 거절했다.
두 마리의 충독을 갖고 천하제일인이 된다면 세 마리의 충독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을 하며 그는 마음껏 꿈에 부풀어 있었다.